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나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좋은 목자(토브, 칼로스)로서 심판이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2) 내면의 베레쉬트와 하나 되면 에고 에이미가 드러나 마음을 벗고 속사람(무)만 남게 된다.
3) 하나님의 뜻은 내면에 와 있는 그리스도(보석, 생명의 빛)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다.
나. 본론
1) 나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좋은 목자(토브, 칼로스)로서 심판이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에고 에이미 호 호이멘 호 칼로스` 호 호이멘 호 칼로스 텐-프슈겐- 아우투 티데신 휘페르 톤 프로바톤)
“나는 좋은 목자라. 그 좋은 목자는 그 양들을 위하여 그 자신의 혼을 내어놓는다(아버지에게)”
선한 목자는 번역을 잘못하고 있다. ‘선한’ 그 의미는 선하고 악하다는 개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좋은 목자(칼로스)’의 그 의미는 ‘호 로고스’가 육신(싸르크스) 안으로 오신 ‘모노게네스(아버지와 하나된)’다. 에고 에이미가 이루어진 것이다.
창세기 1장에 좋다(토브)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좋음(토브)이다. 좋음(토브)의 속성은 선업을 쌓는 자에게도 악업을 쌓는 자에게도 비(빛)를 골고루 내려 주신다. 토브(좋음)는 겉 사람의 마음과 맞대면하여 항상 계신다. 받는 자의 상태에 따라 그 열매가 나오기 때문에 자업자득이다. 그러므로 이를 ‘선한 목자’로 번역하면 선악 지식으로 갈라지게 한다. 그 의미를 모르고 잘못 번역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이르도록 성경을 번역한 종교인들은 ‘좋음(토브)’과 ‘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 안에 있는 뱀은 항상 선(좋아함)과 악(싫어함)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은 좋음(생명)으로 맞대면하여 있는 마음을 사망으로 여긴다. 좋음(토브)은 아들과 하나 됨이요 아버지와 하나 됨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실상이며 새 언약(엔 아르케)에 에고 에이미로 드러난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으신 분으로 좋아함 싫어함이 없다. 깨달음은 무아를 가리킨다.
2) 내면의 베레쉬트와 하나 되면 에고 에이미가 드러나 마음을 벗고 속사람(무)만 남게 된다.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와 하나 되면, 에고 에이미가 드러나 몸과 마음은 끝난다. 고난의 과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좋음, 좋다’로 표현한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몸과 마음을 나와 일치시킨다면 다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뱀의 노예가 되면 뱀의 몸과 마음을 입고 나오게 되므로 계속해서 고난의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좋아함 싫어함(선악)을 아는 것이 사망(하나님과 단절)으로 말씀하고 있다.
헬라어 ‘칼로스’는 ‘좋다’라는 의미이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히브리어의 ‘토브’와 상응한다. 사도 바울은 이 좋음(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세히 표현하였다. 이 서신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사랑 장으로 오해하고 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왜곡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내용은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난 이후에 등장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두 시제가 없는 것으로 바울 사도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겉 사람을 초월하였다는 뜻이다.
3) 하나님의 뜻은 내면에 와 있는 그리스도(보석, 생명의 빛)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다.
자신 안으로 이미 와 있는 보석을 캐내어 소유하고 있지 아니한 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좋음(토브)이 와서 일어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다. 사도 바울은 이 좋음(토브)인 생명의 빛과 하나됨을 말씀하고 있다. 모두 파로이미아와 파라볼레로 된 내용이다. 그러나 ‘아가도스’는 그 문맥을 따라서 ‘좋다’이기도 하며 ‘선하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가도스’는 그 문맥에 따라서 ‘좋다’인지 ‘선하다’인지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