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비었다 외 1편
권혁재
한 차장이 면직되고 자리가 비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신입을 뽑지 않았다
그가 키우던 죽은 나무를 내다 버렸다
먼지에 덮인 의자가
눈치 보며 비꼈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못할 빈자리
지나간 공문이 폐지 더미로 쌓여도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없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 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로 사라졌다
곡우
그녀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자
사내들은 물을 길러 가지 않았다
뒷산의 뻐꾸기가 울어도 끊긴 발길
삭망에 발가벗어도
오지 않는 빗방울
그녀의 속옷에 핏빛이 비치는 날
사내들이 줄지어
우물 앞에 서성이다
구전을 공손히 그녀에게 주고 돌아갔다
이튿날 우물 속에서
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권혁재, 시집 『자리가 비었다』 (천년의 시작 / 2025)
권혁재
경기 평택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외 다수. 2018년 『안경을 흘리다』, 2020년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 아르코 우수도서 선정. 2023년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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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가 짧고 간결해졌다. 사물이나 사태의 외부나 주변부를 기웃대지 않는다. 바로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가 곧바로 안에서 터져 나온다. 시적 대상의 정곡을 정확하게 찔러 터져 나오는 신음, 또는 환희를 시의적절한 위치에 나누어 진열한다. 지난 시간의 아픈 서사들이 곰삭아 뭉게뭉게 평택 뜰 허공에 뜬 구름처럼 흘러간다. “꽃샘이 둘러보는/ 2월의 부엌살림”처럼 단도직입의 서늘함 뒤로 따라오는 이 은은한 사람의 체온이 그가 끝까지 들고 가는 시의 화두다. “갯벌을 오체투지로/ 조금씩 공양하며 오는” 밀물의 힘으로 서서히 큰 배를 들어 올리듯, 그의 간단치 않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시의 지렛대가 보인다.
―이덕규 (시인)
책 소개
권혁재 시인의 시집 『자리가 비었다』가 시작시인선 0508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 등이 있다.
해설을 쓴 이형권 문학평론가는 시집 『자리가 비었다』가 향하는 방향을 살피며, 시집을 가리켜 “낮고 작은 것들에 바치는 언어”라 부른다. “재첩, 탄광 노동자, 늙은 사람, 죽은 친구, 가난한 어머니, 실패한 사랑, 시골의 작은 역사驛舍, 초승달, 빈 배, 앵두, 복수초, 눈물방울”을 시의 소재로 삼아 사유와 사랑을 빚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세속의 욕망에 ‘틈’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기꺼이 “자리가 비었다”고 선언하며, 그 빈자리에 소외되고 작은 존재들을 앉히는 시편들은 무의미하게 지나쳐 가는 시간을 다시 불러 세운다. 추천사를 쓴 이덕규 시인의 말처럼, “밀물의 힘으로 서서히 큰 배를 들어 올리듯, 그의 간단치 않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시의 지렛대”로서 작은 존재들과 공명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찬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