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 . 9
박재삼 시인
김 송 배
1980년대 후반, 박재삼(朴在森) 선생이 문협에서 어떤 심사를 마치고 예총 편집실에 들렸다. 차 한 잔보다는 술 한 잔이 어떠냐면서 나를 잡아 끌었다. 그는 평소에 고혈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약간 의아해 하면서 따라 나섰다. 대학로 어느 자그마한 목로주점이었는데 ‘청하’라는 정종을 좋아했다. 그것도 냉장고에서 금방 끄집어낸 차가운 것이었다.
‘선생님, 혈압이 있으신데 술이 괜찮겠습니까?’
‘김형, 고려원에서 나온 내 수필집『빛과 소리의 풀밭』못 읽어봤소?’
그 책에서 「술과 持病」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혈압 환자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은 거의 철칙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술을 적당히 마시는 것으로서 병이라는 대감을 대하고 있으니 남이 들으면 웃을지는 모른다.
나의 경우, 고혈압이라고는 하지만 몸이 비대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빼빼 마른 데서 온 고혈압이고 보면, 술은 금기의 대상이 아니라 내 몸이나 정신에 약간 기름을 쳐주는 이른바 윤활유 구실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평소에 ‘청하’ 술 한 병과 ‘장미’ 담배 한 갑이면 만사가 흡족하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는 ‘병을 달래는 것으로서 술을 마신다’는 참으로 순진한 웃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취기가 오르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홍도야 울지마라’는 우리 문단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통하는 애창곡이다.
그러나 1967년에 혈압이 원인이 되어 뇌혈관 파열로 쓰러지는 고통을 이겨내었지만 아직도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옹도야 우이아라 오바가 이이다(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라고 어눌하지만 그의 흥은 전과 동일하다.
그는 1933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4살 때 경남 삼천포로 와서 살게 된다. 벌써 1949년, 제1회 영남예술제(지금은 개천예술제) ‘한글시 백일장’에서 이형기 시인이 장원을 하고 시조 「촉석루」가 차상에 입상하는 문학적 재질을 보여주었다.
그후 『文藝』와『現代文學』에 모윤숙, 유치환, 서정주의 추천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우리 문단을 빛낸 입지적인 시인이다. 구자운, 성찬경, 박희진 시인 등과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62년, 첫 시집『춘향이의 마음』을 출간한 이후 16여권의 시집과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등 10여권의 수필집을 상재했다.
춥고 어려웠던 시절, 시를 하면 더욱 더한 추위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알았건만, 나는 이를 버리지 않고 용케도 지키고 온 것은, 재물보다도 더 값진 것을 ‘남기겠다’는 오기가 승해 있었다고 할 만하다. 아, 어쩌면 이 오기가 나를 구제해주고 재활케 해준 근원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는 그가 문학을 하게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하곤 했다. 또한 우리 후학들에게 ‘내가 이제 시를 좀 알고 들어가는 듯한 길목에서 내가 진정 좋은 시를 생각하고 쓰고 하는 것은 앞으로의 영원한 과제이다’라고 자신을 빗대어 교훈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했다.
그는 현대문학 신인상을 비롯하여 제9회 한국시협상과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여 그의 작품성을 높이 떨쳤으며 1994년에는 『박재삼 시 전작선집』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출판문화회관에서 가졌다.
이때 조병화, 문덕수 시인이 축사를 하고 내가 사회를 보았는데 어린애처럼 분위기에 상기되어 좋아하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는 ‘청하’ 몇 잔을 마시면서 긴 장미 담배 한 개비 임에 물면 ‘문학과 가난’에 대해서 독백을 자주 했다.
새벽 서릿길 밟으며 /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 것들이 / 방안에 제 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 보는 이 없는 것 / 알아주는 이 없는 것 / 이마 위에 이고 온 / 별빛을 풀어 놓는다 / 소매에 묻히고 온 / 달빛을 털어 놓는다.
이처럼 「어떤 歸路」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난해서 겪었던 지난 얘기와 함께 문학이 성숙된 경로를 들려줌으로써 시 정신과 현실과의 갈등을 풀어헤쳐 우리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해서 함께 눈물을 글썽이던 일도 있었다.
그는 호구지책을 위해서 현대문학사를 비롯한 여타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중앙 일간지에 몇 군데에 바둑 관전기를 썼다. 그는 ‘처음에는 취미삼아, 또는 부업 삼아 써본 것이 이제는 그것이 본업화 했다’고 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수입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그를 바둑계나 언론에서 ‘박국수(朴國手)’라고 불렀다. 그의 관전기를 전국의 바둑인들은 읽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들도 신문을 가판대에서 사서 읽을 정도로 명확한 해설과 가끔 해학 넘치는 문장력에 매료되고 있었다.
한편 그는 열렬한 야구팬이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가 있는 날이면 거의 관전을 했다. 그보다도 더 야구광인 백파 홍성유 소설가와 나란히 앉아서 나름대로 예측하고 평가하는 자리였으나 쎄입이나 아웃이 될 때마다 환호와 분노를 터뜨리기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백파가 소설을 쓰다가 ‘홍도야 울지마라’ 장면을 묘사하던 중 가사가 잘 기억나지 않아서 한밤중에 그에게 전화로 물었는데 그는 윗목에 놓인 전화기에 대고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천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가. 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그의 병마는 악화되었다. 무슨 합병증에 의해서 발가락 절단 수술까지 하면서 시에 매달렸지만, 1997년 지병의 악화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시대의 가난의 시인이었고 불운의 시인이었다. 한국시인협회장으로 거행하여 그의 명복을 빌었으나 장례식장은 우울했다. 그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고향, 선산이 있는 삼천포에 잠들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충남 공주의 어느 산자락에서 영면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삼천포에 ‘박재삼문학관’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그의 이장문제는 아직도 말이 없어서 좀 서운하기만 하다.
*[문학공간] 2009.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