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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성불하는 도리를 혹은 ‘한 생각’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삼아승기[三祇]’라고 한다면, 결정코 어느 글을 취하여서 후학(後學)에게 밝혀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답] 성불의 뜻은 겁도 아니며, 느리거나 빠름의 가르침은 방편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밝히기를 “용맹스런 중생에게는 성불이 한 생각에 있다 하고, 게으른 이에게는 과위를 얻음이 삼아승기를 채워야 한다”고 하였으니, 다만 형식으로 가르치는 자취의 말이요 모두가 방편이 될 뿐이다.
『능엄경초(楞嚴經鈔)』에서 이르기를 “겁(劫)이란 바로 시분(時分)의 뜻이어서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이 있으며, 모두가 중생의 허망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바다. 이는 또한 허망한 소견이 움직이면 바깥으로 풍륜(風輪)을 느끼고, 욕망이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수륜(水輪)을 느끼며, 굳게 집착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지륜(地輪)을 느끼고, 연구함이 초조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화륜(火輪)을 느끼며, 4대(大)로 말미암아 여섯 감관이 일어나고 여섯 감관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섯 경계를 보며 여섯 경계를 보기 때문에 시분이 있다. 만약 무명의 근본이 한 생각의 망심임을 깨달으면 마음으로부터 나는 바의 3계가 마침내 없는 줄을 안다. 또 때는 경계로부터 성립되는데 경계는 오히려 본래 공(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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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스스로 체성이 없거니 어떻게 다시 겁의 수가 많고 적음을 논할 필요가 있겠으며, 한 생각으로 무명을 끊기만 하면 무엇 때문에 다시 아승기를 지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로 손가락 튀기는 동안에 무학(無學)을 초월한다”고 하셨고, 또 이르기를 “생각 모양[想相]이 티끌이 되고 식정(識情)이 때[垢]가 되나니, 두 가지를 다 함께 멀리 여의면 너의 법눈은 바로 그 때에 청정하여질 터인데 어떻게 위없는 지각(知覺)을 이루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으며,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눈어림인 줄 알아 이내 여의면 방편조차 짓지 아니하며, 눈어림을 여읜 줄 바로 깨달으면 역시 점차(漸次)조차도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길거나 짧은 겁은 한 생각으로 말미암아서 오고 삼승의 과위에 나아감도 다 같이 꿈속이며, 깨치는 때의 일이 모두 여러 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반나절이 50소겁(小劫)임을 연설하였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7일이 1겁임을 연설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백장 광액(廣額)이 날마다 천 마리씩의 양을 죽이다가 나중에 발심하자, 부처님께서 ‘현겁(賢劫) 동안에 부처가 되리라’고 하시자, 여러 큰 보살들과 아라한들이 의심하기를 ‘우리들이 성불하는데도 오랜 겁이 될 터인데 광액이 무슨 까닭에 우리보다 먼저 성불할까’ 하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일찍 이루고자 한 이면 이내 일찍이 이뤄지고 오랜 뒤에 이루고자 한 이면 오랜 뒤에야 이뤄지나니, 만약 참 성품을 단박에 보면 바로 한 생각 동안에 성불하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영리함과 둔함은 같지 아니하고 더딤과 빠름은 나에게 있나니, 마음이 나면 법이 나고 마음이 소멸하면 법도 소멸함을 증험하여야 한다.
3계에는 따로의 법이 없고 이 한 마음으로 지을 뿐이니, 온갖 경계는 모두가 동요되는 생각으로 인해서요, 생각이 만약 나지 않으면 경계도 본래 체성이 없다. 도리어 동요된 생각을 궁구하면 생각 또한 비고 고요하며, 이내 미혹될 때에도 잃음이 없고 깨칠 때에도 얻음이 없음을 알 것이니, 머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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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참 마음은 더하거나 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富樓那)야, 그대 어찌 듣지 않았느냐. 실라벌성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새벽에 갑자기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있는 미목(眉目)은 얌전한데 자기의 머리에는 얼굴도 눈도 볼 수 없자 도깨비가 되었다고 성을 내며 미쳐서 달아났다 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무슨 일로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부루나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마음이 미친 탓이오며 다른 까닭은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각(妙覺)이 밝고 뚜렷하여 본래 원만하고 명묘하거늘 이미 허망이라 일컫는데 무슨 원인이 있겠느냐.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 하겠느냐. 스스로의 모든 망상이 차츰차츰 서로 원인이 되고 미혹으로부터 미혹을 쌓아 티끌 수만큼의 많은 겁을 지냈으므로, 비록 부처가 밝힌다 하더라도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미혹된 원인은 미혹으로 인하여 스스로 있는 것이니, 미혹이 원인 없음을 알면 허망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오히려 나는 것도 없거늘 무엇을 없애려 하겠느냐. 보리를 얻은 이는 꿈깬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는 분명하지만 무슨 인연으로 꿈 속 물건을 취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원인이 없어서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성중의 연야달다가 어찌 인연이 있어서 제 머리가 무섭다고 달아났겠느냐. 광증이 홀연히 없어지면 머리가 딴 데서 온 것이 아니며, 비록 광증이 쉬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잃어버렸겠느냐.
부루나야, 허망의 성품은 이런 것이니, 원인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다만 세간과 업과(業果)와 중생의 세 가지가 계속됨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으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여 너의 마음 속에 있는 연야달다의 미친 성질이 스스로 쉬게 될 것이며, 쉬기만 하면 이내 보리의 훌륭하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한지라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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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얻을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그렇게 애써서 닦아 증득하려 하겠느냐.’”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머리를 얻었거나 잃음이 없다 함에서의 머리는 참 성품에 비유하여 무명으로 미혹되었을 때에도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무명이 쉬었을 적에도 따로 얻는 것이 아니다. 쉬기만 하면 이내 보리라 함은 본 체성을 깨치기만 하면 다섯 가지 현량식(現量識)과 온갖 만행(萬行)이 모두 다 완전히 갖추어져서 바로 그것이 보리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중생들은 본래 성불하였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였다”고 함과 같다.
또 단박[頓]에 쫓고 점차[漸]로 얻은 것을 다 같이 알맞는 방편이라고 한다.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갑자기 단박을 말하여도 역시 이는 방편이요 점차와 단박이 다 옳다 하여도 부처를 헐뜯는 것이고 다 옳지 않다 하여도 역시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본각의 체성 위에서는 단박이거나 점차를 떠났고 언설조차 여의었거늘, 어디에 단박과 점차라는 이름이 있겠는가. 제6식이 움직이면 분별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곧 평등하여 법계에 두루하다. 다섯 가지 현량식 등의 낱낱 감관도 모두가 법계에 두루한지라 눈으로 빛깔을 보는 때에 빛깔도 얻을 수 없어서 원래가 법계와 평등하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양이 언제나 머무른다”고 했다. 바로 세간의 온갖 모양이 본래부터 항상 머무르고 있는 줄 알 것이다.
어느 행의 지위에서 알 수 있느냐 하면, 부처님만이 도량에서 아신 뒤에 길잡이로서 방편으로 말씀하셨고 중생이 미혹하여 모르기 때문에 말씀하게 되시나, 만약 안다면 다시 설명을 기다릴 것이 없다. 설명이 있으면 모두가 방편에 속한 줄 알 것이다.
[문] 곧 제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 이도 도리어 다른 부처를 세우는 것인가. 만약 결정코 세우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님의 위신으로 이룩한 바와 가피로 보호하여 생각하시는 것 등이 없으리니, 이내 단견(斷見)을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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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제 마음 성품이 온갖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딴 부처님을 뵈어도 그대로가 자기의 부처여서 자기와 남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이 한 마음뿐이므로 중생은 마치 형상 위의 모형과 같아서 만약 모형이 제거되면 벌써 자기의 부처를 볼 것이요 딴 부처님도 보게 되리라. 왜냐 하면 딴 부처님을 본다 하더라도 그대로가 자기의 부처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어 만들어 냈기 때문에 역시 딴 부처님도 무너뜨리지 아니하며, 그 본바탕 위에서는 딴 부처의 형상을 화하여 일으켰다 하더라도 바로 저 모양의 부분이다. 변하고 변하지 않음은 모두가 이 한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중생의 미혹과 깨침인 두 마음으로 인하여 보거나 보지 않음과 자기와 남의 도리가 있다. 만약 참 성품에서 보면 미혹과 깨침이 어찌 따르겠는가. 자기와 남이 다 함께 없어지고 법신은 형상도 없고 자기와 남이 서로 보는 모양조차 없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미혹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음 밖의 경계를 취하여 생각을 내어 도리를 어기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부처를 볼 수 없으며, 둘째는 안의 쌓임[蘊]의 모양을 취하여 성품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부처를 보지 못한다. 깨침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온갖 법이 바로 마음 제 성품이요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니며 망정이 부셔져서 진리가 나타남을 분명히 알면, 노사나의 몸을 보고 법 성품에 일치하여 안팎에 없다. 둘째는 쌓임의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알면, 제 마음의 부처와 노사나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음을 본다. 마치 하늘 제석이 하늘의 업을 닦지 않았다면 궁전이 어찌하여 몸을 따르겠으며, 전륜왕이 왕의 원인을 짓지 않았다면 칠보가 모일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의 선행에 의거하여서만 밖으로 훌륭한 인연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온갖 여래는 동일한 체성이요 큰 지혜 바퀴 속에서 갖가지 지혜 광명을 내느니라. 불자여, 그대들은 여래가 한 해탈의 맛에서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갖가지 공덕을 내는 줄 알지니라. 중생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바로 여래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바다’ 하면, 불자여, 이것은 여래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바가 아니니라.
불자여, 내지 한 보살이 부처님 처소에서 일찍이 선근을 심지 않았다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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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조그마한 지혜라도 얻는다는 이치는 있을 수 없느니라. 다만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덕의 힘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공덕만을 보게 하나, 부처님 여래는 분별도 없고 이름도 없고 무너뜨림도 업고 짓는 이도 없으며 짓는 법도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ㆍ응정등각의 출현의 모양이니라”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참된 하나[眞一]는 하나조차 없으면서 같지 않음이 나타나며, 혹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고 승가를 생각하면 승가가 나타나기도 하나 그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이 아님도 아니면서 부처님이 나타나며, 내지 승가가 아니고 승가가 아님도 아니면서 승가가 나타난다. 왜냐 하면 그의 망상으로 희망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니, 제 마음에서 나타난 성스런 일의 연기를 깨닫지 못하고 한결같이 바깥의 경계로 삼으면서 차별이 있으나 실은 불ㆍ법ㆍ승이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큰 대장간에서 스스로가 모형을 모나고 둥근 것이 저절로 일치하게 만들어놓고 그 녹인 금이 자기의 모형에 흘러들기를 원하여 형상이 되게 한다. 그러면 녹인 금으로 형상이 이루어졌기는 하나 그 실제의 녹은 금은 형상이 아니고 형상 아님도 아니면서 형상을 나타낸 것처럼 그 사람이 부처를 생각하는 것 또한 그와 같다.
큰 대장간의 금은 여래의 법신에 비유하고, 모형은 중생의 희망에 비유한다. 생각이 녹아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생각과 부처가 화합한 연(緣)으로 갖가지 몸 모양이 생기게 한다. 그러나 그 법신은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다. 왜 모양이 아니냐 하면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왜 모양이 아님도 아니냐 하면 연기의 모든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법신은 나타난 것도 아니고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고 뜻도 아니어서 온갖 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 범부는 마음만을 따르면서 있으므로 곧 부처의 생각을 내나 한결같이 그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 하면서 자기 마음이 화합하여 있음을 모르는 것이요, 혹은 한결같이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다고 하여 바로 정법을 비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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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왜 모양이 아니라 하는가.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어서라 함은,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바라 바깥 모양은 체성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느껴나는 바라 인연이 다하면 이내 소멸되거늘 무슨 모양이 있겠는가. 때문에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다’고 한다.
왜 모양이 아님도 아닌가. 연기의 모든 모양이기 때문이라 함은, 이미 일정함이 없다 하면 인연을 따라서만 나타나는 것이어서 인연이 화합하면 허환한 모양이나마 없지 아니하다. 때문에 ‘연기의 모든 모양’이라 한다.
만약 분별을 내지 아니하고 자기와 남을 고집하지 아니하며 안으로는 있음에 집착하면서 모든 쌓임[蘊]을 취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없음에 집착하면서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면, 눈을 뜨고 눈을 감거나 발을 들고 발을 내리거나 간에 보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이 아님도 아니로되 참으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보성론(寶性論)』에서 이르기를 “부처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란 볼 수 있는 법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으로서는 볼 수가 없다. 법이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법이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식(耳識)으로서는 들을 바가 아니다. 승가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승가란 ‘무위(無爲)를 이름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으로 공양하고 예배하고 찬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3보(寶)는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아서 듣고 보는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며, 곧 중생의 마음 부처가 부처 마음의 중생을 헤아린다.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다스릴 것이 있으면 모두가 삿된 소견을 이룬다. 그러므로 육조(六祖)가 이르기를 “삿됨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며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나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한다. 이렇게 제도하면 바로 참되게 제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 이미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고 부처는 바로 마음이라 본다면, 어떻게 교(敎) 중에서 변화한 부처님이 와서 영접하고 모든 깨끗한 국토에 난다고 설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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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법신 여래는 본래 생멸이 없되 참으로부터 변화를 일으켜 미혹한 근기들을 가까이 이끌어 들이므로, 변화는 그대로가 참이요 진신ㆍ응신은 한 끝이어서 곧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나 물건과 마음을 따라 응한다.
또 화신의 체성은 곧 진신이라 오감이 없다고 설명하나 진신으로부터 화신이 흘러나와서 실제로는 가고 옴이 있나니, 곧 오는 모양이 아니면서도 오고 보는 모양이 아니면서도 본다. 오지 않으면서 오는 것은 마치 물속의 달이 갑자기 드러난 것과 같고, 보지 않으면서 보는 것은 마치 뜬 구름이 홀연히 나타난 것과 같다.
[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참 체성은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화신은 오지 않으면서 온 것이라면, 바로 이 마음 이외에 딴 부처님께서 계시면서 와서 영접한 것이거늘 어떻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증명하겠는가.
[답] 오로지 이것은 여래의 자비와 본원(本願) 공덕의 종자인 증상연(增上緣)의 힘으로 일찍이 부처님과 인연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염불하고 관(觀)을 닦고 여러 복과 지혜며 갖가지의 선행을 쌓게 된 공덕의 힘이 인연이 되어 곧 제 마음에서 부처님 몸이 와서 영접함을 느껴 나타난 것이요, 모든 부처님이 실제로 화신을 보내 와서 영접하지는 아니한다.
이는 공덕의 종자인 본원의 힘만으로 교화 받은 중생의 때와 근기가 바로 계합되어서 제 마음에 부처님이 와서 영접함을 보게 되는 것이며, 부처님 몸은 맑고 언제나 고요하여 오고 감이 없고 중생의 식심(識心)이 부처님의 본원의 공덕인 훌륭한 힘을 의탁하여 제 마음이 변화되면서 오는 것이 있고 가는 것도 있다.
마치 얼굴이 거울에 나타나는 것 같고 마치 꿈에서 하는 일과 같다. 거울 속의 형상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꿈속의 형질은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다. 이것은 자기 마음일 뿐 부처님의 변화와는 관계된 것 아니므로 오지도 아니하고 가지도 아니한다.
모든 부처님의 공덕에서 보아 ‘간 것도 있고 온 것도 있다’고 하는 것이며, 중생의 마음 모양에 나아가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깨끗한 업이 순수하게 성숙되면 눈으로 부처님을 보게 되고 나쁜 과보가 이루어지려면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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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나타난 줄 알 것이다.
마치 복덕 있는 사람이 조약돌을 가지면 금이 되고, 업보로 가난한 사람은 금이 변하여 조약돌이 되는 것 같다. 조약돌은 금이 아닌데도 금으로 나타나고, 금은 조약돌이 아닌데도 조약돌이 된다. 금으로 된 것은 이 마음만으로 되었고, 조약돌로 나타난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타났을 뿐이다. 바뀌고 변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있거늘, 금과 조약돌이 어찌 다르겠는가. 의심 품은 무리들은 이 뜻을 알아야 된다.
[문] 앞에서 분석한 것과 같아서 본체[理]와 현상[事]이 분명하여 부처 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거늘 무엇 때문에 교(敎) 안에서 다시 염불(念佛) 법문을 세우는가.
[답] 다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믿지 않고 바깥을 향하여 내달아 구하는 이를 위해서일 뿐이다. 만약 중근ㆍ하근이면 방편으로 부처님의 색신을 보면서 반연과 거친 생각을 집중하여 바깥으로부터 속으로 드러나서 점차로 자기 마음을 깨치게 하며, 만약 상근기라면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게 할 뿐이니, 부처님을 관하게 함도 역시 그렇다.
『불장경(佛藏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의 실상을 보면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무엇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은 마침내 공(空)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 마침내 공하여 아무 것도 없는 법이 염불이며, 내지 또 염불이라 하면 모든 생각을 여의어 모든 생각이 나지 않으면 마음에 분별이 없고 이름도 없고 장애도 없으며 욕심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각관(覺觀)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사리불아, 아무것도 없음에 따라 거친 생각[覺]도 없고 세밀한 생각[觀]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달하면 염불이라 한다. 이와 같은 생각 안에는 탐냄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거역도 없고 순종도 없으므로 생각 없음[無想]이라 한다.
사리불아, 생각도 없고 말이 없으면 염불이라 하며, 이 안에는 아주 미세한 작은 생각까지도 없거늘 하물며 거친 몸ㆍ입ㆍ뜻의 업이겠느냐.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없는 곳에는 추함도 없고 거둠도 없으며 다툼도 없고 송사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어서 공하고 고요하여 성품이 없고 모든 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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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멸되나니, 이것을 염불이라 한다.
사리불아,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성취하여 사천하 땅을 굴리고자 하면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또 백천만억의 악마를 항복할 수 있거늘 하물며 못된 무명이 거짓인 인연으로부터 생기어 결정된 모양이 없는 것이겠느냐.
이 법은 이와 같이 생각도 없고 쓸모없는 의론도 없으며 남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으며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다.
악마거나 악마의 백성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세속의 언설로써 교화할 바가 있으면 말하기를 ‘네가 염불할 적에 조그마한 생각도 취하지 말고 쓸모없는 의론도 내지 말며 분별도 내지 말라’고 한다. 왜냐 하면 이 법은 모두가 공(空)하여 체성이 없고 한 모양조차 생각할 수 없어서 이른바 모양 없음[無相]이기 때문이니, 이것을 진실한 염불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치 해와 달이 허공에 머무는데/온갖 물 속에 모두 그림자를 나타내듯/법계에 머물되 동요한 바 없이/마음 따라 영상을 나타냄도 그렇다”라고 했다.
또 게송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제청보(帝靑寶)가/물건에 비추면 모두 같은 색깔이 되듯/중생들이 부처님을 보는 때에도/부처님 보리의 색깔과 같아진다”라고 했다.
해석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 보리의 색깔은 바로 중생 심성의 광명이다”라고 했다.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보리 또한 그렇다.
그런 까닭에 문수(文殊)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빛깔이 없고 형상이 없으며/뿌리가 없고 머[문]데도 없으며/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무소관(無所觀)에게 공경히 예배한다”고 했으며,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허공은 중간과 갓이 없는 것처럼/모든 부처님의 마음 또한 그러하며/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무소관에게 공경히 예배한다”라고 했다.
화엄의 「입법계품(入法界品)」 중에서 덕운(德雲) 비구는 온갖 부처님 경계의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기억하고, 내지 온갖 세상의 염불문에 머물러서 자기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널리 3세의 모든 여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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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부사의해탈경계품(入不思議解脫境界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널리 끝없는 업을 쌓아/온갖 세간들을 장엄했으며/온갖 법이 모두 마음임을 알매/몸을 나툼이 저 중생의 수와 같네”라고 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님의 몸과 성문의 몸과/벽지불의 몸 등이며/다시 갖가지의 육신으로 된 몸은/그것을 안의 마음이라 하네”라고 했다.
『대방광여래비밀장경(大方廣如來秘密藏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비밀장의 법은 온갖 지혜의 마음이며, 내지 이 마음이 기둥이 되어서 겁내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으며 파리하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으며 게으름도 없어서 등지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이 마음을 순종하여 향하면서 깨달아 안다”고 했다.
『화수수경(華水手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은 마치 해의 밝고 깨끗함과 같아서 바르게 관한 바에 따라 모두가 끝없음에 든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온갖 법은 모두가 마음의 광명이어서 티의 가리움이 없기 때문에 ‘마치 해의 밝고 깨끗함과 같다’고 하며, 모든 법에 따라 이런 관을 지을 수 있으면 자기 마음이 끝이 없는 끝에 들지 아니함이 없다.
또 『지관(止觀)』에서 밝히기를 “염불삼매(念佛三昧)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다시 나를 생각하되 ‘마음으로부터 부처가 되고 몸으로부터 부처가 된다’고 해야 하나, 부처는 마음으로써 얻지 못하고 몸으로써도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써 부처의 빛을 얻지 못하고 빛으로써도 부처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왜냐 하면 마음이란 부처라 마음이 없고 빛이란 부처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빛과 마음으로써는 삼보리(三菩提)를 얻지 못하며, 부처는 빛까지 이미 다하였고 식(識)까지도 이미 다하였다.
부처라고 말한 바가 다한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모르지만 지혜로운 이는 환히 안다. 몸과 입으로써는 부처를 얻지 못하고, 지혜로써도 부처를 얻지 못한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지혜란 찾아도 얻을 수 없고 스스로 내가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며 볼 바도 없기 때문이니, 온갖 법의 근본은 아무 것도 없어서 근본이 무너졌고 근본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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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치 꿈속에 칠보를 보고 내 것으로 삼아 기뻐하다가 깨어난 뒤에 생각하여 보아도 어디에 있는 것을 모르듯이 이렇게 염불을 한다.
또 부처님께서 계실 적에 세 사람의 형제가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암라바리(菴羅婆利)라는 음녀와 사위국(舍衛國)의 수만나(須曼那)라는 음녀와 왕사성(王舍城)의 우발라반나(優鉢羅槃那)라는 음녀가 있음을 들은 뒤에 저마다 사람들에게서 세 여인이 견줄 데 없이 잘 생겼었다는 칭찬을 듣고 그들은 밤낮 생각만을 하다가 문득 꿈속에서 성교를 하게 되었다. 깨어난 뒤에 생각하여 보니 그 여인들은 오지도 않았었고 자기도 가지 않았었는데 성교는 이룩되었다. 이로 인하여 깨치고서는, ‘온갖 법이 모두가 이러한가’ 하고, 이에 발다바라(跋陀婆羅)보살에게 가서 이 일을 묻자, 발다바라보살은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실로 그러하며, 모두가 생각으로부터 난다.” 이렇게 갖가지로 이 세 사람을 위하여 방편으로 모든 법이 공(空)함을 교묘히 설명하자, 이 때 세 사람들은 이내 아비발치(阿毘跋致)를 얻었다.
이것으로도 사람이 오가지도 않으면서 즐거웠던 일이 완연함을 알았으니, 이와 같이 염불하여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큰 늪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팠는데 꿈에 맛있는 밥을 얻어먹었다. 깨고 나니 다시 배가 고프므로 생각하기를 ‘온갖 법이란 모두가 꿈과 같구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염불하면서 자주자주 생각하며 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하면 장차 아미타불 국토에 가 나리니, 이것을 모양과 생각함이 같다고 한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현호(賢護)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억하건대 옛날에 명호가 수파일(須波日)이라는 부처님 세존께서 계셨다. 그 때 어느 한 사람이 너른 들판을 가면서 굶주림에 몹시 고생하다가 잠을 자게 되었다. 마침 꿈 속에서 여러 가지의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서 배가 아주 불렀다. 그런데 깨고 나자 다시 배가 고팠으므로, 이 사람은 이로 인해 생각하기를 ‘이렇게 모든 법은 다 공하여 진실 없는 것이, 마치 꿈 속에서 본 바가 본래 스스로 진실이 아닌 것과 같구나’라고 하였나니, 이와 같이 관하는 때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불퇴전을 얻었느니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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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이 보물을 유리(瑠璃) 위에다 대면 그림자가 그 속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비구가 뼈를 관찰하자 여러 가지 광명이 일어난 것과 같다. 이것은 가져온 이도 없고 이런 뼈도 없는 것이요, 이것은 뜻으로 지었을 따름이다.
『대방등대집경』에서 이르기를 “또 현호야, 마치 비구가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면서 새 시체를 보았더니 형색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혹은 푸르러지기도 하고 노랗게 되기도 하고 검게 되기도 하고 붉게 되기도 하였으며, 내지 관하던 뼈가 흩어지고 그 뼈가 흩어지되 어디로부터 온 데도 없고 간 데도 없었으며, 마음만으로 짓는 바여서 도리어 자기 마음을 본 것과 같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또 거울 속의 형상이 바깥에서 오지 않았고 가운데서 생기지 않았으며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 형용이 보이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사람이 빛깔이 청정하면 보는 것도 청정하며, 부처님을 보고자 하면 이내 부처님을 보며, 보면 이내 묻고 물으면 이내 대답한다.
경을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하면서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어디서 오셨을까. 내가 간 데도 없었는데 내가 생각한 바대로 마음에서 지은 부처를 보았구나. 마음 스스로가 마음을 보았고 부처의 마음을 보았으니 이 부처의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로다. 스스로가 마음을 알지 못하면 마음은 스스로 마음을 보지 못하며,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어리석게 되고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다. 이 법은 보일 수 있는 것이 없고 모두가 생각으로 되는 바다. 설령 있다 하여도 그 생각 또한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공일뿐이다’라고 하면, 이것을 불인(佛印)이라 한다.
탐내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으며 구하는 바도 없고 생각하는 바도 없어서 온갖 것이 다하고 하고 싶은 바도 다하여 어디로부터 온 데도 없고 없어져야 할 바도 없으며 부술 것도 없는 것이니, 도는 반드시 도의 근본이어야 한다. 이 불인은 2승조차도 파괴할 수 없거늘, 하물며 악마이겠는가.
『바사론(婆沙論)』에서 밝히기를 “새로 뜻을 낸 보살은 먼저 부처의 빛깔이 있는 형상[色相]인 형상의 체성과 형상의 업과 형상의 결과와 형상의 작용을 생각하여 아래의 세력을 얻고, 다음에는 부처님의 마흔 가지 특수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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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共法]을 생각하여 마음에 중간의 세력을 얻으며, 그 다음에는 실상(實相)을 생각하여 부처의 으뜸가는 세력을 얻으면서 색신과 법신의 두 몸에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하고, 게송에서 이르기를 “색신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아니하고/법신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으면/온갖 법을 모두 잘 알아서/영원히 고요하여 허공 같으리”라고 했다.
또 “부지런히 닦는 이는 어떤 사람이 지혜를 얻고자 하면 마치 큰 바다가 나를 위하여 스승이 되게 함이 없는 것과 같지만 이 자리에서 신통을 운용하지 않고도 모든 부처님을 다 보고 말씀한 바를 다 듣고 다 받아 지닐 수 있는 이리니, 언제나 삼매를 행하여 모든 공덕에서 맨 첫째가 될 것이다.
이 삼매는 바로 모든 부처의 어머니요 부처의 눈이요 부처의 아버지요 생멸이 없는 대비(大悲)의 어머니로서 모든 여래는 이 두 가지 법으로부터 났다.
대천(大千)의 땅과 초목을 부수어 티끌로 만들고 그 하나의 티끌을 하나의 부처님 세계로 만들어서 그 많은 세계에 가득 찬 보배로써 보시하면 그 복이 매우 많지만, 이 삼매를 듣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은 것보다는 못하리니, 하물며 믿고서 받아 지니어 읽고 외면서 사람들을 위하여 해설함이겠으며, 하물며 소의 젖을 짤 만큼의 동안이라도 선정의 마음으로 닦아 익힘이겠으며, 하물며 이 삼매를 능히 이룸이겠는가. 때문에 한량없고 그지없다”라고 했다.
또 『바사론』에서 이르기를 “겁화(劫火)거나 벼슬아치ㆍ도둑ㆍ원수ㆍ독룡ㆍ짐승이거나 뭇 질병이 이 사람에게 침노한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다. 이 사람에겐 언제나 천룡팔부와 모든 부처님들이 다 함께 수호하여 생각하고 칭찬하게 되며 모두 함께 그를 보려고 그가 있는 곳으로 온다. 만약 이 삼매의 위와 같은 네 가지의 공덕을 듣고 모두 따라 기뻐하면 3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도 모두 따라 기뻐하리니, 다시 위의 네 가지의 공덕보다 더 훌륭하다.
만약 이와 같은 법을 닦지 않으면 한량없는 중한 보배를 잃는지라 사람과 하늘들이 그를 위해 조심하고 슬퍼하리니, 마치 콧병 걸린 사람이 전단향을 가지고도 맡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마치 농사꾼이 마니주로써 한 마리 소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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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제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모르고 도리어 딴 법을 구한다면 도를 저버리면서 도를 닦는 것이니, 그 허물이야말로 범부가 마음의 보배를 통달하지 못하여 독 밥을 인간 천상에서 먹고 2승이 제 집 보물을 멀리 여의고서 똥을 치운 품삯을 찾는 것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지혜 있는 이가 들으면 능히 믿고 이해하나, 지헤 없는 이가 의심하고 뉘우치면 영원히 잃게 된다”고 했다.
[문] 성불하는 문에서 만약 선을 닦음[修善]을 논하면 앞뒤가 있지만, 만약 이 성품의 선함[性善]은 본래 한 마음이요 평등한지라 모든 부처에도 이미 성품의 악함[性惡]이 있고 천제(闡提)도 성품의 선함이 있어서 이미 동일한 성품이면 다 같이 성불해야 합당하거늘, 어떻게 천제는 성불하지 아니하는가.
[답] 만약 성품의 부처를 말하면 누가 평등하지 않겠는가만, 만약 닦아 이룸에서 보면 천제는 아직 갖추지를 못했다.
태교(台敎)에서 묻기를 “천제와 부처는 어떠한 선과 악을 끊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천제는 선을 닦음의 모두를 끊어서 성품의 선함만이 존재하고, 부처는 악을 닦음[修惡]을 모두 끊어서 성품의 악함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문] 천제는 성품의 선함이 끊어지지 않아서 도리어 선을 품음이 일어나게 할 수 있고, 부처는 성품의 악함이 끊어지지 않아서 도리어 악을 닦음이 일어나게 되리라.
[답] 천제는 성품의 선함을 요달하지 못한다. 요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선에 물이 들어서 선을 닦음이 일어나게 되고 모든 악을 널리 다스리거니와 부처는 성품의 악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악함을 요달한다. 악을 요달하였기 때문에 악에 자재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악에 물들게 되지 않아서 악을 닦음이 일어나게 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부처는 영원히 다시 악함이 없고 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악한 법의 문을 널리 이용하여 중생들을 제도한다. 종일토록 이용해도 종일토록 물들지 않기 때문에 일으키지도 않거늘 어찌하여 천제로써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천제가 이 선악을 요달하면 다시는 일천제라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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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천제가 선의 모두를 끊는 것을 밝힌다면, 아뢰야식의 훈습을 받아 다시 선을 일으킬 수 있다.
아뢰야식은 바로 무기무명(無記無明)이라 선악이 의지하고 보존되어 온갖 종자가 된다. 천제는 무기무명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선이 생기거니와, 부처는 무기무명이 다 끊어져서 훈습할 만한 바가 없기 때문에 악이 다시는 생기지 아니한다.
만약 악으로써 만물을 교화하려 하면, 신통 변화를 지어서 중생을 제도할 따름이다.
[문] 만약 부처의 지위에서는 악이 다 끊어졌으므로 신통을 지어서 악으로 만물을 교화한다면 이것은 뜻을 지어야 비로소 악을 일으킬 수 있으리니, 마치 사람이 여러 가지 색깔로 형상을 그리되 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과 같고 또 밝은 거울이 움직이지 않아야 빛과 형상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사의한 도리로써 악해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 뜻을 지어서라면 외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답] 지금 밝힌 천제(闡提)는 성덕(性德)의 선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인연을 만나면 선이 발생되고, 부처 또한 성품의 악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부처의 기연(機緣)에 부딪치거나 부처의 인자한 힘을 훈습하면 아비지옥에 들어가서 온갖 나쁜 일을 같이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한다.
성품에 악함이 있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음[不斷]이라 하며, 다시는 악을 닦음이 없으면 항상하지 않음[不常]이라 한다. 만약 닦음과 성품이 모두 다하면 이것은 끊어짐이 되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끊어지지 않음이요 항상함이 아니다.
천제도 그러하여 성품의 선함이 끊어지지 않은지라 도리어 선근이 생기고, 여래는 성품의 악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악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해하는 마음은 물들음이 없고 악의 끝을 통달하였으므로 바로 그것은 실제(實際)며, 5역(逆)의 모양으로써도 해탈될 수 있어서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며 행은 도(道)가 아니면서도 불도를 통달한 것이지만, 천제는 물들었고 통달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는 다르다.
무엇을 통달하지 않았다 하느냐 하면, 성품 없음[無性]을 요달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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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의 모든 법은 모두 성품 없음을 성품으로 삼으며 이 성품이 바로 불성이다. 곧 머무르는 근본이 없는 그대로가 법성이기 때문에, 이 선악의 성품은 끊어질 수가 없다.
이 자기 심성을 추구하여도 얻을 수 없고 곧 머무는 곳이 없는데도 온갖 처소에 두루하는 것이 곧 선악의 성품이다. 성품은 선악이 없되 선과 악을 낼 수 있고, 선악은 끊을 수 있지만 성품은 끊을 수 없다. 선악은 똑같이 심성으로 성품을 삼는지라, 만약 성품의 악이 끊어지면 심성도 끊어지는 것이나 성품은 끊어질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천제는 성품의 선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비록 3악도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성품의 성은 줄어들지도 않고 성품의 악도 더해지지도 아니한다. 바로 성불하기까지 성품의 선이 더해지지도 아니하고 성품의 악이 줄지도 않는 이 성품이 곧 법신이다.
마치 밝은 거울에는 본래 곱거나 미운 여러 형상이 없는데 온갖 곱거나 미운 뭇 형상을 나타낼 수 있고, 형상에는 더하거나 덜함이 있지만 밝고 깨끗한 빛의 체성은 더해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과 같다. 거울에는 본래 형상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나타낼 수 있다.
불성은 선악이 없지만 선악을 나타낼 수 있으며, 중생은 성품을 얻지 못하고 선악만을 얻으므로 선악에 구애되어 자재하지 못한다.
성품의 선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서도 부처 경계의 선이 발생되고, 성품의 악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도 여섯 갈래의 악을 나타낼 수 있다.
또 성품이란, 바로 선악 등의 모든 법의 성품이며, 시방 3세의 중생과 국토의 온갖 처소에 두루하되 변하여 달라짐도 없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면서 선과 악ㆍ범부와 성인ㆍ더러움과 깨끗함ㆍ원인과 결과 등을 나타낼 수 있다.
성품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성품의 선함과 성품의 악함’이라 하며, 또 선악 등은 일정한 모양이 없으나 인연 따라 끌고 익히는 것이 마치 거울 속에 형상의 체성이 없는 것과 같다.
만약 깨끗한 인연을 만나면 선해지고 물든 인연을 관계하면 이내 악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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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닦음으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에 ‘선을 닦음과 악을 닦음’이라 한다.
만약 성품의 선함을 논한다면 천제뿐만이 아니요, 성품의 악함을 논한다면 모든 부처님뿐만이 아니어서 이 선악은 모든 법의 성품이기 때문에 곧 일체 중생들이 모두 다 갖추고 있어서 한 끝이요 평등하다.
만약 이 성품을 깨달아 알면 이내 성불하게 된다. 때문에 성인을 보이고 범부를 나타낼 수 있어서 자재하고 걸림이 없다.
만약 선을 닦고 악을 닦음에서 논한다면 상ㆍ중ㆍ하의 근기에 일정할 수 없어서 닦아 이룩함의 두터움과 얇음에 따라 역량의 얕고 깊은 대로 세간의 과보를 얻으면 여섯 갈래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며, 출세간의 과보를 이루면 네 성인으로서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게 된다.
선악의 성품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악에 구애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지만 만약 성품을 보고 도를 통달하면, 무슨 도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곧 법마다 종(宗)을 드러내고 티끌마다 뜻에 계합되거늘 어찌 선악의 두 가지 법만에서 자재함을 얻겠는가.
[문] 3보는 허공의 모양과 같고 보고 듣는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라면 교(敎) 중에서는 어떻게 도를 본다[見道]고 설명하고 또 부처를 본다[見佛]고 일컫는가.
[답] 근본 지혜[本智]의 밝아짐에서 보아 거짓으로 일컬어 본다[見]고 한 것이요 눈으로 본 바가 아니며 증득해야만 알게 된다.
보는 것을 여의고 보는 것이 아니라야 참된 봄[眞見]이라 하나니,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실로 보는 바가 없으며, 보는 바가 없으면 곧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으면 바로 온갖 법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법성은 아무 것도 없고 보살도 보는 바가 없지만 법의 본체와 만나는지라 임시로 일컬어 본다고 하는 것이니, 실은 보는 것이 아니다.
참 성품은 맑고 고요하여 이는 보는 법이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는 법을 행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께서 빠르게 수기를 주면 이는 단상(斷常)의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읜 것이어서, 곧 제 몸의 청정함을 보고 몸의 청정함을 보면 곧 이것이 부처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며, 내지 온갖 법이 모두 다 청정함을 보아서 부처 아님이 없고 법이 아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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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심성이 남[生]이 없되 물건을 따라 온갖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에 만약 한 티끌이라도 이것이 부처가 아니라면 장애가 이룩되어 보안(普眼)의 문에 들지 못하고 능소(能所)의 소견에 떨어질 뿐이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범천(梵天)이 해혜(海慧)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당신은 지금 분명하게 불법을 보십니까’ 범천은 말하였다. ‘불법은 빛깔이 아닌지라 볼 수가 없거늘, 어떻게 분명하게 불법을 본다고 말하겠습니까. 온갖 법은 모두가 볼 수 없습니다. 분명하다면 바로 그것이 불법이요 두 모양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오면 물속의 달과 같고 흩어지면 허환한 구름 같으며, 보면 마치 꿈속의 형상과 같고 들으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 같으며, 깨친 곳에는 이내 나타나지만 방소로부터 오지 아니하고 미혹된 곳에는 저절로 없어지지만 여기서 떠나지도 아니한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뚜렷한 깨달음을 널리 비추고 고요히 사라져서 둘이 없으며, 그 안에서는 백천만억 말로 할 수 없는 아승기의 항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도 마치 허공 꽃이 어지러이 일어났다가 어지러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반야가명론(般若假名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여래의 법으로 몸을 삼아서/법의 성품을 관하여야만 하리니/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며/또한 알 수도 없다”고 했다.
법의 성품이란, 이른바 공(空)의 성품이요 남이 없는 성품이다.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첫째가는 이치의 몸이어서 만약 이것을 보게 되면 부처를 본다고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공의 성품을 보면 여래라고 한다”고 했다. 또 법 성품의 처소에는 한 물건도 이름을 붙여서 알 바가 없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대왕이여, 온갖 법 성품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평등하게 뭇 물건의 의지할 바가 되어 주면서도 그 체성은 있는 물건이 아니고 없는 물건도 아니며, 이 속의 고요하면서 앎이 없음을 능히 앎을 분명히 안다고 말하여 아는 이라고 하나니, 세속의 언설에 따라 믿고 이해하여도 남이 없는[無生]복은 보물의 보시보다 많으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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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지니고/보리 마음을 낸다 하여도/공을 이해함에 견준다 하면/16분의 1도 못되느니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제일의 공을 이해하여야 반야를 이루고 남이 없는 제 성품을 보면 비로소 원종(圓宗)을 요달하며, 진공(眞空)의 무너지지 않는 업과는 놓고 낮음이 완연하나 단공(但空)과도 같지 아니하고 모든 존재[有]를 겸하지 아니한다.
『대열반경』에서 이르기를 “업이 있고 과보가 있지만 짓는 이가 보이지 않음이 이와 같은 공의 법을 제일의 공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성품을 보는 때에도 성품은 본래 생각을 여의나 생각이 있으면서 없애야 함이 아니며, 물건을 관하는 동안에도 물건은 본래 형상이 없으나 물건이 있으면서 보내야 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생각 여읨의 지혜는 허공계와 같다”고 했다.
『대승천발대교왕경(大乘千鉢大敎王經)』에서 이르기를 “이때 보명(普明)보살은 비로자나 여래의 금강법장삼매(金剛法藏三昧)의 삼마지를 증득하여 들어가서 모든 보살과 일체 유정 중생으로 하여금 똑같이 이 성품이 깨끗한 진여의 법장삼매의 진제관(眞際觀)을 닦아 지니어 들게 하기를 원하였다. 어떻게 이 관에 닦아 들어야 하느냐 하면, 보살은 마음자리를 관조(觀照)하여 마음을 사용하는 지혜[用心智]를 깨닫고 심성만을 관찰하되 세세하게 깨달음을 관하며, 깨달음으로 마음의 체성을 비추어 성품의 동요함이 없음을 보고 깨달음이 동요하지 않음을 증득하여 이내 항상 잘 작용하며, 그 작용으로 체지(體智)를 관하여 성품의 청정함을 보고 성품이 스스로 생각을 여의되 생각을 여의는 물건도 없어야 하며,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곧 성인의 지혜를 증득하고 여여(如如)와 거룩한 성품의 두 가지가 다 함께 맑고 고요하며, 공(空)하여 체성이 없고 체성이 비고 고요함과 같아지면 이것을 보살이 증득하여 들어가는 진여법계 성인법장(眞如法界性印法藏)의 진제관의 문이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계의 성품은 중생의 심성이요 중생의 심성은 곧 허공의 성품인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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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또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과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머무르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내공이라 함은, 곧 안의 법으로서 이른바 안의 6입(入)인ㆍ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이니, 눈이 공(空)하므로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이 없다는 따위이다.
외공이라 함은, 곧 바로 법으로서 이른바 밖의 6입인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니, 색이 공하므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는 따위이다.
내외공이라 함은, 곧 안팎의 12입이니, 12입 중에는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는 따위이다.
공공이라 함은, 공으로 내공과 외공과 내외공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 세 가지 공을 깨뜨리기 때문에 공공이라 한다.
대공이라 함은, 곧 시방공(十方空)으로서 동쪽이 그지없기 때문에 대(大)라 하고 또한 온갖 처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라고 한다.
제일의공이라 함은, 제일의(第一義)라는 이름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니, 깨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의 실상 또한 공하다. 왜냐 하면 받아들임도 없고 놓아둠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이 실상이어서 존재한다면 받아들여야 하고 놓아두어야 하나 실상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도 않고 놓아두지도 않나니, 만약 받아들이거나 놓아두거나 하면 바로 그것은 거짓이다.
유위공과 무위공이라 함은,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이른바 5음(陰)과 12입과 18계(界) 등이며, 무위의 법은 인연이 없어서 언제나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문]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어서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이겠거니와 이것이 그러해야 한다면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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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므로 깨뜨릴 것도 없고 무너질 것도 없어서 언제나 허공과 같거늘, 어찌하여 공한 것인가.
[답] 만약 유위가 제거되면 무위도 없으며, 유위의 실상이 바로 무위이다. 유위가 공이라면 무위 또한 공이리니, 두 가지의 일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필경공이라 함은, 온갖 법은 모두가 필경에는 공하며 이 필경에는 공인 이것 또한 공하다. 공에는 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허망이거나 진실의 상대조차 없다. 또 필경공이라 함은 온갖 법을 깨뜨려 남음이 없게 하기 때문에 필경공이라 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으면 필경에는 공이라고 하지 못한다.
무시공이라 함은 경 중에서 말한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은 비롯함이 없이 무명과 부(覆)와 욕망[愛]에 얽매어서 가고 오며 나고 죽느니라’”고 하심과 같아서, 비롯함을 찾을 수 없는지라 이 비롯함이 없는 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시공이라 한다.
산공이라 함은 산(散)이란 따로따로 떨어지는 모양으로서 모든 법의 화합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수레와 같아서 바퀴살과 바퀴테와 끌채와 바퀴통의 여러 가지가 합해야 수레가 되는데 만약 떨어지고 흩어져서 저마다 한곳에 있게 되면 수레라는 이름조차 상실되는 것이며, 5음을 여의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공이라 함은 모든 법의 성품은 언제나 공한데 임시로 와서 계속되기 때문에 공하지 않은 것 같은 것이니 마치 물의 성품은 원래 차갑지만 임시로 불 때문에 더워지다가 불이 중지되어 오래 있으면 물은 도로 차게 되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한 “눈이 공이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 왜냐 하면 성품 스스로가 그러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자상공이라 함은 온갖 법에는 두 가지의 모양이 있다.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이 그것이니, 두 모양이 공이기 때문에 상공(相空)이라 한다. 총상이란 ‘무상하다’라고 함과 같은 따위이며, 별상이란 모든 법이 비록 모두가 무상하기는 하나 저마다 따로따로의 모양이 있는 것이어서 마치 땅은 굳은 모양으로 되고 불은 더운 모양으로 된 것과 같다.
제법공이라 함은 온갖 법은 고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고 안도 있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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깥도 있으며 온갖 법은 마음으로 남이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하나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다.
불가득공이라 함은 온갖 법은 열반에 이르기까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
무법공과 유법공의 무법 유법이 공하다 함은 법이 없으면 법이 이미 사라진 것이라 하는데 이 사라짐조차 없으면 법이 이미 사라진 것이라 하는데 이 사라짐조차 없기 때문에 무법공이라 하며, 유법공이라 함은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법이 있다 하나 실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유법공이라 한다.
무법유법공이라 함은 무법과 유법의 모양을 취하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내지 나와 내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공이요, 인연이 화합하여 나기 때문에 공이요,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기 때문에 공이요, 처음과 마지막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며,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그러므로 알라. 온갖 만법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되 모두가 제 체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를 공이라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만약 이 18공문에 머무르려면 반야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곧 일찍이 하나의 법도 나의 영대(靈臺)인 지혜 성품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
이 18공은, 아래로는 유위인 세간의 5음에 이르고 위로는 무위의 첫째가는 이치에까지 이른다. 온갖 법을 거두면 모두가 공하지 아니함이 없다.
만약 반야를 배우지 않고 따로 다른 종(宗)을 숭상한다면, 존재를 체험하면서도 존재의 근원을 통달하지 못하며 공을 궁구하면서도 공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리니, 모름지기 종경(宗鏡)으로 돌아와 안으로 비추어서 밝혀야 그 외에는 하나의 법도 다시는 남는 것이 없으리라.
또 이와 같이 공같기는 하나 그 체성은 공이 아닌 것이니, 참 마음은 걸림이 없어서 만 가지 법을 비추어 나타냄은 마치 허공이 여러 모양이 나타남을 거역하지 않는 것과 같다.
참 마음 안에서는 온갖 것을 능히 나타내고 그 나타내는 온갖 것이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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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의하되 체성이 없고 5온(蘊)이 모두가 공임을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역시 공에 집착하지도 않고 부처 일을 능히 일으킨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시방에 계시는 모든 여래는/모든 법을 남음 없이 요달하셨고/비록 모두 공하고 고요함을 아셨으나/공에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
한 가지 장엄으로 온갖 것을 장엄하고/또한 법에서 분별 내지 않으시며/온갖 성품 없고 살필 바 없으므로/이렇게 모든 중생 깨우쳐 주시느니라”고 했다.
[문] 법신의 본체는 있는 법으로 이루어지는가. 없는 법으로 이루어지는가. 또 동일한 법으로 이루어지는가. 다른 법으로 이루어지는가.
[답] 본각은 마음의 밑둥이요 법신은 성품의 땅이다. 입으로 말하고자 하나 말씨를 잃었고 마음으로 반연하고자 하나 생각이 없어졌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있다고 말하면 미묘한 체성은 비어서 오묘하고, 없다고 말하면 도가 있지 아니함이 없으며, 났다고 말하면 3계(界)에는 만물이 없고, 없어졌다 말하면 한 체성은 항상 신령하며, 동일하다 말하면 저마다 그 형상대로이고, 다르다고 말하면 똑같이 실상으로 돌아간다.
이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것인 줄을 알 것이니, 만약 방편을 열어 의심을 깨우치려 한다면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며 하나가 아니고 다른 것이 아니어서 4구(句)를 벗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일승을 만나리라.
고덕(古德)이 물었다.
“만약 중생과 모든 부처가 동일한 마음과 불성이요 평등하게 법신이 있다면 두 가지 허물이 있으리라. 첫째는 중생 모두가 장차 성불하면 중생 세계는 다할 것이요, 둘째는 모든 보살이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권하면 교화할 바 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다 같이 망령되이 중생 세계를 보기 때문에 망령되이 이런 질문을 한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서 이르기를 “큰 삿된 소견이란 중생 세계가 불어난다고 보거나 중생 세계가 줄어든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대로 하나의 법계임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계에 대하여 늘어나거나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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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든다는 소견을 일으킨다”고 했다.
경의 뜻에서 보아도 일체 중생이 일시에 성불한다 하여 부처 세계는 늘어나지도 아니하고 중생 세계도 줄어들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중생이니, 중생과 법신이란 뜻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르다”라고 했다.
풀이하여 보면 중생계를 견주면 허공계와 같다. 마치 한 마리 새가 허공을 날아가되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백천 년을 지나간다 하여도 끝내 “동쪽은 가까워졌고 서쪽은 멀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허공은 분한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날아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니, 그 공은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속의 도리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리니, 멸도(滅度)가 있다 하여 다 마침이 있게 함도 아니고, 다 마침이 없다 하여 멸도하지 않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중생계는 심히 깊고 광대하다. 이것은 여래의 지혜만으로 아는 경계여서 문득 미치광이 마음으로 한량하거나 짐작하면서 늘어나 줄어듦의 소견을 일으킬 수 는 없다.
이는 또한 허공계가 비록 분한이 없다 하더라도 날짐승의 중생계를 장애하지 아니하고, 비록 다할 수 없다 하더라도 멸도를 방해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다만 늘어나 줄어듦의 소견과 버리고 취하는 뜻만 일으키지 않으면 지혜 날개로 높이 날아도 참 허공은 걸림이 없으리라.
『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 해석하기를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 지혜가 광대하여 허공과 같다’고 함은, 양지(量智)는 포함하면서 두루 미치고 이지(理智)는 분별이 없으면서 증득하여 든다”고 했다.
그러므로 허공은 뭇 형상을 포함하되 뭇 형상은 허공을 포함할 수 없고, 허공은 뭇 형상을 분별하지 아니하되 뭇 형상은 이에 허공을 차별한다. 이를 비유하면 나와 법[我法]은 부처의 지혜를 포용할 수 없되 부처의 지혜는 나와 법을 포용할 수 있고, 나와 법이 있으면 여래를 분별하되 이 여래는 나와 법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의 두루 미침[普遍]의 비유 가운데서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두루 알지 않음이 없으므로 곧 두루 미침의 이치요,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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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루어서 남김 없음이 곧 따라 들어감의 이치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 지혜 광대하여 허공과 같아/일체 중생의 마음에 두루 미친다”고 한 이것은 바로 체성[體]의 두루함이요, “세간의 모든 망상 환히 다 안다”고 한 이것은 앎[知]의 두루함이다. 또 이르기를 “온갖 법을 얻은 분량 마음과 평등하다” 한 이것은 증득[證]에서 본 두루함이요, “지혜 성품[智性] 완전히 색성(色性)에서와 같다” 한 이것은 본체[理]에서 본 두루함이다.
어떻게 두루 들어가느냐[遍入] 하면, 능소(能所)를 무너뜨리지 않고 증득하여 앎이 있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세간의 모든 국토와/온갖 것 모두가 따라 들어가나니/지혜의 몸은 빛깔이 없어서/그가 능히 볼 바가 아닐세”라고 했다. 진여를 따라 이내 들 데 없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그러므로 허공은 국토를 두루 들이되 국토는 허공을 두루 들이지 않으며, 국토가 있는 곳은 반드시 허공이 있되 허공이 있는 데는 혹은 국토가 없기도 하며, 허공은 국토에 평등하게 따라 들되 국토는 허공에 저절로 피차가 있다.
허공은 부처의 지혜에 비유할 수 있다. 국토는 3세에 비유할 수 있다. 3세가 있는 곳에는 부처의 지혜가 반드시 그 안에 있지만 부처의 지혜로 아는 곳에는 3세 혹은 그 자체가 없기도 하다. 부처의 지혜는 3세에 평등하게 따라 들어가되 3세는 부처의 지혜에 자연히 처음과 마지막이 있다.
이것은 둘이 아니면서 둘이라고 보는 설명일 뿐이다. 만약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면 국토와 허공과 3세와 부처의 지혜는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서로 상입(相入)하여 하나를 들면 전부 거두어진다. 두루 미침도 역시 그러하여 세 세간이 원융하면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며, 때문에 부처의 지혜를 부사의라 한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문수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만약 보리수 아래 앉으시면 여래ㆍ세존에게는 두 가지 모양이 있으시니, 첫째는 여래요 둘째는 보리수이오나 여래ㆍ세존께서는 이미 두 가지 모양을 여의셨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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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보리와 중생과 온갖 법성 들은 차별이 없어서 한 맛이요 한 성품이어서 여래가 보리수 아래 앉아서도 이와 같은 법으로 보나니, 이 때문에 보리를 체득했다 하느니라. 나는 도무지 보리를 떠나 그 밖에서는 따로 있는 하나의 법도 보지 아니하며 온갖 법이 모두 다 평등하다 보면서도 이 평등은 어느 수에도 들지 않나니, 이 때문에 평등을 걸림 없음이라 하느니라.’”
또 이 법문의 하나를 들면 법계의 전부가 거두어지는 것이니, 마치 눈을 들어 문을 삼으면 모든 감관과 상호 및 부처의 세계가 모두 한 눈 속에서 나타나지 아님이 없으며, 내지 여섯 감관과 하나의 티끌과 한 개의 털 속에서도 역시 이렇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마치 “비로자나의 몸속에는 세 길과 여섯 갈래 중생들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이는 곧 하나의 몸이 온갖 몸을 포함한 것이요, 또 한 몸이 온갖 몸에 두루한 것이어서 곧 겹쳐 들이고 싸고 두루하여 걸림 없는 것이다.
화엄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어느 한 견고하고 빽빽한 몸이/온갖 티끌의 속에서도 보이며/남도 없고 또한 모양도 없으면서/모든 국토에서 널리 나타나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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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通達無我法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