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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나의 문학
내 나이 벌써 70이 되었다. 지나온 날들이 앞으로 남은 날들보다 훨씬 많다. 요즘은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지만, 평균수명이 40세에 불과했고, 유아사망률도 매우 높았던 1945년 8.15광복의 해에 태어나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의거, 1961년 5.16쿠데타, 1979년 10.26사건과 12.12쿠데타, 1980년 5.18사건 등 현대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나이 70이 되었으니 나도 그리 짧게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은 젊은 시절과 다름없고, 쓸 것은 많이 남아 있는데, 몸은 갈수록 쇠약해지니 안타깝다.
후회 없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다. 내 경우는 어떤가. 후회할 일이 더 많으니 내 인생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래도 다섯 권의 소설집과 열 몇 권의 역사교양서를 남겼으니 그것을 보람으로 여겨 다소나마 자위한다.
나는 1945년 9월 15일(음력 8월 10일)에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에서 태어났다. 8.15광복 한 달 뒤에 태어난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24세, 어머니는 23세였다. 나는 맏이로 태어났지만, 내 위로도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보다 앞서 태어났던 그 둘은 궁벽한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먹을 것이 모자랐던지, 아니면 너무나 허약했던지 모두 몇 해를 못 넘기고 죽어버렸다.
36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수탈과 압제 아래서 헐벗고 굶주리던 산간벽지에서 태어난 탓인지 나도 그 둘과 마찬가지로 일찍 죽을 뻔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앓기 시작해 거의 다 죽은 것으로 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신명의 가호 덕분인지, 아니면 하늘이 이 보잘것없는 내게도 뭔가 시킬 일이 있었던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가냘픈 목숨을 이어나가다가 마침내 소생했다는 것이다.
어머님도 나의 병구완에 극진이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할머님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지극한 정성이 없었다면 나도 몇 년 못 살고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사방 100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쌀과 꿀 등을 동냥하다시피 하여 치성을 올리며 오늘내일 꺼질 듯 꺼질 듯 하는 내 목숨을 살리려고 눈물겨운 병구완을 해주셨다. 그런 그지없는 지극정성 덕분에 나는 마침내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오로지 할머님과 어머님의 은공이다. 할머님은 내가 열 살 되던 1955년에 돌아가셨다.
나의 유년기는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1953년까지로 보면 되겠다.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때 우리 집도 피란을 떠났고, 나도 이따금씩 걷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삼촌들에게 업혀서 경주까지 피란을 갔다. 그때 아버님은 전쟁터에 나가 공산군과 싸우고 있었다. 내가 다시 아버님의 얼굴을 본 것은 휴전이 되던 1953년 원주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내 밑으로는 1949년생으로 피란 가서 첫돌을 맞았던 누이동생 영희(英姬)가 있었다. 그해 1953년에 아버님이 강릉으로 전근을 하여 그곳에서 남동생 원동(源東)이 태어났다. 원동은 군인의 길로 나서서 공군참모차장과 국방정보본부장 등을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나의 유년기는 피란에서 돌아온 원주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소년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춘천에 정착하여 1958년에 봉의국민학교, 1961년에 춘천중학교, 1964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문학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춘천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렘브란트, 고야, 고흐,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미술대회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이나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공무원인 우리 집 형편으로는 그림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내 명성(?)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미술선생님이 미술반에 들어오게 하려고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문예반에 들었다.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프란츠 카프카와의 첫 교감은 5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1962년. 그때 나는 한창 문학적 감성으로 충만한 고교 2년생이었다. 학교수업보다는 걸신들린 듯 동서양의 경전과 고전과 문학, 역사, 철학, 종교서를 닥치는 대로 읽고 생각하며 인생과 세상 보는 법을 배워나가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프란츠 카프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나 혼자만 모순된 세상, 부조리한 시대와 불화하여 살아가는 줄 알았더니 나에 앞서서 카프카와 같은 존재도 있었네! 그렇게 해서 카프카의 작품들은 내게 문학적 영혼의 반려로 자리 잡았다. 내가 소설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결국은 카프카를 마음속의 스승, 영혼의 동류로 여겨 정신적으로 교감하며 문학적 지평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 늦은 저녁에야 K는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
프란츠 카프카의 <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K는 바로 이 성의 성주로부터 초청받아 찾아온 측량기사이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선 뒤부터 초청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며 마을에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사실을 인정해주기는커녕 오히려 K의 신분을 의심하고 거부하며 적대시하는 움직임만 보인다.
K가 아무리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며 존재를 증명해보이려고 노력해도 마을에서는 배척당할 뿐이며 기다리는 성주의 지시도 전혀 없다. 마을의 외곽을 배회하며 K는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그렇다고 해서 성주의 해고도 없이 속절없이 늙어갈 따름이다.
<성>은 <심판>, <변신>과 더불어 고독한 영혼의 방랑자 카프카의 대표작이다. 성의 입구를 찾아 마을을 배회하는 <성>의 주인공 K나, 무죄를 증명하려고 미궁 같은 재판소의 복도를 배회하는 <심판>의 주인공 K는 곧 우주의 미아인 카프카 자신의 모습이요, 정신황폐증에 걸려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성의 변두리를 끝없이 방황하거나 재판소의 복도를 죽을 때까지 배회하는 K의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20세기의 문지방, 암울했던 시대를 살다 간 카프카나,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21세기를 맞은 우리 동시대인이나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우주의 미아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카프카는 이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많은 사물은 반대 가운데로 결연히 뛰어들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타향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
카프카는 그저 '한 마리 까마귀처럼' 현세의 변방을 헤매어 다닌 고독한 나그네였다. 그는 유태인으로 태어났지만 유태인으로 살지 못했고,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독일인도 아니었다. 체코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었지만 체코인도 아니었으며, 노동자상해보험국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일했지만 공무원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쩌다가 이 낯선 별- 지구라는 행성에 잠깐 들렸다가 스쳐 지나간 영원한 우주의 나그네였다. 본래의 목적지까지 도달하지도 못한 채 외곽만 맴돌다 간 고독한 방랑자요 이방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소속 불명의 존재였다.
나는 1964년 봄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때 교수진이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선생님 등이었다. 학교는 미아리고개 넘어에 있었기에 고개 이쪽 돈암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1966년 봄에 졸업을 하고 6월에 육군에 입대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본훈련을 받고 육군부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해 겨울에 11사단사령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다가 공개할 수 없는 부대로 파견되어 제대할 때까지 보냈다. 제대를 몇 달 앞두고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기습사건, 삼척울진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 제대가 연기되어 사상 최장기인 3년 6개월을 복무한 끝에 만기제대를 했다.
만기제대를 하고 나서 처음 취직한 곳이 월간스포츠라는 잡지사였다. 그때 구자운(具滋雲) 시인이 주간으로 있었다. 나는 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시도 있고, 좋아하는 시인도 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현대 시인은 김수영(金洙暎)과 신동엽(申東曄)과 구자운 세 사람 뿐이다.
특히 구자운 시인은 내가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분이기에 더욱 그립다. 돌이켜보니 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42년이 흘렀다. 1926년에 태어나 1972년에 이 별을 떠났으니 불과 47세,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보잘것없는 이 사람도 벌써 70고개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데, 그처럼 아름답고 착한 시심을 더욱 밝게 꽃피워 빛내지 못하고 겨우 마흔 일곱에 죽다니, 참으로 아까운 한 삶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구자운 시인보다 더 티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주인을 만난 적이 드물다. 불과 한 해 남짓한 인연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행운이며 축복이었다. 그는 내게 아버지 같았고 삼촌 같았고 형님 같았다. 그리고 그는 프란츠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내 인생과 문학의 스승이었다.
내가 구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겨울. 그해 9월에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하고 사회초년병이 되어 처음 취직한 곳이 구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월간스포츠라는 잡지사였다. 동대문7가 상가 3층에 있던 월간스포츠에는 구 선생을 우두머리로 하여, 나를 취재기자로 끌어들인 서라벌예대 동기생인 소설가 최범서, 역시 동기생인 소설가 이호일, 시인 정원모, 그리고 나중에 바둑평론가가 된 강홍규, 사진기자 장하일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구자운, 정원모, 강홍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최범서와 장하일만 처자식을 거느리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꾸려나갔을 뿐, 구 선생은 두 아들을 버려둔 채 부인이 달아나버린 홀아비, 나머지는 모두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천하무쌍의 불한당, 파락호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차반 기자단이었다.
따라서 1만원 안팎의 월급은 달마다 외상술값 갚기에도 태부족이었다. 구 선생은 두 아들의 학비를 위해 남는 시간에 러시아 책 번역 일을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날강도 같은 악덕 출판업자가 많아서 며칠 밤을 새고도 형편없는 번역고료를 받았다.
그래도 구 선생은 찾아오는 친구를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반겨 맞았다. 얼른 기억나기에 시인 문덕수와 천상병과 민영과 신동문, 소설가 서기원과 이호철, 평론가 민병산 등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이도 있지만 이들이 찾아오면 구 선생은 3층 사무실에서 1차로 2층 하이웨이다방으로 데리고 내려가 차를 한 잔 대접하고, 그리고 마감시간이 아니면 2차로 상가 뒷골목의 대폿집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후배도 자주 어울렸지만, 구 선생은 찾아오는 벗들은 누구든 마다 않고 반겼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에 은은한, 비밀스러우면서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채우고 또 비웠다.
나는 생전에는 그의 시집을 본 적이 없다. 요즘은 마스터베이션같은 자비출판으로 볼품없는 시집, 소설집을 찍어내는 엉터리 문인이 많지만, 내 가슴 속의 진정한 ‘계관시인’이었던 구자운은 죽을 때까지 시집 한 권 내주는 놈이 없었다! 그의 사후에 나온 유고시집 <벌거숭이 바다>(창작과비평)는 친구 민영이 엮어준 것이다.
1971년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개차반 기자단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나는 춘천으로 내려가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아들이 태어난 해 연말에 최범서로부터 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최범서, 정원모 등과 면목동 구 시인의 셋방으로 문상을 갔다. 그의 셋방 한구석에서 나는 그 지난해에 내가 빌려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발견했다. 아하! 구 선생! 그 동안 무슨 꿈을 꾸고 어떻게 풀이하며 마지막 날들을 보내셨소? 물어보나 마나 죄다 악몽이었겠지만.
그런데, 시인 구자운, 인간 구자운이 비참한 말년을 보낼 때 그의 살림살이를 돌봐주던 여인을 꿰차고 달아난 철면피, 파렴치, 몰염치, 패륜막덕한 쓰레기 인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도덕한 이중인격자, 위선자가 지금도 원로시인이니 뭐니 하면서 행세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가소롭기 그지없다.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2년의 일이다. 그 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시나리오라는 것을 그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딱 한 편밖에 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시나리오 작가 행세를 하겠는가. 나는 지금도 시나리오를 쓸 줄 모른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때에는 팔자에도 없는(?) 시나리오는 쓰게 되었던가. 해마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내가 가고자 한 길은 오래 전부터 소설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좀 더 부지런했다면 1960년대, 아니면 1970년대 초까지는 등단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신춘문예에 처음 도전한 것은 1966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 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낙방한 뒤에 신춘문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신춘문예,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 헤밍웨이나 카뮈가 응모해도 떨어지겠구나!
그러던 1970년대 중반이었다. 어느 해 새해 첫날 동아일보를 보니 아는 녀석이 소설에 당선된 게 아닌가! 자극을 받은 나는 다시 신춘문예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해마다 불유쾌하기 그지없게도 예심은 통과했으나 최종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1977년에는 최종심에서 낙선한 소설들만 모아 엮은 신춘문예낙선소설집이 나오기도 했다. 유재용, 신석상, 오찬식 선배 소설가들과 가깝게 지낸 것도 그 무렵부터였는데 이제는 모두 나보다 앞서 갔으니 안타깝다.
작품을 동아일보사에 보내던 1981년 12월은 매우 추웠다. 날씨보다도 안으로는 정신이 추웠고, 생계가 목을 졸랐고, 밖으로는 전두환, 노태우 군사깡패들이 정권을 탈취하느라고 온 세상이 살벌하게 추웠다. 난 그 전해까지만 해도 편하게 지내던 국영기업체에서 하루아침에 괘씸죄에 걸려 숙청을 당해 쫓겨난 신세였다. 사보에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찬양하라는 지시를 깔아뭉갠 업보(?)였다.
그래서 생활비가 떨어져 쌀도 됫박으로 사먹을 때였다. 부모님 봉양은 물론 어린 자식 둘은 이러다가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낼 정도로 절박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극한상황이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지난해에 최종심에서 낙방한 중편소설을 시나리오로 개작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단 일 주일 만에. 물론 내가 어디 시나리오를 쓸 줄 아는가? 헌책방에 가서 시나리오선집을 사서 그 형식대로 개작을 했다. 내 일생 유일무이하게 쓴 그 시나리오가 운 좋게도 당선이 되었고, 그 이듬해 1983년에는 신동아 복간기념 논픽션에 입선되었고, 또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으려는지 한국일보사 기자로도 자리 잡아 가까스로 기사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1977년 장성탄광 갱내 화재사고를 소재로 한 <연옥을 넘어서>였다. 이 작품을 나는 다시 중편소설로 개작하여 1991년에 펴낸 소설집 <비인간시대>에 실었다. 또 그 이듬해 1983년 신동아 복간기념 논픽션 공모에 입선한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강제징용 당했다가 도망쳐 3년 동안이나 일본열도를 떠돌다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나의 작은아버지의 실화를 엮은 것인데, 이 작품도 나중에 장편소설 <머나먼 귀로>로 개작을 했다.
나는 1991년 중편소설집 <비인간시대>, 2007년 역사인물소설집 <나를 여왕이라 부르라>, 2010년 장
편역사소설 <연수영-불멸의 전설>, 2012년 장편역사소설 <불패-이순신의 전쟁>, 2013년 등단 30주
년 기념 소설집 <황혼의 분기점> 등 다섯 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또 1988년 <역사인물기행>, 1990년 <경제사의 현장>, 1994년 <역사인물 유적순례>, 1998년 <민족사의 고향을 찾아서>, 2000년 <인물로 읽는 한국 풍류사>와 <고승과 명찰>, 2002년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2004년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2005년 <부활하는 이순신>, 2007년 <한국사 제왕열전>, 2010년 <인물로 읽는 삼국유사>, 2011년 <전쟁으로 읽는 한국사>, 2013년 <21세기 손자병법> 등 13권의 역사교양서를 펴냈다. 이 모두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공부의 결실이었다.
이것이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살아온 나의 발자취이다. 이 말세 같은 엽기적 난세에 나는 성(城)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자 쉴 새 없이 성의 입구를 찾아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K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적어도 나는 취미로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 자체만을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젊은
시절에 벌어놓은 것이 없어서 생계를 위해, 온갖 신병에 시달리며 목숨을 걸고 소설을 쓴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 욕먹지 않는 좋은 작품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평가는 오로지,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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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