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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3의 눈...금단의 비밀(태을금화종지) 4/4
원신은 상대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 하늘과 땅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원신을 품는 방법을 깨달으면 음과 양의 대극( polar opposites )을
벗어나서 삼계(三界)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천상 세계, 지상 세계, 그리고 지옥 세계, 이 삼계가 모두 대극을 초월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사라진다. 바로 몇 분 전에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삼계라고 말했다. 과거란 지옥이다.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령같다. 유령처럼 그대를 따라다닌다. 현재는 지상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실, 사실성이다. 그리고 미래는 천상이다. 희망과 욕망과 야망과 포부들, 이것들이 삼계이며 그대는 삼계 속에서 끊임없이 떠돌아야 한다. 그대는 왔다갔다 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뛰어들고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닫는다. 그것이 계속된다.
그리고 현재는 너무 순간적이라서 알아차리지 조차도 못한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으며 양 벽은 광대하다. 그리고 현재는 찰라, 원자적 순간으로서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그대가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머무는 것이 시간을 초월하는 문이 되는 이유이다. 과거로부터는 불가능하다. 과거는 광대하고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더듬을 수 있지만 그 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심리 분석이 도움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과거로 가면서 과거를 풀어 헤치고 과거를 헤집는다. 그대는 계속할 수 있다. 심리분석은 수년간 계속된다.
그래도 역시 끝이 나지 않는다. 이제 그 심리분석가에게 싫증이 나 다른 분석가를 찾아가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조만간 심리분석가들은 금생(今生)이 과거의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그대는 계속해서 거꾸로 올라갈 수 있으며 자노프(janov)가 원초 울음(primal scream)이라고 부른 것에까지 이를 수가 있다.
원초 울음은 심리 분석의 종극이다. 첫 울음과 함께 아기는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 아기는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울음, 그러나 일단 그대가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 또한 시작이 아니다. 이제 그대는 자궁 속으로 움직여야 한다. 동양에서는 이런 방법이 이미 시도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먼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라티 프라사브(prati prasav)라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마하비라(Mahavir)도 그것을 했고 붓다도 그랬다. 그들은 자궁을 넘어섰다. 그러나 또 다시 그대는 죽음도 통과해야 한다. 자궁에 들어 오기 전에 죽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삶이 한층씩 한층씩 벗겨진다. 동양이 윤회 현상을 알게된 것은 깊은 심리분석을 통해서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보지 않았다. 그들은 한 번도 심리분석을 시도해보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그것을 시도해 본 유태인이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도들과 유태인들,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던 그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반대하였다. 사실인즉슨 심리분석이 깊어져 조만간 흰두교의 윤회설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대가 계속해서 자신을 파고들어 가면 그대는 층과 층이 겹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끝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인간의 삶을 수천 번이나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꿰뚫고자 시도도 했다. 그러나 역시 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이 삶 이전에는 그대가 사람이 아니었음을, 코끼리나 호랑이나 개였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서는 동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수백만 삶을 통과하면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자신이 풀이나 나무였음을, 그리고 바위였음을 보게 된다.
인도에서는 그대가 수백만의 삶을 통과했다고 말한다.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 과거의 분석으로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미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곳에도 도달하게 하지는 않는다. 미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멈춘단 말인가? 얼마나 가야 충분한 것이 될까? 이제 더 이상 앞을 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동양에서는 그것 역시 시도해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의 개념에 관해 엄청나게 공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끝이 없다. 기억도 끝이 없고 상상도 끝이 없다. 그 양자의 사이에 매우 얇은, 그리하여 완전히 깨어있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며 획하니 스쳐가 버린다. 그러나 현재를 알아차리게 되었을 경우, 영생의 문이 열린다. 마음이 무심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개성이 개성을 초월하여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그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잘 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있었고 다른 사람은 오른쪽에 있었다. 그대는 이 상징이 말하는 무한한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겠지만 예수는 바로 현재 순간을 의미한다.
한 도둑은 과거를 의미하고 다른 도둑은 미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에 근접해 있는, 본질예 가장 가까운 현재 순간을 의미한다. 한 도둑이 예수를 비웃었다.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대를 비웃는다. 그는 예수를 힐책하였다.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대를 힐책한다. 다른 도둑은 미래에 관하여 물었다. 죽은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천국에서 당신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미래다. 그리고 예수는 그 두 도둑 사이에 끼어 있다.
그리고 왜 그들을 도둑이라고 부르는가? 계속해서 그대의 현재를 훔치기 때문에 과거도 도둑이요, 미래도 도둑이다. 놈들은 도둑이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우화이다. 나는 어떤 예수교인 친구가 나에게 동의할지 안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누가 나에게 찬성하고 안하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수는 현재 지금 여기, 본성에의 밀착, 죽어 몸과 마음으로부터 사라져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음 따위를 의미한다. 그는 약간 망설였다.
누구나가 망설인다. 그대가 현재와 조우하게 되면 그대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영원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수평적이다. 영원은 수직적이다. 또다시 나에게는 십자가가 이 두선의 교차를 상징한다. 십자가는 두 개의 선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이다. 이것은 시간과 영원의 표시이다. 영원, 지금 여기에 있음, 무, 또는 만유(萬有)와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가 망설인다. 그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물방울처럼 그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바다는 그렇게 광대해서 다시는 그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바다에 떨어지는 이슬방울조차도 풀잎에서 망설인다.
예수는 망설였다. 망설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의 망설임은 그도 인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망설임은 그도 우리의 범주에 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의 자식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울부짖었다. "나를 잊어 버리셨습니까? 나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를 버렸나요? 나를 떠난 겁니까? 나는 없어져가고 있는데 당신의 구원의 손길은 안보이니 말입니다."
이슬 방울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깊은 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죽게 되면 당신이 거기 기다리고 있다가 껴안아 품에 안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리라고 바라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나를 저버렸습니까? 나를 차버렸나요? 당신을 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보이는 하나님이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이란 절대 무에 대한 긍정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유태인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마음 속에 혼란과 두려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압바( Abba)라고 부르곤 했다. 그는 아버지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듯이 보였다. 세상은 끝나가고 그 너머란 입을 쩍 벌린 무, 끝없는 심연일 뿐이었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이다. 예수의 생애는 매우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이다. 그의 인간성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요점을 보았다. 그는 영원, 무 속을 깊이 들여다 보았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얼굴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가질 수 없다. 이 무가 나를 껴안아 그의 깊은 가슴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본 요점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에게 말했다. "천국에 임하소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대로 당신은 무이십니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무조차도 믿습니다. " 모든 기독교도와 모든 이슬람교도와 모든 힌두교도와 모든 유대교도와 하나님의 성격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이것을 직면해야 할 것이며, 이 근심의 시기와 고뇌를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무(無)나 거기에 상응하는 다른 말로 부르는 불교와 도교의 아름다움이다. 무라는 개념으로 살아온 사람은 그 시작부터가 망설임이 없다. 그는 그냥 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원신은 상대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 하늘과 땅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원신을 품는 방법을 깨달으면 음과 양의 대극을 벗어나서 삼계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래 면목( original face )을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의 무를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명상을 하면서 그대의 내면의 무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나면 그대는 존재 그 자체의 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태(胎)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되면 원신은 방촌(方寸) 속에 거한다.
이것은 도교의 도해이다. 혼동하지 말라. 인간 의식에 대한 도해 (map)는 많다. 다른 도해들은 다른 상징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도가 (Taoist)들의 도해이다. 도가들은 어린애가 자궁으로부터 태어나면 원신은 제3의 눈속에 거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제3의 눈은 양 눈 사이, 정확히 둘 사이, 정 중앙에 위치한다. 요가의 도해에 의하면 그곳은 아즈나 차크라( Ajna Chakra), 즉 영안(靈眼)의 자리이다. 그곳이 바로 도가들이 원신이 거한다고 말하는 곳이다.
원신은 방촌 속에 거한다. 그러나 식신(識神)은 아래 심장 속에 거한다.
심장은 외계( outside world )에 의존한다. 사람이 하루만 쉬어도 그것은
극도로 불편해 한다. 어떤 소리를 들어 놀라게 되면 심장은 두근거린다.
격노하게 되면 그것은 박동을 멈춘다. 주검을 보면 슬퍼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에 홀려 버린다.
그러나 하늘의 심장은 머리속에 있다. 언제 그것은 움직인 적이라도
있었을까? 하늘의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방촌 속에 있는 진의(眞意)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겠느냐라고.
육체의 심장은 끊임없이 외계에 의존한다. 그것은 외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대 내면에 있는 외계의 일부이다. 이것은 진정한 심장이 아니다. 도가들은 참 심장이 제3의 눈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다. 육체의 심장은 언제나 혼란 속에·있다. 그러나 제3의 눈에 있는 영적인 심장은 언제나 질서 속에 있다. 그것은 질서 그 자체이다.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아즈나 차크라, 즉 질서와 훈계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그것이 제3의 눈으로부터 오는 것이면 그것은 즉시 받아들여진다. 온 몸이 그것을 따르고 전존재가 그것을 따른다. 그곳은 명령이 발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잠이 든다. 그대는 육체적 심장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대는 아직 영적인 심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마음( lower heart )은 강한 힘을 지닌 폭군과도 같은 행동으로
천상의 지배자를 약한 것으로 보고 멸시하며·
그러나 육체의 심장은 영적인 심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는 단지 움직이는 사물들만 알 뿐이다. 만약 어떤 것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게 되면 그대는 그것을 잊어 버리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아래 심장은 하늘의 심장, 영적인 심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약한것, 거의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주 강한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의 주도권을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아래 심장이 그대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원래의 왕궁이( primal castle ) 강성해져 방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강하고 지혜로운 왕이 왕위( throne )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더욱 의식적이 될 때 그대는 제3의 눈이 있는 영역이 강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게 될 때마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제3의 눈으로부터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만 깨어나도 그대는 제3의 눈 부위가 약간 조여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마다 그 조이는 느낌은 더해간다. 제3의 눈에는 무언가가 팔딱거리고 무언가가 고동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각성으로 일단 제3의 눈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일단 제3의 눈에 각성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작용하기 시작하고 살아나기 시작한다.
힌두교도들이 그것을 차크라라고'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차크라( Chakra)란 바퀴를 의미한다. 바퀴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일단 에너지가 들어오면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곧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대의 존재에는 커다란 혁명이 일어난다. 즉시 아래 심장이 윗심장에게 복종을 한다. 윗것이 오면 아랫것은 굴복을 한다. 그것은 윗것이 없을 때만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참 종교와 사이비 종교의 차이이다.
사이비 종교는 말한다. 노력해서 자신을 컨트롤하라.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 그대의 감각을 통제하라. 그대의 몸을 길들여라. 그러나 참종교는 말한다. 그냥 제3의 눈 속으로 들어가 영적인 심장이 작동하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컨트롤될 것이고 모든 것이 길들여질 것이다. 주인이 당도하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들이 즉시 정리가 될 것이다.
양 눈은 마치 좌와 우에서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지배자를 보좌하는
신하와도 같이 빛을 순환시키기 시작한다. 안에서의 다스림이
이와 같이 질서를 이룰 때 반역적이던 모든 간웅(奸雄)들이 그들의
무기를 고쳐잡고 명령을 받기 위해 부복할 것이다.
그냥 주인만 등장하게 하라. 거기에는 질서를 만들기 위한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가 없다. 성질을 길들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성질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냥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보다 의식적이 되는데 쏟아 넣기만 하라. 그림자가 그대를 따르듯 성질이 의식을 따른다. 만약 성질을 길들이려고 하면 그 성질은 가짜와 허위가 될 것이고 그대는 위선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불사의 선약( elixir of life )을 얻는 길(丹道)은 정수(精水)와 신화(神
火)와 의토(意土)로 되어 있는 위 없는 마술( supreme magic )임을 알라.
이것이 지고의 마술이다. 왜 그것을 마술이라고 부르는가? 일단 윗 심장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마치 마술이 일어난 것과도 같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감각들은 결코 질서를 이루지 못했었다. 마음은 항상 혼란되어 있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살까 죽을까, 그대는 언제나 망설였었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선택할까, 항상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누가 요술을 부리기라도 한 듯 모든 혼란이 사라지고 맑아지고 삶이 투명해진다. 그대는 단순히 해야 할 일들을 할 뿐이다. 사실 일단 하늘의 심장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옳다. 그대는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사의 선약을 얻는 길은‥‥‥ 위 없는 마술임을 알라.
그리고 이 지고의 마술은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수(精水 : seed-water), 신화(神火 : spirit-fire), 그리고 의토(意土 : ought-earth), 이것들은 도교의 상징들이다. 이 세 가지, 정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하나의 에너지, 즉 에로스(eros )이다. 신화는 즉 로고스(logos)이며 의토는 직관(intuition)이다.
그대는 이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수(精水 : seed-water)는 정(精 : eros )으로서 그대가 성에너지(sexual energy), 즉 열정의 에너지로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 있어서 그것은 문제거리만을 만들 뿐이다. 성에너지는 그대의 친구인 것처럼 가장을 하지만 알고 보면 적일 뿐이다. 그것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대는 더 큰 불행에 빠진다. 사랑에 눈이 먼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in)이 나에게 말했다. "사랑은 장님이 하는 것이며 결혼은 개안(開眼)입니다." 아직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사랑은 장님이며,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는 에너지가 그대에게는 커다란 비극이 되고 있다. 정(eros)은 그대의 에너지다.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그대의 정, 즉 성에너지 속에서 구하고 찾은 것은 옳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에너지의 일상적인 상태가 자연스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틀렸다.
그것은 전도(顚倒)된 상태이다. 자연스런 상태에서 성에너지는 점점 위로 상승하며 그대를 밑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위로 이끌어 준다. 이러한 자연스런 상태에서 성에너지는 그대 속의 황금꽃이 된다. 그러나 소위 전도된 상태에서 그것은 그대를 새로운 감옥으로 이끌어갈 뿐이다. 밖으로, 아래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고갈시키며 점점 죽음 가까이로 몰고 갈 뿐이다. 그 똑같은 에너지가 만약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새롭고 풍요한 삶을 창출한다. 그것은 불사약이 된다.
진흙이 연꽃의 씨앗을 품고 있어 진흙이 연꽃이 될 수 있듯이, 그대의 성에너지도 황금꽃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위로 상승해야지 그대가 그것을 상승시킬 수는 없다. 그것을 억지로 상승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 도착자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할 수가 있다. 일단 그대의 제3의 눈, 그대의 영적 심장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에너지는 스스로의 조화로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대는 제3의 눈을 창조했고 에너지는 마치 자석으로 향하듯 그것에 붙게 된 것이다.
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자석을 바깥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대의 에너지가 밖으로 움직인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게 되면 에너지가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여자가 자석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제3의 눈이 작동하게 되면 그대는 강력한 자석을 갖게 되어 아무도 그대를 밖으로 끌어낼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 존재하는 것 보다도 더 큰 자석을 내부에 소유하는 것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에너지는 위로 그리고 안으로 움직인다.
그대가 밖으로 움직인다면 그대는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안으로 움직인다면 비양극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무극 (non-polar)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메타심리학(metapsychology), 또는 붓다의 심리학 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반이다. 이것은 순수 종교, 예식의 종교가 아닌 순수 종교이다. 기독교나 힌두교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단지 그대의 에너지의 근원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신화(神火 : spirit-fire )이다. 그것은 빛이요, 로고스다. 그것은 의식적인 마음이다. 상승하는 정( eros )은 의식과 무의식의 마음 너머로 그대를 이끌어 준다. 로고스는 의식적인 마음이다. 그것은 심리학이요, 과학이다.
의토(意土.thought-earth )는 어둠이요, 무의식이요, 직관이다. 그것은 초심리학(parapsychology)이요, 예술이다. 의토는 직관이요, 어둠이다. 여성들은 의토 속에서, 직관적인 시각 속에서 산다. 여성들은 무의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은 신화 속에서, 논리적이고 의식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 예술가는 여성이요, 과학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정(精)은 하나의 에너지로서 비양극적이다. 그것은 그대를 예술과 과학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의식과 무의식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남성과 여성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비양극성, 초월에까지 이르게 해 준다. 그러나 마술의 비밀은 그대의 하늘의 심장이 작동되게 하는데 있다. 그것은 그대의 양눈 사이에 있다. 나중에 계속해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법, 그 방법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