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나는 나다. 그 알파이며, 그 오메가다. 나는 근본이며 궁극(窮極)이라는 말은 나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내용이다.
2)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끝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된다.
3) 엔 아르케(근본)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나. 본론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계 1:4)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번역이 매우 잘못되었다. 원 의미에 조금도 접근할 수가 없게 번역하였다.
1) ‘나는 나다. 그 알파이며, 그 오메가다. 나는 근본이며 궁극(窮極)이라는 말은 나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내용이다.
계 1:8의 원어 (에고 에이미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아르케 카이 텔로스, 레게이 호 퀴리오스,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호 판토크라틀)
‘바른 번역은 나는 나다 그 알파이며 그 오메가다. 나는 근본이며 궁극(窮極)이다. 가라사대 그 주시며, 그 하나님이며, (근본으로부터) 현재 오고 있고(현재분사, 현재 나타나고 있으며), 그리고 현재 계속 오고 있으며(미완료, 나타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신(현재분사, 나타나고 있으며) 그 전능자(주권자)이시다.’
이 내용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 문장은 시제가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전혀 없다. 과거 상과 미래상이 끊어진 현재 상만 가지고 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것을 지향해 오셨다.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나타나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반드시 사라지게 된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신약에서의 하나님(예수 차원의 나)은 등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새 언약에서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 ‘나’를 계시록 1:4과 1:8에서 말씀하고 있다.
계시록 1:8은 모두 ‘나(예수 차원의 나)’에 관한 말씀이다. 여기서 나타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도 아니요 ‘존재’도 아니다. 의미를 모르고 문법을 따라 번역하다 보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나는 나다’로 번역한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있는 그 ‘나’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로서 계시록 1:8에 나타난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차원의 ‘나’ 자신이다. 이것을 온전히 알려면 휘장(마음)이 찢어져야 한다. 몸 밖으로 나타난 우주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휘장이 완전히 찢어지지 않아도 어느 상태에 도달한다면, 깨어난다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이 창세기 1장(1절부터 2:3까지)의 내용이다. 창세기 1장(베레쉬트기)에 일곱 욤(욤은 날로 번역하였다)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다. 한 욤(첫째날로 번역하였다)부터 일곱 욤까지 등장한다.
우리가 한 욤(첫째 날로 오역하였다) 상탱에 이르기만 해도(사빠뜨 욤)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머리로 아는 것이 아님).
2)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끝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된다.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루코메노스) 번역이 잘못되었다.
한글 번역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시제가 없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호’는 ‘나’로 표현한다.
‘온’은 ‘내가 지금 오고(나타나고) 계신다.’
‘엔’은 ‘내(그)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오고(나타나고) 계신다.’
‘엔 아르케’와 ‘엔’과 ‘호 로고스’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엔 아르케’를 우리 마음 안에서 보기란 대단히 어려운 문제지만, 최소한 작은 깨달음이라도 와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온전히 사라지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문제다. 이 문제는 체험하지 아니한 자들이 억지로 자기 생각을 넣어서 번역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
그러나 ‘호 로고스’ 하나님은 의식을 가진 상태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호 로고스’가 무엇인가?
‘엔 아르케’와 ‘엔’을 하나로 보아서 해석해 보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된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예와 엘로힘)이 바로 ‘엔 아르케’와 ‘엔’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3) 엔 아르케(근본)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엔 아르케’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호 로고스’로 끊임없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호 로고스가 아버지와 하나 될 때까지다.
‘엔’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으로 계속해서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호 로고스’ 하나님으로 오시며(나타내고), 나(예수 차원) 자신으로 계시된다.
‘엔’은 그냥 미완료 동사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며 속성이다. 예수 차원의 나(하나님)로 계속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엔’ 하나님이다.
그런데 엔은 ‘호 온’과 하나며(계 1:4, 1:8), 이어서 등장하는 ‘호 메르코메노스’와도 하나다.
그러므로 요 1:1은 체험과 깨달음이 없이는 해석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 같은 분들은 이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생명의 빛)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이 될 뿐이며, 수많은 학자들처럼 엉뚱한 해석으로 사람들을 이천 년간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지금도 엉뚱한 해석들이 온 세상에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그리스도, 생명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이 해석은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지식이 될 뿐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