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9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6.14|조회수227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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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에게 민병산이 있다면 박영우 시인에겐 신동문이 있다. 한 사람은 막역지우로서 충청일보와 새벽 그리고 신구문화사를 함께했다면 박영우시인과는 멀면서도 가깝게, 가까우면서도 멀게 지낸 벗이다. 박영우가 전매청을 사직하지 않고 근무했더라면 시인으로서의 길이 보다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동문의 말처럼 먼 길을 돌아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0년 겨울 발간한 박영우 시인의 첫 시집 ‘뚝섬의 끝’에 게재한 신동문의 발문은 두 사람의 우의가 잔뜩 묻어난다. 이제 신동문이 박영우 시인의 시집에 쓴 발문을 읽는 즐거움을 맛보자.
발문
-박영우시집 ‘뚝섬의 끝’에 붙여서-
책으로 찍기 전에 원고뭉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맨 먼저 생각이 나는 것은 우리가 처음 만난 장면이다. 6· 25 동란의 총성이 그친 이듬해-54년 5월 어느 날 저녁, 청주-그 무렵 최병준이 구두 닦기 소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던 야간학교교실에서였다. 그 기다란 목조-창을 열 것도 없이 창틀이 몇 개는 떨어져나간 단 간방 교실에서 시낭독회 ‘5월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그 첫 회는-이설우, 최병길, 홍원길, 송영달, 이동봉, 신집호, 나, 그리고 충주에서 오신 유촌선생-이런 얼굴들이었고 주로 여학교 학생들이 구경을 하러 와 있었다. 시낭독을 마치고 강연으로 들어가려할 때, 뒤쪽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시 한 편 더 낭독할 수 있습니까’하고 말을 던지고서 일어섰다. 키가 크고 뻣뻣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인 것처럼 보이는 허름한 검정색양복차람이다. 호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어 치켜든 손에 힘이 있다. 소매가 짧아 보일만큼 늠름한 팔이다. 감정을 억제한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그 시는-이 책에 실리지 않았으나, 전장에서의 체험을 담은 7, 80행이나 되는 긴 작품이었다.
그 젊은이가 박영우였다. 거리에서 전봇대에 붙은 광고딱지를 보고서 왔다고 했다. 경기도 고읍 안성 출신. 군복을 벗은 뒤에 우연한 인연으로 이 고장에 와서 전매청 서무과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손꼽아 세기도 아득하게 어느덧 26년 전이다.
그로부터 우리 모두 같이 어울려서 자주 만났다. 와우산 산기슭-무심천 벚꽃나무 둑-중앙공원 한복판에 하늘을 찌르는 듯 장엄한 천년의 으능나무-그리고 소설 쓰는 박수양, 최창희, 그림 그리는 윤형근, 정창섭, 책을 좋아하는 민병산, 김상규, 당시는 학생복을 입은 유흑열, 윤혁민, 김문수, 홍명희, 이한우……도 차례로 만나게 되었다.봄 가을에는 시화전도 몇 번 열었다. 우리들의 청춘-그 ‘가난한 시절’에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절로 맺어진 우정은 흡사 땅에 깔린 낙엽이 바람에 불려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한 구석에 모인 것 같은, 그런 해후였는데-기이하게도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는 것은 그때 그 사람들이다. 다만 제일 연소한 홍명희 하나가 아직도 홍안처럼 보이더니 홀연히 가고 없다.
그러다가 박영우는 어느 날 갑자기 ‘나 바람 좀 쏘일까 해요’하곤 유랑의 길을 떠났다. 알고 보니 전매청 벼슬아치가 무슨 이상한 위조 공문서를 만들라는 명령에 불끈 화가 나서 사표를 던지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게 아마 57년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이 오래 계속되었다. 사람마다 자리를 잡기가 썩 어려운 때이기도 하지만, 필시 마음속에서 더듬는 길이 하도 멀었기 때문이다. 그 유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편 친구들 거의 모두가 4· 19나던 해-60년을 전후해 상경했다.
그동안 박영우의 모습은 경향으로 전전하여 우리 시야에서도 보이다 안보이다 했다. 단양 애곡리 산비탈에 포도원을 개간한 일도 있다. 다음에는 신구문화사의 ‘전후세계문학전집’을 들고 이화여대 강의실에 뛰어든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년에 도서출판 창미서관을 발족하면서 그제 서야 청춘을 다 싣고 간 유랑이 일단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요즈음은 종로2가 한국기원 3층 일반 대국실에서 가끔 만난다. 그는 바둑을 두지는 않으나 친구들 소식이 궁금해서 온다.
‘시집을 한 권 찍을까 해요. 너무 늦었을까’하고 불쑥 말을 꺼낸 것은 바로 며칠 전이다. ‘늦기는 뭐가 늦었다구 그래. 오히려 그게 다행이 아니었을까’하고 나는 대답했다.
‘뚝섬의 끝’의 시인은 일반 독자들께서 문예지의 목차나 신문 일요시단에서 눈 익은 이름은 아니다. 이 나라 문단이나 출판계에 교우가 적지 않은 박영우가 나이 지명에 이르도록 벙어리처럼 묵묵히 걸어온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 한편 한편의 감상은 독자가 각각 할일이지만 나로서는 다음 두 가지 이유를, 깊은 감개를 느끼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상념을 소박한 모습에서 응시하기 위해, 혹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두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남용에 의해 빛깔이 바래거나 피곤해진 언어를 순화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관용의 미사여구를 모조리 몰아내야 했다. 논어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하고, 또 ‘강의목눌 근인剛毅木訥 近仁’이라 한 말은 시어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
시인에게 있어 세계가 항상 처녀세계라야 하는 것처럼 언어는 항상 청신해야 한다. 그것을 지키고 회복하는 수단이 소박이다. 고대의 시가 불멸이고, 고대인의 모습이 영원히 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하며, 뭐 그다지 어렵지 않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 가장 어려운 일, 가장 많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일단 터득한 것을 잊어버려야 하는데, 터득하는 시간보다 잊어버리는데 요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둘째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고독-빈곤-무명-변경의 유랑이 오히려 그에게 어떤 행운보다 더 큰 은혜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는 이치-아니 어쩌면 그런 게 아니고, 차라리 보편적인 진리-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설명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 이치이다. 이 이치를 존중하는 사람은 오늘 날 옛날에 비해서 훨씬 줄었다는 게 사실일까?
그러나 시를 택한 사람이면 절대로 복종하지 않을 수없는 진리가 아닌지 어떤 시인도 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생존하는 한, 하나의 경험적 존재이며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 역설적 행운이 시인의 심흉心胸을 투명하게 하고 그 길을 멀리 이끌어간다.
오늘 날 세상은 소리가 하도 많고 하도 요란하다. 소리와 소리가 서로 압도하여,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이럴 때는 낮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하는 말이 오히려 명료하게 들리는 게 아닌지. ‘뚝섬의 끝’을 한 줄 한 줄 따라가면서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 수록된 것은 대부분이 79, 80년의 작품이고, 초기의 작품이 전혀 실리지 않은 것은 소년시절부터 같이 걸어온 나로서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다음에라도 정리를 해서 앞에다 붙여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밖에 청주서 보낸 시절에 창작과 희곡의 습작도 있었던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것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원고가 책으로 찍혀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철학자 아랑이 루우앙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훈 ‘가장 먼 길을 선택하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박영우는 우리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1980년, 겨울 신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