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성의 본명은 조경환(曺景煥), 백명(白鳴) , 주인욱(朱仁旭)이란 필명도 썼다.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 천석꾼 부호인 아버지 조용묵(曺容默)과 어머니 이진우(李珍愚) 사이에서 1910년 10월 29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곡가 나화랑(羅花郞)[본명 조광환(曺曠煥)]의 형이다. 고려성은 김천문예협회(뒷날 조선문예협회가 됨)가 종합문예지 『無名彈』을 창간함(1930. 1. 20.)에 편집과 재정에 이바지하였다. 일찍이 극작 활동을 하다가 1938년 11월 태평레코드사에 입사, 가요 제작 업무를 총괄하는 문예부장을 맡았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동료 작사가 이서구·박영호·조명암·천아토·유도순 등과 함께 가요 작사 활동을 했다. 1939년 7월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 공동으로 ‘태평레코드 예술상 전국콩쿨대회’를 김천에서 개최, 박창오[가수 진방남], 태성호[본명 이선호], 백난아[본명 오금숙] 등의 가수를 발굴했다. 그는 30곡에 육박하는 가요 작품을 남기고 1956년 9월 16일 부산에서 타계했다. 사상적으로 좌익활동에 맹렬했던 까닭에 그동안 그의 업적과 성과가 베일에 가려 있었다.
글에 나오는 천아토 미술을 전공한 태평레코드 문예부장 으로 본명 천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