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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고 친구 같은 제자들
최순돈 교수
1. 임용초기 (1976년 ~ 1979년)
서울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후 1976년 3월 영남대학교 금속공학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영남대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그 당시 “한강 이남의 최고 사학”이기 때문. 그때 나의 만나이는 27살이었고 나보다 먼저 과에 오신 교수님은 예길촌 교수님뿐. 금속공학과는 1974년 3월에 설립되었고 예 교수님은 1974년 8월에 대우전임강사를 거쳐 1975년 3월에 전임강사로 임용받았으며, 마찬가지로 나도 1976년 3월에 대우전임강사 발령을 받고 1년 후 전임강사가 되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는 석사학위만으로도 교수임용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임용 후 2~3년 지났을 때 우연히 포항의 모 대학 총장님과 식사 중에 교수님께서 대학교 교수임용의 초기 역사를 이야기하셨다. 해방 후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강의할 교수가 부족하여 어떤 대학에서는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학부 3학년 학생을 교수로 임용하였다고 한다. 강의교재로 공학분야에서는 한글로 쓰여진 전공 교과서가 거의 없어 영어교재를 많이 수업에 사용했지만, 상당수 교수님들은 영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하길래 일본 교과서로 전공 공부를 했다고 한다.
영남대학교로 임용되어 와보니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그들과 자주 같이 어울려 지내곤 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경주에 학생들과 놀러 갔을 때이다. 학생 중 김원욱군(1974년 입학, 금속공학과 1회)은 나에게 경주에 자기 집이 아주 넓으니 학생들과 같이 놀러 오시라고 했다. 어느 주말에 재학생 10여 명과 버스를 타고 경주터미널에 도착하니 그와 만날 약속을 한 시간이 2시간이나 남아있었다. 터미널 대기실에 전부 멍하니 앉아 있길래, 그 당시 총각이었던 나는 경주에 와 본지 7년이나 되어 혼자 조용히 가까운 경주 시내를 구경하고자 농담으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 꼬시러 1시간만 밖에 나갔다 오자”
제자 3명이 흔쾌히 따라나섰고, 밖에 나와 같이 걸어가는데 어떤 아가씨들이 앞에 오니 말을 걸지 못하고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만 하였다.
“야! 서로 헤어져 각자 꼬시고 한 시간 후에 터미널 대기실에서 보자.”
그렇게 헤어져 혼자 1시간 동안 경주 시내를 구경하고 오니 제자 3명 모두 파트너를 데리고 왔고 나만 홀로 왔다.
“에이! 교수님 왜 혼자 오셨어요? 아가씨와 같이 안 오고..”
“미안 미안”
‘어?? 이것이 뭐지???’ 속으로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원욱군 집에서 식사하고 나니 아까 같이 나간 녀석 세명이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던 학생들 말로는 함께 온 아가씨들과 같이 나갔다고 한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제자들 모두를 데리고 경주 시내 구경 겸 3명의 학생을 찾으러 갔다. 그 당시 대부분 도시들이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경주는 통행금지가 없어 학생들과 밤새도록 경주의 밤 문화를 구경하였지만 3명의 학생을 찾지 못하고 김원욱군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 학생 걱정에 잠이 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니 3명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야단칠 수도 없고... “야! 나가면 나간다고 이야기 해줘야지?”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다음날 모두 경주 구석구석을 다니며 재미나게 놀고 왔다.
그 이후로 경주에 자주 놀러 가게 되었고 그러던 중 경주 문무대왕면에 부모가 거주하는 원종락군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원종락군의 집에 자주 놀러가 자고 대종천에서 고기도 잡았다. 나중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그 마을에 다시 갔더니 학생의 부모는 이사 가고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이사 간 경주 시내의 부모 집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1970년 중후반 당시 교수용 퇴근버스는 대구시의 중앙통을 지나게 되어 많은 교수님들과 중심가에 내려 같이 술을 먹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중 어느 주말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봉덕동에 살고 있던 나의 집 문을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가보니 제자들 여러 명이 있었고, 나를 보고 술을 사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없어서인지 스승과 학생 사이가 아닌 친구같이 재미나게 어울려 놀았다.
그럼에도 나는 학점은 엄격하게 주었다. 1974년 이후 금속공학과의 정원이 30명일 때 학점이 워낙 박해서 그런지 내가 가르친 열역학 과목의 수강학생은 88명이나 되었다. 그 후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88명 중 F학점을 받은 학생은 무려 66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1978년 2월 기준 금속공학과 졸업생 수는 6명에 불과했다. 물론 상당수 학생들이 군에 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후 내가 미국 유학 갔다 온 후에는 내 성격이 훨씬 부드러워져 학점을 학교에서 규정한 범위 내에서 호의적으로 주었다.
2. 유학 후 교수생활 (1985년 ~ 2014년)
1978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된 후 1983년 1월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2월에 복직하였다. 그때 갑자기 고려대 금속공학과 교수님 세 분이 내 사무실에 오셔서 고려대학교 교수로 오기를 제안하셨다. 그러나 그동안 영남대학교와 나의 제자들과 맺은 깊은 인연으로 거절하였다.
영남대 금속공학과(현 신소재공학부)에 다시 근무하면서 학부 및 대학원 학생들 지도를 하는데 나의 연구분야가 기초분야라서 학생 취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열역학 분야의 강의와 연구는 나 홀로 하고 학부학생 및 대학원생들의 지도와 취업을 위해 표면처리 분야를 추가하였다. 개설된 표면처리 분야의 강의토론방에서 수강학생들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였고 아울러 나의 이메일도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학생 개개인의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였다. 성적도 잘 주었다. 또한 학생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졸업 후 취업이므로 학생 지도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아닌 중간 이하인 학생의 지도에 집중하였으며 특히 3-4학년 학생들의 지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 결과 취업한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 당시 학생들의 현장 실습 및 공장견학이 있었는데 그 이유로 공장이 많이 소재한 창원에 자주 가게 되었다. 졸업생 중 강봉훈 사장은 창원에서 방위산업 관련 제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제품관리가 아주 까다로웠지만 일반 제품보다 단가가 커 이익이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공장 견학 후 강사장은 나와 저녁을 같이 하면서 학생 취업을 위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제자들 특히 대학원생들과는 지금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내 연구실을 위해 헌신적으로 연구개발과 제자 지도를 함께 해온 민봉기 박사(89학번)와 이희록(1983학번) 덕분이다. 모두 내가 거주하는 인근에 근무하고 있다. 이희록 사장은 졸업 후 대한중석 (현 대구텍)에 근무를 하고 나서 경산에서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민봉기 박사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석사와 박사과정을 내 연구실에서 거쳤다. 민 박사는 그때 석사과정을 끝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학과에서 대학원생 중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생은 2명뿐이었는데 모두 상당한 기간 (5년)동안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나는 그가 박사과정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본인의 끊임없는 요구에 박사과정 학생으로 받았다. 초기 그의 석사과정에서는 나의 지도를 많이 받았지만 박사과정에서는 열심히 공부하여 자기 논문을 상당 부분 스스로 작성했음은 물론 내가 지도하는 석사과정의 학생들을 나 대신 훌륭히 토론을 거치면서 지도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졸업 후 취업한 후에도 연구실에서 재학중인 대학원생들과 취업한 그들간의 긴밀한 교류를 주선하였다. 나 또한 제자들의 지도와 취업에 많은 관심을 두었고 국가기관에 연구비 신청 및 수행, 학생들의 취업 및 산업체 자문 등에 민 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민봉기의 박사학위 논문이 상당히 진행되었을 때 취업을 염두에 둔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 화학분석 방법을 익히게 하였고 그 결과 공동기기센터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공동기기센터의 분석 환경이 워낙 열악하여 교수들이나 직원들이 센터를 방문하여 직접 분석 방법을 익혀 분석을 하기도 하였다. 1년 후 그가 상당한 분석 능력을 갖추었을 때 센터의 직원 공채에 합격이 되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이와같이 산업체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연구개발을 하던 중, 2003년에 영남대학교가 산학협력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고 나도 산학연 사업 유공자로 선정되었다. 덧붙여 세계 인명 사전 마르퀴스 후즈 후에 3번 선정되었고 인더월드 2회 연속 등재된 것도 되돌아 생각해 보면 모두 그를 비롯한 훌륭한 제자들 덕분이다.
그 당시 재학 중인 대학원생과 나는 서로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두 번은 꼭 국내 여행을 갔다. 가장 많이 다녀왔던 코스는 영주 ⇒ 동해안 ⇒ 포항 ⇒ 대구였다. 2003년에 학교 인근 단독주택으로 이사 왔을 때는 나의 제자들을 모두 우리 집으로 불러 마당에서 가창 모 식당에서 요리한 산돼지를 같이 먹으며 하루를 같이 재미나게 보냈다.
은퇴 11년 전쯤 학교생활에만 몰두해온 나는 문득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음을 깨달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하였다.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준비 해야할 것은 주로 취미생활, 파트타임 업체 선정, 같이 즐길 사람들의 모임 구성 등이었다. 그중 일주일에 2~3일 힘들이지 않고 근무할 수 있는 산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우선적으로 표면처리업체와 대구경북지역에 있는 산업체 중 제자들 혹은 영남대 동문들이 운영하는 업체를 골라 자문비 없이 자문을 하였다. 자문 내용은 불량품의 분석, 공정개선, 관련 기술의 세계적인 동향 분석 등이었다. 그 결과 산업체를 많이 알게 되었고 회사가 당면한 문제를 풀면서 오히려 내가 더욱 현장의 기술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특히 현장에 근무하는 졸업생에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이유는 교과서에 있는 이론과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는 기술과는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필요한 기술부분에 대해서는 국가기관에 같이 R/D 신청을 하여 회사와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소문이 퍼지자 심지어 경기도의 업체에서도 자문 의뢰가 왔다. 그러던 중 LGI (구 LG micron)에서 기술 자문을 의뢰해 왔고 3개월간 자문을 하고 나니 그 회사의 부사장님이 내 사무실에 와서 활동비를 지급할테니 불량품이 발생하는 표면처리 공정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 6개월 동안 그 회사는 물론 관련 하청업체까지 생산공정을 점검하면서 자문한 결과 불량률을 크게 개선하였다. 그러자 부사장님이 다시 오더니 “우리 회사의 사외이사로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부탁하였다. 그때는 사외이사가 무언지 모른 상태에서 승낙을 하였고 그 후 5년간 사외이사직를 겸직하였다.
이와 같이 제자회사는 물론 전국 규모의 대기업과 중견기업에서 자문을 의뢰해 왔고 그 결과 나도 많은 현장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런 자문을 하면서 학교에서 여러 보직을 맡았을 때 영남대 최고 경영자과정(2015년)을 거쳤고 그 결과 영남대 동문이 되었고, 현재 영남대 동창회 상임이사로 활동 중에 있다.
3. 은퇴 후의 생활 (2015년 ~ 현재)
제자들과 더욱 친하게 지내면서 은퇴 후 생활을 미리 준비한 결과 퇴직하기 1년 전 2014년 8월에 지역산업체의 R/D 활성화를 위해 연구 개발비를 지원하는 산자부 산하 대경지역사업평가원의 원장(현재 대구지역산업진흥원과 경북지역산업진흥원으로 분리)으로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그후 2015년 3월 1일에 명예교수로 임명되었고 표면처리저널의 대표 소개로 2016년 1월부터 침산동에 소재한 표면처리 회사에 10년간 근무하면서 자문하였다. 그러던 중 2020년 칠순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까이 있는 제자들을 초청하였고 경산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17명 제자와 같이 7순 잔치를 즐겁게 지냈다. 물론 모든 경비는 내가 하였고......
2020년 후반쯤 안타깝게도 신소재공학부 졸업생들간의 모임이 뜸해지면서 학부 총동창회의 공식적인 모임이 없어져 버렸다. 안타까움에 내가 가지고 있는 동문회 명단을 보고 일일이 전화하여 상당히 많은 졸업생들을 모은 후 Band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수도권에 근무하는 제자들에게도 연락하여 자체 모임을 갖게 요구하였고 그들이 모임을 가질 때면 가끔 나도 올라가서 참석하였다.
아울러 영남대 동창회 사무실에 근무하는 김 국장의 많은 도움으로 드디어 2020년 12월 초에 영남대 신소재공학부 총동창회 band를 만들었는데...... 난데없이 제자들이 명예교수인 나를 그 band에 넣어 놓았다. 졸업생들이 혹시 불편해 할까봐 나는 그 band에서 의견을 일절 내지 않고 잠잠히 보고 있으면서 그들의 활동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현재 졸업생 밴드에는 667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신소재공학부 총동창회는 회장으로 영남이공대 신현준 교수를 뽑아 활발히 활동 중에 있다.
은퇴 후 꾸준히 제자들과 연락한 결과,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락하는 제자가 꽤 많다. 코로나 이후로 요즘은 타 지역에 근무하는 제자들이 대구 혹은 경산에 올 때면 나에게 연락이 와서 인근 카페에서 차를 하든지, 혹은 식사를 하고 가곤 한다. 타 지역에 근무하는 제자들과는 내가 그 근처 놀러갈 때면 연락을 하곤 한다. 주로 영주, 창원, 경주, 대전 등은 물론 수도권에 근무하는 제자들과 간혹 만난다. 안타까운 것은 해외에 나간 제자들과는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 작년 (2023년) 제자들 총동창회 망년회 모임에 은퇴교수로서는 유일하게 초청받아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신소재공학부 총동창회에서 전화가 와서 신소재공학부 설립 50주년을 맞아 골프대회가 있어 나를 초청한다고 말했다. 골프장에 가보니 은퇴 교수 중 나만 초청되어 있었고 골프를 끝내고 50주년 행사에서 인사 말씀을 하라는 제자들 요청에 나는 “사랑스런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매우 즐겁고 감사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맙고 친구 같은 사람들이 내 식구와 여러분들이다.”라고 말했고 그날 제자들과 따뜻한 정을 돈독히 나누며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벌써 상당히 많은 제자들이 은퇴하고 지내고 있다. 현재 나를 웃게 해주고 삶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은 나의 가족과 제자들이다. 항상 나의 제자들에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요즘 취미생활로 가곡을 배우는데 시적이면서 아주 멋진 가사가 많다. 그중 한 가사를 소개한다.
인생(신상우 작사/ 작곡)
길고 길었던 겨울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보니 어느덧 봄이더라
숨 막히게 더운 여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참아내고 보니 어느새 가을이더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온 길 뒤돌아보니 나의 이야기 남아있고
빛바랜 기억과 흘린 눈물 우리의 인생이라
걸어온 길눈 돌아보니 까마득해 보이지만
새겨질 발자국 하늘빛 미소 우리의 인생이라
이것 인생이라
2024년 5월 23일 최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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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활기찬 글 감사합니다. 역시 제자들 이야기를 하니까, 에너지가 넘치시네요. 민봉기 박사, 이희록 사장님, 등등 졸업생..... 역시 은사가 챙겨야 이렇게 긴 식구로 남는구나 싶으면서 반성합니다. 저를 많이 되돌아보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