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최영이 죽기전 했다던 이 말 때문에(“배은망덕한 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다니...!”) 혼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자꾸 술을 마셨다.
‘아아, 내가 그분을 죽이다니......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나.....!’함께 회군을 했던 장수들이 최영을 죽이자고 강력히 주장하여 할 수 없이 동조하기는 했으나 이성계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최영을 살려둔다면 매사에 곤란한 일이 발생할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성계는 누구보다도 최영의 죽음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이성계는 최영을 존경하고 몹시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도 최영에 비길 정도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권세가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죽을 뻔했을 때 최영 때문에 살아나기도 하였다. ‘아아, 내 손으로 은인인 시중대감을 죽이다니....... 정말 괴롭구나.’ 이성계는 뼈아프게 자책하면서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어느날 최영이 대궐에서 돌아와 관복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군기윤(軍器尹:종3품 벼슬)으로 있는 이성계의 사촌형인 이천계가 긴히 여쭙고 상의드릴 사항이 있다며 찾아왔다.
최영 : 국가의 관원으로서 상사의 사택을 찾는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네. 용건이 있으면 내일 밝은 날 삼사(三司)의 처소로 찾아와 말하는 것이 어떤가?
이천계 : 다름이 아니오라, 회령 땅에 가 있는 이성계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는 제 사촌 아우입니다.
최영 : 으흠, 이성계라....그는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지, 그런데......?
이천계 : 제 집안에 관한 일이옵니다만, 저는 장손입니다. 제 조부님은 아드님을 둘 두셨는데 맏이 되시는 이가 제 아버님이시고 다음이 이성계의 아버님입니다. 제 조부는 천호로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고, 제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 원나라에 속한 관리들이 회의를 한 후에, 우선 숙부인 이성계 아버님이 천호직을 대리하다가 제가 크면 물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숙부는 제가 장성한 후에도 그 자리를 물려 주지 않고 있다고 세상을 떠나셨고 이성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유(長幼)의 차례가 뒤바뀌어 집안끼리 분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아뢰었다.
최영: 그런 일이라면 당사자끼리 순리적으로 타협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사사로이 상관의 사저에 찾아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이천계 : 최영의 지적에 찔끔하면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제가 대감님을 찾은 것은 집안을 떠나서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영 : 그것이 무엇인가?
이천계 : “이성계는 불순한 뜻을 품고 오랑캐들과 내통하고 있사옵니다. 장차 반란을 도모할 것이 분명하기에.........”
최영 : 말 삼가라, 군기감은 개인적인 혐의를 품고, 집안끼리 모함하려 드는가?
이천계 : 아니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이성계 휘하에는 퉁두란(李芝蘭, 李豆蘭이라고도 함)을 비롯하여 여러 심복들이 오랑캐이거나, 내통하는 자들입니다.
최영 : 증거를 말하게.
이천계 ; 지금 이성계가 데리고 사는 계집은 오랑캐 대표자 나하추의 누이 동생입니다.
최영 : 무엇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렷다?
이천계 :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이성계는 장차 오랑캐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최영 : 군기감, 나하추의 여동생에 관한 문제는 내가 알아보겠다. 그러나 이성계 밑에는 변안렬(邊安烈) 장군도 있는데 만약 이성계가 딴 뜻을 품었다면 그가 내게 이미 고했을 거야. 그런데 공연히 사람을 모함해서야 되겠나. 변방에 나가 고생하는 사람을....... 그런 말 하려거든 어서 돌아가게. 이후에 다시 그를 모함하면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최영이 말하는 변안렬은 오랑캐로서 고려에 귀화한 장수이다. 이천계는 최영의 질책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최영에게 혼나고 물러났지만 사방으로 권신들을 찾아다니며 이성계를 모함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성계가 나하추의 여동생을 첩으로 데리고 사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천계는 당시의 권신 김욱(金昱)을 찾아가 험담을 하였다. 김욱은 이천계의 말을 듣고 국가에 변고를 알리면 승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의 우왕은 어려서 명덕태후가 대리청정을 할 때였다. 모두들 어전에서 이성계를 당장 잡아들여 문초하자고 입을 모았다. 결국 이성계가 잡혀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의 시중 경천흥을 비롯하여 이인임, 최영 등이 문초하게 되었다. 이인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인임 : 지금부터 심문하는 것에 대해서 사실대로 대답하렷다.
이성계 : 하늘을 두고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이인임 : 이장군은 오랑캐와 손잡은 사실이 있는가?
이성계 : 소장은 무슨 말씀이신지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인임 : 장군이 오랑캐와 역모를 꾸민다는 제보가 있는데........?
이성계 : 그것은 근거없는 낭설입니다.
이인임 : 낭설이라. 이성계 :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금란화(金蘭化)라는 여자는 누군지 말하라.
순간 이성계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성계 : 아! 누군가 나를 모함했구나! 이성계는 궁지에 몰렸으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금란화는 소장의 두 번째 소실입니다.
이인임 : 그 여인의 출신을 말하라니까......
이성계 : 그녀는 오랑캐 나하추의 여동생입니다.
이인임 :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여자를 취하게 됐는지 그 경위를 해명하도록 하라.
이성계 : 10년 전 나하추가 동북에 쳐들어왔을 때입니다. 그때 그 여자도 남장복을 하고 오라비를 따라왔는데, 쫓겨 달아나다가 소장에게 생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인 줄 몰랐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열아홉 나이기에 놓아주었더니 다시 찾아와서 소장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인임 : 그러면 그 동안 그 여자는 오랑캐와 연락이 계속 있었나. 없었나?
이성계 : 한 번도 없었습니다. 10년 전 소장이 함주에 있을 때 나하추의 노모가 딸을 생전에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하고 사람을 보냈을 때도 가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임견미 : 이번에는 임견미가 나서며 물었다. 이장군의 막하에는 오랑캐들이 들끓고 있다던데?
이성계 : 그들은 전에는 오랑캐였지만 완전히 귀화하여 고려에 온갖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많은 공을 세웠기에 조정에서도 포상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이인임이 심문하였다.
이인임 : 그 금란화라는 오랑캐 여자를 내쫓던가, 관노로 삼을까 하는데....?
이성계 : 대감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지난날 광종(光宗) 임금께서도 오랑캐 출신의 쌍기(雙冀)를 후하게 예우하신 전례가 있사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포상받은 변안렬, 설장수 같은 사람들도 근본이 오랑캐이옵니다. 무조건 오랑캐라고 처벌하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인임 : 장군의 태도는 지극히 불손하다. 금란화는 아무래도 첩자 같은데....
이성계 : 소장의 태도가 불손했다면 잘못을 빌겠습니다. 그러나 금란화가 첩자라는 혐의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요? 이성계도 독이 올라 항의했다.
이인임 : 오랑캐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증거가 있는데.......?
이성계 : 나하추는 그 어미를 대신하여 동생에게 문안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나하추는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대감들께도 편지를 띄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하추는 조정의 권신들에게도 은밀히 조공을 바치고 안부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만약 그것을 따지자면 심문하는 사람들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인임 : 어쨌든 장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제보가 있으니 그 제보자와 대질시키면 알겠지. 만약 혐의가 드러나면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아시겠지.
이미 혐의를 씌우고자 작정한 터이니 이성계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인임 : 이성계를 지금 즉시 순군옥(巡軍獄:감옥)에 하옥시키도록 하라. 당시 이인임은 명덕태후나 임금도 두려워하는 막강한 세력가였다. 이인임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이장군을 하옥시킬 수 없소. 그는 국가에 공이 큰 장수요. 인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 공연히 억울한 혐의를 씌우다니....... 만약 이장군을 헤치면 이 최영이 좌시하고만 있지 않겠소......”
임견미 : 지금 국사를 처리하는 마당에 대감은 어찌하여 이장군을 두둔하시오?
최영 : 나 최영이 분명히 보증하리다. 만약 이장군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책임을 내가 대신 지겠소. 어서 풀어주시오. 변방을 한시도 비울 수는 없소. 국가에 제일 큰 공로를 세운 최영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성계를 옹호하고 변론하였다. 최영은 평소 이성계를 신임하고 아껴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기세가 등등하던 권세가들도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최영의 강직한 성품과 맞섰다가는 공연히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날을 회상하고 이성계는 아무도 모르게 손수 제문을 지어 최영의 영전에 바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수시중대감..... 어쩌다 일이 그 지경이 되었는지, 내 지하에 가서라도 훗날 사죄하리다. 부디 명복을 비오이다.’
이성계는 무장답게 의리를 중히 여겼으며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혜를 입었고 자기가 존경했던 최영을 죽여야만 했고, 그뒤 심한 번민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회군한 다른 장수들과 최영을 최인으로 몰아 죽인 후 몰래 혼자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훗날 이성계는 새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최영을 죽인 데 대해 가장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태조 이성계는 승하하기 얼마 전에 최영에게 무민공(武愍公)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신하들의 반대가 몹시 거셌지만 최영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놓여나기 위해서 끝내 관철시켰던 것이다. 부모나 스승처럼 존경하던 최영, 그를 죽인 후 많은 세월 동안 심히 괴로움을 느끼며 살았던 태조 이성계의 모습 속에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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