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관념의 사물화(事物化)
우리 내면에는 외부의 세상 못지않게 복잡다단하다. 수많은 욕망과 감정들이 뒤얽혀 있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 소위 7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부침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들이 또한 시의 중요한 소재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라고 가정하자.
가)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무척 분하다.
나) 나의 가슴은 분노의 용암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느 표현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가? 물론 가)보다는 나)일 것이다. 가)는 관념적인 표현이지만 나)는 구체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분노’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정황을 화산이 폭발할 때 흐르는 ‘용암’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끌어다 표현했다.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것이 ‘관념의 사물화’이다.
랜섬(J. C. Ransom)이라고 하는 문학이론가는 시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가)관념시(platonic poetry)
나)사물시(physical poetry)
다)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
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읊은 시이다. 주체적 소재가 중심이 된 것이다.
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객체적 소재가 대상이 되었다.
랜섬은 주관에 기우는 가), 객관에 치우치는 나)와 같은 시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다)를 이상적인 시로 설정했다. 다)는 가)와 나)의 통합이다. 즉 관념의 사물화가 구현된 작품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을 빌어서 비유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다.
11. 이미지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
- 병치의 시법
이미지 전개 가운데 가장 단순한 구조가 병치구조이다.
병치구조는 대등한 이미지나 생각들을 나란히 늘어놓는 구조이다.
예를 들면,
나는 왜 너를 보면 망명을 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맨발로 파도를 달리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백조왕자가 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유서를 쓰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이 세상 모두를 뒤집어엎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장미꽃 현란한 꽃비를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하늘로 하늘로 금사다리를 놓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천국과 지옥의 합창을 듣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물구나무가 서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또 하나 태양의 부활을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길길이 뛰고 싶니?
- 박두진 <해비명海碑銘> 전문
너무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조이다. 바다를 보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과 이미지들을 11개의 행에 각각 담아 대등하게 배열하고 있다. 행과 행의 연결에 어떠한 관련성이나 인접성도 없다. 작품의 길이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이런 유형의 시를 우리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