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시절
나는 1945년 해방되던 해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세대를 흔히들 해방둥이라고부릅니다. 아버지께서 일본 징용 갔다 해방되던 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와 맡누나. 형 나 이렇게 2남 1녀가 밭 400평 논 400평(전 일본 소유 국가 재산임) 을 소작하면서 메마른 산골 마을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던 중. 내 나이 6세 때 6.25가 일어나서 우리는 논에 벼를 심어놓고 남은 곡식은 땅속에 묻어놓고 피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갈 곡식. 옷가지. 간장. 생활필수품등을 갖고 갈만한 것은 남자들은 등에 지고 우리 어머니는 등에 지고 머리에까지 이고 어린 나을 손을 잡고 수많은 피난민 속에서 어머니 “애야 엄마 손 꼭 잡으라 만약에 손 놓치면 너는 이 어미를 영영 못만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피난길은 돌밭이고 재를 넘어서 수많은 피난민 속에 6살 난 나는 신발도 없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버선 신발을 신고 가니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엄마 나 한 번만 엄마 등에 업혀 가면 안 되나 하니까 아버지가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두들겨 막고 걸어, 또 걸어가다 보니 내 친구들 같은 아이들이 울면서 가족을 부르는 것 보면서 엄마는 애야 너도 엄마의 손을 놓으면 저 아이처럼 된다는 말씀에 나는 더욱더 엄마 치맛자락을 힘차게 잡았습니다.
발은 내 발이 아니고 우리 가족들도 죽을힘을 다하여 길을 가다가 해가 지면은 길거리에서 자고 먹은 것은 하루 한 끼 식사도 못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피난길은 밤낮 걸어 며칠 만에 팔공산 밑 공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끝이 없는 피난 생활 잠자리는 하늘에 별을 보고 자고 밥은 하루에 많이 먹으면 2끼 정도 그래도 가지고 간 양식을 절약하려고 어머니는 멀리 비행기 소리와 간혹 포 소리가 들리는 데도 들에 나물을 구하여 죽을 끓여 먹으면 금방 배가 꺼져 배가고 차지고 몸서리 나는 피난 생활이 계속되던 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우리는 다시 고향길을 올 수 있었습니다.
막상 고향에 돌아오니 우리 집은 온데간데없고 타다 남은 재들만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임시 거처할 음악을 만들어서 비나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머물 거처를 만들었습니다. 움막도 내 집이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피난 갔다 온 그해는 논에 거름도 안 주고 풀도 매지 않았는데도 벼가 그렇게 잘 될 수가 없었습니다. 누렇게 고개 숙인 벼 나락 알도 많이 차서 벼농사는 대풍이었습니다. 논에 벼를 수확하니까 논 가운데 포탄과 포탄 자국이 여러 군데 있으며 간혹 총알 포탄 등이 보였습니다.
세월이흘러 아버지가 우리 누나를 시집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나는 내 나이보다는 12살이 많은 나하고는 띠동갑입니다.
어머니는 어린것이 시집을 가면 고생하게 된다고 걱정을하시는데 아버지는 우리는 집이 가난하여 한 사람이라도 입을 줄어야 한다면서 누나를 시집보내기로 했다.
나의 자형되는 사람은 형님 밑에서 대장간 일하면 결혼하면 살림이 난다고 하여 누나와 결혼하고 장천 장터에서 대장간을 구입하여 신혼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내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형이 잘못해도 매는 내가 맞고 동생이 잘못하여도 매는 내가 맞아 나는 우리 집안에 매 맞는 대표가 되었습니다. 형은 맏이라고 안 때리고 동생은 막내라고 안 때리고 오직 나만은 아버지 화풀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무척 분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일본 징용에서 얻은 병이 재발해 자리에 눕더니 내 나이 9살 때 저세상으로 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나중 커서 아버지 돌아가신 사연을 알고 일본에 증오가 일어났습니다. 국가가 국력이 없으면 국민도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