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
체험적 진실과 삶의 의미
車 漢 洙
(시인. 동아대 교수)
1.
金松培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를 읽었다. 이 시집에는 시인의 체질이 밴 목소리가 살아있었다. 그 金松培 시인의 목소리에는 걸걸하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저려 거짓 없는 삶의 틀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천착의 자세와 사랑을 갈구하는 경건한 노력은 이 시집의 한 특성이라 할 것이다.
2.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이다.”칸딘스키의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과 ‘침묵’ 그리고 ‘젊음’과 ‘무’의 상관성은 절대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생각을 굳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흰색이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무한성은 절대 자유의 의지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김 시인의 시에는 이 같은 의지가 잔잔히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가 있다. 이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제1부의 <사랑 또는 詩>와 <대학로 片片>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제2부의 <실어증 혹은 불연설>과 제4부의 <黃江을 지나며>에서는 향토에 대한 서정이 짙게 깔려 있는 한편, 현실의 억매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이 절실하게 표상되고 있다.
특히 ‘물/흙/불/돌/꽃/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를 의인화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제시하여, 새로운 시적 의미를 열고 있다고 생각된다.
머물고 싶다 하얗게 부서지는
시간을 붙안고 그냥 기도로 남고 싶다
깊은 산골짝
산새 울음에 묻히려니
그러나
곱게 자란 순이의 시집가는 모습으로
눈물 되어 떠나야 하는
어쩌면 세월처럼 흘러흘러
이젠 소금기에 절여진 내 육신이
모래펄에 버려지느니
다시 돌아가고 싶다
비워진 마음으로
마알간 속살로 그냥 넘고 싶다
--「물의 말」전문
‘물’은 물이고 싶다는 평범한 발상이지만 그 평범에서 오는 범상한 진리에 접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 비워진 마음으로 / 마알간 속살로 그냥 남고 싶다’는 갈망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젠 ‘소금기에 절여진 내 육신’으로 모래펄에 버려지기를 거부하는 자세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다는 말로 대입할 수 있다. 아무리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시간과 같이 일상의 온갖 꿈이 허망한 것이다. ‘비워진 마음’, ‘마알간 속살처럼’처럼 허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메시지가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내가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은
은빛 날개로 찾아오는
영혼을 맞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소유한 저 지평선 너머로
사는 일 훌훌 털어버리고
먼 길 떠나는 사람아
안개 속에 뿌린 눈물 거두고
이젠 어둠과 섞이려나
은밀하게 풀잎 하나
지금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픔으로 거둬들인 하얀 꽃씨
깊게 묻어둠도 아니리니
허기진 투망을 던지다가
이승의 인연을 버리고
돌아온 너
내 품에 잠들게 함이다.
-- 「흙의 말」전문
흙의 이미지는 모성이다. 생명의 모체인 흙은 ‘내가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은 허기진 투망을 던지다가 이승의 인연을 버리고 돌아온 너를 내 품에 잠들게 함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사는 일 훌훌 털어버리고 / 먼길 떠나는 사람’과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무소유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풀잎하나 지금까지 흔들고 있는’ 행위로 이어진다. 결국 ‘너’라는 실체가 이승의 인연을 끊고 내 품에 잠들게 하고자 하는 흙의 잠재적 신비성과 구원한 생명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라 생각된다.
立冬은 눈물로 가는 길목
못 가진 자의 예비된
이정표 앞에서
작은 소망들이 떨리고 있다.
젖은 햇살 속에 잠기는
허허로운 눈시울
빈 가지에 잠재우고
활활 타오르는 영혼이었나
동지섣달 날밤을
날 기다리는 여인아
눈발 부딪는 문풍지에
더욱 그리운 너의 체온
하늘까지 풀어버린 어둠도
뜨겁게 사루려니
산동네를 휘감는 겨울 노래
아아, 한 줌 재로 사그라진 당신.
--「불의 말」 전문
생명의 존귀한 정신이 표상된 시편이다. 첫행 ‘立冬은 눈물로 가는 길목‘에서 ’立冬‘은 24절기 가운데 열 아홉째이다. 상강(霜降)과 소설(小雪)사이에 있으며 양력 11월8일이나 9일경에 해당되는 절기이다.
그러니 ‘立冬’은 춥고 긴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잎들은 떨어지고 가난하고 못 가진 민초들의 작은 소망마저 허물어지고, 산동네를 휘감는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사는 길이 얼마나 고단하고 아픈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소망’과 ‘타오르는 영혼’, 그리고 ‘너의 체온’은 불씨처럼 살아있음으로 ‘풀어버린 어둠’도 사루겠다는 극복의 자세는 생명에 대한 강한 인식이자 초월의 경지에까지 이르려는 몸짓인 것이다.
더구나 ‘한 줌 재로 사그러진 당신’같은 싯구는 한용운의 ‘타고남은 재가 다시 거름이 됩니다’의 ‘재=거름’과 같이 ‘재=당신’의 은유도 상호반응 메카니즘으로 주체와 객체의 호응과 통일에 의해 의미의 변화와 상승을 꾀하여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열고 있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잠재력을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정신의 깊이에 대한 통찰과 겨울이 주는 고독과 고뇌의 아픔을 체득하여 가장 순수한 삶을 꿈꾸는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참을 수 없이 허탈한 토요일 밤이면
물음표를 그리면서 그 자리에는
덩더꿍 덩더꿍...
갈증만 뱉어내는 일상들이
우우 휴지로 풀려 나가고
--「대학로 片片.2」에서
그대 뜨거운 사랑을 위하여
나는 밤새도록 그대 곁에 서 있어
--「대학로 片片.3」에서
오는 비야
무엇 하나 내 가슴 깊이 적셔주지 못한 채
흔들림만 길들여지고
--「대학로 片片 4」에서
겨울비에 젖어
시린 영혼들
그대 체온으로 데우고 싶다.
--「대학로 片片.6」에서
활활 날자구나
창밖 회백색 하늘이
나를 부르고
알량한 일상의 껍질은 벗어라 한다.
그리고 나뭇잎처럼 춤추라 한다.
--「대학로 片片.9」에서
연작시 「대학로 片片」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라는 주제의식이 절실하게 나타난다. 위에 인용한 싯귀에서도 그러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참을 수 없이 허탈한 토요일 밤’, ‘그대의 뜨거운 사랑을 위하여’나는 밤새도록 그대 곁에 있겠다는 지순한 행위에서 사랑의 절실함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허탈함’, ‘뜨거움’과 같은 시어에서 표상되는 의미는 ‘목마름’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허탈하고’, ‘가슴 적셔주지 못하고’ ‘훨훨 날자구나’에서는 목마름이 한층 더하고, 사랑은 더욱 절실한 것이다. 겨울의 차고 매서운 비에 젖어 차가와진 영혼을 그대 체온으로 데우고 싶은 마음 깊이 신의와 사랑은 싹트고 있는 것이다.
3.
그리고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현실적인 생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력서」, 「忍冬草」등의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냥 백지였으면 좋겠다
실지렁이 고물고물 기어간 자국은
언제나 쫓겨 간 나의 과거
어렴풋이 한번 되돌아보는 일은
참으로 측은한 일일러라
황토길 용케 기어간 피투성이
아프게 아른아른
그냥 백지로 남아있는 꿈이면 좋겠다.
어느 날 장대비 들판을 휩쓸어
희미한 흔적마저 지워버린
내 이력서
--「이력서」에서
‘실지렁이 고물고물 기어간 자국’과 ‘언제나 쫓겨 간 나의 과거’와 동일시함으로서 자신이 걸어온 자취의 일상을 아파하고 있다. ‘그냥 백지로 남아 있는 꿈이면 좋겠다’는 진술에는 지난날에 대한 냉정한 비판의식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식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시편이 「忍冬草」, 「開花方」 등이라 할 것이다.
흔들림 없이 무슨 꽃을 피우랴
사랑함 없이 무엇을 노래하랴
겨우내 언 손 호호 허리춤에 감추고
봄 햇살 꿈꾸는 너와 나
양지쪽에서 숨죽인 우리들
견딤이 오랠수록 눈물이 많습니다.
꽃망울이 큰 꿈일수록 눈물이 많습니다.
--「忍冬草」 전문
이 시가 주는 느낌은 따뜻하다. ‘흔들림’과 ‘사랑함’의 조화가 이룩됨으로써 꽃은 피고 노래가 불리어지는 것이다. ‘겨우내 언 손 호호 허리춤에 감추고’ 봄 햇살 꿈꾸는 소망은 인동의 아픔을 견디는 고독이 눈물로 응집되면서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삼경이 지나도록 지등을 밝힌 채, 배곯아 떠난 어린 자식 이제나 저제나 삽짝 밖에서 어머니 부르면서 돌아올 나를 기다렸다. 동구 밖 개 짖는 소리 어둠에 묻히고 개골개골 너는 왜 그렇게 도 울어 쌌노. 주르르 타 내리는 눈물을 소매 끝에 훔치면서 보리고개 삼짇날 쑥버무리 송기죽 한 사발 눈물로 말아 가문 하늘 한번 쳐다보고 자식 생각하다가 어느 날 별이 되신 어머니-내 나이 쉰 가까워서 잠 못 이루는 밤, 지등보다 밝은 마음의 등불 켜들고 별빛 속을 헤멘다.
--「思母曲」중에서
또한 「思母曲」에서는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가식 없이 그리면서, 시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 시에는 과거와 현재가 상응하면서 ‘지등, 동구 밖, 개골개골, 보리고개, 쑥버무리, 별빛, 아지랑이, 풀꽃, 새소리’ 등의 상관물로 과거의 체험적 사실을 시적 현실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金松培 시인의 내면세계에 자리한 ‘주르르 타 내리는 눈물을 소매 끝에 훔치면서 보리고개 삼짇날 쑥버무리 송기죽 한 사발 눈물로 말아 가문 하늘 한번 쳐다보고 자식 생각하다가 어느 날 별이 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인은 하늘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환청하고 있다. 거기에는 가난함과 배고픔의 아픔을 넘어서서 사랑의 순수함을 눈물겹도록 그리는 한편 ‘별’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비관적 현실인식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멀리서 솟구치는 파도는
내 곁에 밀려와
모래 위에 새겨둔 사연일랑
하나씩 지워야 했다.
--「다시 바다에 와서」에서
이처럼 시인은 그리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두둥실 뭉게구름 위로/내 영혼은 떠가고 있다.’는 깨침은 김 시인의 연작시 「旅情」20편에서도 그의 시에 대한 천착의 자세와 삶의 생명력이 무게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旅情 ⋅19-천국의 바람소리」를 일독하여 본다.
천국을 가기 위해
필라투스를 오를까
잊혀진 세월을 되돌아보며
탁 트인 천국을 볼거나
보아라
알프스에서 몰아온 찬바람이
호수에서 서로 만난 안개를
보아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토록 사랑을 위해서 살고
푸드득 이국의 산새들은
나직한 울음으로
그들을 위해 우노니
아, 누가 천국을 날으려 하는가
7천 피트의 산정에서
천국의 노래를 부른다.
4.
金松培 시인은 첫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手話』에서 농촌의 서정성을 밑바탕으로 도시의 삶을 허수아비의 손짓으로 단정하다가 두 번째 시집『안개여, 안개꽃이여』에서는 예리한 통찰력의 가시화로 문명세계를 비판하는 변모와 함께 이번 『백지였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로 연주하고 있다.
아무튼 시인의 체험을 통한 진실이 시인의 삶의 본질을 의미하는 포근한 감성으로 승화되는 그의 노래는 영원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게 된다.
‘바람’, ‘눈물’, ‘안개’, ‘안개꽃’등의 시어를 많이 구가했던 초기 시에서 보다 진실 되고 아름다움, 그리움을 뛰어넘은 ‘사랑’을 삶의 근본으로 취하고 있는데서 金松培의 시세계를 우리는 깊이 응시하게 되는 연유일 것이다.(시집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