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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제 20 장 밀레도
(대 지)
一. 방문 전도(1-6)
二. 바울의 강론과 유두고의 실족(7-12)
三.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행로(13-16)
四. 바울의 권면(17-31)
1. 과거(17-21)
2. 현재(22-27)
3. 미래(28-31)
五. 바울의 부탁과 권면(32-35)
六. 작별 인사(36-38)
(본문 강해)
一. 방문 전도(1-6)
. 20: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에베소 소요가 있은 후에 바울이 제자들을 권면하고 그곳을 떠나 마게도냐로 갔다. 그 지경으로 다니면서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면하였다. 믿음이 어린 신자들은 여러 말로 자주 권면해야 믿음에 굳게 서게 된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교인들을 계속 권면하도록 힘써야 한다. 헬라 아가야의 별명이다(아가야의 헬라명이다).
. 20: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바울이 아가야 지방(고린도)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 때에 성경으로 제자들을 권하였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선교의 본거지인 수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공모하여 그를 바다에서 해하려고 하므로 해로(海路)로 가는 것을 취소하고 육지인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때에는 위험을 피해서 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는 생명을 내어놓고 간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에는 생명을 내어놓고 가야 된다.
.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바울과 함께 여러 사람이 아시아까지 갔다. 소바더 롬16:21의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아리스다고 행19:29, 27:2, 골4:10, 몬1:24과 동일인인 듯하다. 세군도 성경 다른 곳에는 안 나옴. 가이오 행19:29와 별개인 임. 디모데 행16:1 참조.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다. 두기고 엡6:21, 골4:7, 딤후4:12, 딛3:12 참조.
. 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그들은 전 절에 말한 7인이다. 우리는 바울과 누가를 포함한 일행을 말한다.
.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내고 거기서 드로아에 가서 이레를 머물렀다.
二. 바울의 강론과 유두고의 실족(7-12)
.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 후 첫날은 주일날이다. 바울이 주일 날 드로아에서 교인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튿날은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날 밤중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 바울은 밤늦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강론하고 또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바울이 이번에 떠나면 다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줄지, 또 못 오게 될지 모르는 처지이었다. 바울이 떠난 후에 다른 사람이 와서 가르쳐 준다고 해도 바울에게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사가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바울과 같이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곳 성도들은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귀중히 여겨 하나님의 말씀을 한 말씀이라도 더 받아 영의 양식을 삼으려고 밤이 맞도록 열심히 듣고 있었다.
떡을 떼려 하여 성찬예식을 가리킨다.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깊이 참여하여 영적인 생명을 받아 가지는 일이다. 예배시간에 자기 영혼이 자라나고 새로운 말씀에 자기 심령이 힘을 얻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바울과 교인들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받으면서 밤이 깊도록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형식적으로만 드리면 생명이 없다.
. 20: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윗다락 삼층 다락을 말한다(9절). 모인 무리가 많기 때문에 등불을 많이 켰던 것이다.
.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예배시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서 강도를 듣다가 졸음에 못 이겨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다. 유두고가 떨어져 죽게 된 원인은
① 창에 걸터앉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적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영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바로 앉아서 듣게 되고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영적 세계를 발견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힘을 써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창에 걸터앉지 않는다. 유두고가 아마 예배 시간에 늦게 왔을지 모른다. 늦게 와서 앉을 자리가 없으니 창에 걸터앉았는지 모른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 사모하는 자를 오라고 하셨다. 목이 마른 사람이 와서 마셔야 그 물이 달다. 이러한 사람은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며 들은 말씀에 착념하게 되고 그 말씀이 보배로 여겨진다. 그러한 사람은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말씀이 귀한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태도가 바르지 못하고 위치가 바르지 못하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다. 유두고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한마당만 밟는 사람과 같다(계11:1-2 참조).
② 유두고는 심령상태가 졸고 있었으므로 육체도 졸았다. 심령 상태가 졸고 있으면 육신도 졸게 되며 믿음이 떨어진다. 성도는 졸거나 잠자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살전5:6 참조). 심령이 항상 깨어 등불을 켜들고 있다가 주님이 오실 때에 즉시 나가 영접하여야 한다(눅12:35-36 참조).
③ 조심하지 않다가 떨어진 것이다. 졸고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못하다가 떨어진 것이다. 조는 자는 현상 유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상태에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유두고가 삼층 누에서 떨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떨어졌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유두고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신 것이다. 유두고가 떨어진 다음에는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유두고의 신앙 상태는 양쪽에 걸쳐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다. 절반은 세상에 절반은 하늘나라에 절반은 믿음 절반은 불신앙이며, 절반은 영적 세계에서 절반은 육신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중간에 머물러 머뭇머뭇하고 옳은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고,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유두고와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유두고와 같이 징계를 받아야 회개하고 바로 서게 될 것이다. 유두고의 죽음의 결과는 예배에 큰 방해가 되었다.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한다(롬14:7-8 참조).
. 20:10-11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유두고가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이 내려가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였다. 바울이 유두고 위에 엎드린 것은 유두고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이다. 바울이 유두고를 불쌍히 여겨 자기가 떨어진 것 같이 생각하며 유두고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고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어야 한다. 유두고가 떨어져 사고가 났으나 바울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여 밤새도록 강론하고 그 이튿날 떠났다.
.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유두고는 그로 인하여 회개하여 바로 서게 되고 심령이 살아나게 되어 감사하였을 것이다. 바울이 떠난 다음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다. 신자가 실족하여 사경에 이르러 살 소망이 없어졌을 때에 회개하면 전화위복이 되어 자신이 살아나고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과 큰 위로를 주게 된다.
三.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행로(13-16)
.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이 맞도록 강론하고 거기서 앗소까지 32km나 되는 길을 배를 타지 않고 도보로 갔는데 이것은 신자들을 방문하고 권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동행자들은 선편으로 보냈다.
. 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바울이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배를 타고 미둘레네에 도착하였다. 미둘레네 레스보스 섬의 수도이다.
. 20: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기오 미둘레네 남쪽 80km지점에 있는 섬이다. 사모 기오에서 다시 80km떨어진 곳이다. 밀레도 에베소 남쪽 45km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3년이나 전도한 에베소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 오순절에는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그 때에 바울이 전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들르지 않은 이유는 반대파들로 인하여 예루살렘 행이 지연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두로에서 7일간(행21:4 참조),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유한 것을 보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四. 바울의 권면(17-31)
1. 과거(17-21)
.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 48km나 되는 먼 거리까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였다. 장로들은 감독이라고 하였다(28절).
. 20:18-19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이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하였는가를 상기시키면서 권면하였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바울은 항상 겸손하였다. 딤전1:15에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하였다. 또 에베소3:8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자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하였다. 참으로 바울은 겸손한 자이다. 누구나 "나다"하는 자리(교만)에 서 있으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겸손하고 낮아지면 하나님이 앞길을 열어 주시되 스스로 높아져서 교만하면 망하는 것이다. 겸손은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다.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지 못하고 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눈물을 많이 흘린 것 같다. 바울의 눈물은 예수님이 흘린 눈물과 비슷한 눈물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요11:35), 겟세마네 동산에서(히5:7), 예루살렘을 향해서(눅19:41) 우셨다(3번 우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불신앙을 인하여 우신 것이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나사로가 죽었다고 우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우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흠 없는 제사로 드리기 위하여 우셨다. 예수님이 우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운동을 위하여 우신 것이다. 유대인의 간교한 계획이 있었으나 바울이 잘 참고 주님을 섬기며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유익한 것 즉 하나님의 바른 진리는 공중 앞에서나 개인의 집에서나 거리낌없이 다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고 핍박하더라도 그것을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다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양심이 평안하고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었다.
.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 즉 복음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파하였다.
2. 현재(22-27)
. 20:22-23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심령에 매임을 받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심령에 끌려서 따라간다는 말이다. 심령은 중생한 영혼과 마음이 연합된 것이다. 바울이 심령에 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이 있는 줄 알면서도 바울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성령을 순종하게 되고 심령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항상 심령에 매임을 받는 생활을 하였다.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할 때에 진리와 영감으로 심령에 역사하여 인도하신다. 성도는 육신은 괴롭더라도 심령의 인도를 순종하여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 새벽기도를 하면 심령이 편안하고 새벽기도를 안 하면 심령이 편안하지 않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를 거역하면 심령이 편안하지 않다. 남을 사랑하면 심령이 편안하고 남을 미워하면 심령이 편안하지 않다. 인색한 마음으로 연보를 조금하면 심령이 편하지 않고 연보를 힘써 많이 하면 심령이 편안하다. 심령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다.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여도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가는 길이요,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길이다.
.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할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달려갈 길 믿는 사람 각자에게 달려갈 길이 있다. 달려갈 길을 잘 달려가는 성도도 있고 잘 달려가지 못하는 성도도 있다.
바울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계속하여 달음박질하는 사람이었다. 빌립보3:12에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 달려갈 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아 끌고 가시는 데 나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그 뜻을 이루려고 끌고 가시는 중에 있다. 우리도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좇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각자에게 각각 다르다. 우리 성도가 모든 정성과 물질과 생명까지 다 바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여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는 그 뜻을 다 이루어 드려야 한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모세가 달려갈 길이다.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사렙다 과부는 과부대로 각자에게 달려갈 길이 있다.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요(행20:24 참조),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행20:18 참조). 주님이 자기를 붙들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려고 하면 생명을 바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죽기를 무서워하면 일생에 종노릇한다(히2:15 참조).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불의에 종노릇하고 마귀에게 종노릇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못한다.
. 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예루살렘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이 증거하였으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순교 당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을 아노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결사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다.
. 20:26-27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리만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바를 다하였다는 뜻이다. 에스겔3:18절에 전도를 받지 못한 악인이 자기 죄 값으로 망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망하지만 그 피 값은 전도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찾는다고 하였다(겔33:8 참조).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할 책임이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진자라고 하였다(롬1:14 참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봐 두렵다고 바울이 말했다. 전도하면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택한 자를 건져내게 된다. 전도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고 망하면 그 피에 대하여는 책임이 없고 깨끗하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 주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하였다.
3. 미래(28-31)
.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바울이 권면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를 위하여 삼가고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하였다. 감독(교역자)이 삼가 조심하여 자기를 지키고 양떼를 지키지 않으면 교회가 무너지고 만다.
둘째, 교회와 자기 직책을 바로 알라.
①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았다. 감독(교역자)직분을 맡은 것은 사람들이 맡겨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맡겨 주신 것이다(갈1:1 참조).
②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다. 교인들의 교회도 아니고 목사의 교회도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예수의 피가 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성도들은 예수의 피를 인하여 생명이 살아 나가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면 교인이나 목사나 무조건 순종하여야 한다.
③ 하나님이 양떼를 치게 하셨다. 교인들은 양이므로 목자가 없으면 안되고 목자는 양을 먹이고 쳐야한다. 친다는 것은 양을 기르는 것을 말하며 교역자는 양을 먹이고 다스리고 인도하고 양육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진액이 들어가고 피땀과 눈물이 들어가야 교회가 발전한다. 교역자가 양(성도)을 칠 때에 진액을 짜 바쳐서 양떼를 먹이고 잘 돌보아야 양떼가 잘 자라고 번성해 나간다.
교역자가 자기만 먹고(자기 볼장만 보고) 피땀과 진액을 짜 바치지 않는 교회는 양떼가 굶주리고 사방으로 헤매이며 흩어진다. 이러한 목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겔34:2, 6, 10 참조). 그러므로 교회에서 교역자의 위치가 제일 중요하다. 교역자가 만들어져야 교인들이 만들어질 수 있고 교역자의 영이 살아야 교인들의 영이 살게 된다. 교역자의 신앙이 죽으면 교회 전체가 다 죽는다.
.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셋째, 이리가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않을 줄을 알라.
흉악한 이리 성도들의 심령에 상처를 주고 물고 뜯는 자들이다. 거짓 선지자와 이단들은 물론이고 보수를 주장하는 교역자 중에도 이러한 자가 많이 있다. 참된 목자 바울이 떠나면 이러한 이리가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빌립보3:2에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과 손할례당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였다. 개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물고 찢고 싸우는 자이다. 행악하는 자들은 진리를 세워 나가는 일을 방해하고 파괴시키려고 하는 악한 무리들이다. 손할례당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 얻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어 놓았으니 성경은 안 지켜도 된다는 폐법주의도 손할례당과 같은 것이다.
진리를 세워 나가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나오고 개와 같이 물고 뜯고 손해를 주려고 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이러한 악한 이리에게 양떼가 물려가지 않도록 양떼를 잘 지켜야 한다.
.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교회 안에서 어그러진 말을 하며 자기를 좇게 하려는 자들이 일어날것을 말해 주었다. 이러한 자들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좇음보다 자기를 좇게 하여 자기 유익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넷째, 일깨어 3년간 받은 교훈을 기억하라.
① 감독들은 일깨어 있으라고 했다. 교역자가 잠자면 이리가 들어와 양떼를 잡아먹는다. 일깨는 것은 영으로 살며 영적 식별(識別)을 가지는 것이다. 일깨어 있을 때는 이리가 오는 것을 잘 알고 막을 수 있으며 영의 양식을 잘 먹일 수 있다.
② 바울이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교회를 위하여 일을 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근면하고 충성을 다하였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4:2 참조).
③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은 교인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가르친 것이다. 교역자는 교인들의 되지 못한 것을 긍휼히 여기며 가르쳐야 한다.
五. 바울의 부탁과 권면(32-35)
.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교회를 주와 그 말씀께 부탁하고 떠났다. 주님이 살아 계셔서 교회를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시고 그 말씀으로 먹여 주신다. 그 말씀이 교회를 길러 주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 주신다. 교회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말씀을 복종하는 성도는 그 말씀이 붙잡아 주고 든든하게 세워 요동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고 금생과 내세에 기업이 있게 만들어준다.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말씀이 하라는 대로하는 것이다.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다. 이러한 성도는 그 말씀이 견고하게 세워 주고 기업이 있게 하여 주신다. 그러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풍속과 자기 생각대로 나가는 자에게는 말씀이 힘이 없고 지켜 주지 못하고 인도하지 못한다. 성도가 말씀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고 새 힘을 얻어야 한다. 주와 그 말씀에 붙잡힌 성도가 복 있는 자이며 주와 그 말씀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한다.
. 20:33-34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바울은 물질에 대하여 탐심을 가지지 않았고 항상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았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물질에 대하여 초월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또 물질도 하나님께 바로 사용한다. 물질에 대하여 믿음을 쓰지 못하는 자는 다른 일에도 믿음을 쓰지 못한다. 바울은 손으로 일하여 동행자들을 도와주면서 전도하였다. 또 바울이 교회에서 연보하여 보내 주는 것을 받아 사용하면서 일하기도 하였다(빌4:14-18 참조).
.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대개 다른 사람에게 받는 것을 복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받는 사람은 받아서 먹으면 없어지지만 주는 사람은 그 의가 하늘 나라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고후9:9-10 참조). 주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기쁘고 믿음을 썼으므로 영혼이 자라난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남을 도와주려고 힘을 써야 한다.
六. 작별 인사(36-38)
. 20: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교회를 떠나는 바울과 전송하는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울고 무릎을 꿇고 같이 기도하고 가장 사랑하고 친절한 인사를 나눈 후 배에까지 바울을 전송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더욱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크게 울며 애석한 작별을 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인정을 끊고 주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