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제6장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 따자웅몬(Tazaungmon)1의 보름날 설법
오늘은 따자웅몬(Tazaungmon)의 보름날입니다. 이날은 부처님 당시의 중인도에서
당시 전통에 따라 우기가 낀 달의 마지막날과 한해를 마무리하는 날로 축제가 벌어지는
대성일(大聖日)이었습니다. 미얀마에서도 우리는 등불축제를 봉행하고 세존께 경배를
드림으로써 이 날을 기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초전법륜경」에 나온 가르침대로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사성제(四聖諦)를 독송합니다.
고제(苦諦 Dukkha-saccā) - 괴로움의 진리
집제(集諦 Samudaya-saccā) -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
멸제(滅諦 Nirodha-saccā) -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도제(道諦 Magga-saccā)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
1. 멸제-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 nirodho ariya saccām. Yo tassā 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nnissaggo mutti anālayo.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멸성제(滅聖諦)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없음이다.”
멸제(滅諦)란 집제(集諦)인 갈애의 소멸입니다.
위빠사나 지혜와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갈애가 일어나고 사라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햋볕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 도의 지혜가 생기면 갈애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갈애의 소멸로 새로운 생의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이렇게 갈애가 일어나지 않거나 소멸하는 것을 멸제(滅諦)라고 합니다.아라한 도의 지혜로 갈애를 없애는 것은 갈애의 남김없는 완전한 소멸로 가장 성스럽고 높은 형태의 소멸입니다.
낮은 형태의 소멸은 예를 들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 taṇhā)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불환도에 의한 소멸,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를 제거하는 일래도에 의한 소멸,
악처(apāya)에 떨어지게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를 제거하는 예류도에 의한 소멸과
같은 소멸이 있습니다.이러한 소멸은 오직 갈애의 부분적인 소멸과 관련되기 때문에 낮은 형태의
소멸의 진리(滅諦)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상· 고· 무아의 성질을 명상함으로써
일어나는 또 다른 형태의 소멸이 있습니다. 삼특상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갈애가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갈애의 일시적 소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를 부분적으로 닦아서 갈애를 반 쯤 소멸시킨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에 매진하고 있는 매순간 수행자는 갈애의 일시적 소멸을 체험한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빠알리 성전「대념처경」은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다시 소멸되는가?”
라는 물음에 답변을 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갈애의 소멸의 진리(滅諦)에 대해 해설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한다.”
여기서 즐겁고 기분좋은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대로,
눈[慧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意)의 육문(六門)과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맛(味), 감촉(觸), 마음의 대상(法),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코의 식(鼻識), 혀의 식(舌識), 몸의 식(身識), 마노의 식(意識)의 여섯가지 식(六識)를 뜻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대념처경」의 경문과 번역본을 참고하면 될것입니다.
버림과 멸진은 의미상으로 유사합니다. 이와 같이,
cāga(버림, 포기),
patinissagga(포기, 저버림, 폐기),
mutti(벗어남, 자유, 해탈),
analayo(염오, 제거) 이 모두는
다 nirodha(소멸, 멸진)와 같은 뜻입니다.
2. 갈애는 어떻게 소멸하는가
수행자가 보는 순간 ‘봄’이라고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본성을 확신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눈[慧眼],
형상(色),
눈의 식(眼識)등과 같은 감각의 육문(六門)과
감각대상에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무명(avijiā)에 전도되지 않을것입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무명에서 벗어납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아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 감각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즐거운 느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할때가 바로 갈애의 일시적 소멸이나 빛바래 사라짐입니다.
갈애(愛 taṇhā)가 빛바래 사라짐으로써 그 갈애 뒤에 이어지는
취착(取 upādāna),
감각적 욕망(慾 kāmā),
상카라(行s aṅkhāra)도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식(識 vinñāṇa),
정신과 물질(名色 nāma rūpa),
육처(六處 saḷ-āyatana),
감각접촉(觸 phassa),
느낌(受 vedanā),
업(kamma)의 불선한 과보(vipāka),
상카라(saṅkhāra)도 역시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갈애가 괴로움과 함께 일시적으로 소멸하는것을 보여주며,
이를 일러 일시적 소멸이나 일시적인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듣고 냄새맡고 하는 등의 순간에
‘들음,
냄새맡음‘
귀의 식(耳識)’‘코의 식(鼻識)’
로 알아차림으로써
귀(耳), 소리(聲), 코(鼻), 맛(味)등에 대한
무상· 고· 무아의 본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 대상들과 관련하여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무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와 괴로움의 일시적 소멸, 또는 일시적인 열반이 있게 됩니다.
일시적 소멸을 촉발하는 위빠사나를 통해서 높은 지혜가 개발됨에 따라 예류자의 지혜로 열반이 실현됩니다.
예류자의 지혜는 악처(apāya)에 재생하게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를 소멸시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악처의 고통과 욕계 선처(kāmā-sugati)에서 일곱생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갈애가 소진된 결과로써의 괴로움의 소멸이지만 예류자의 도과가 갈애의 소멸을 관찰의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이 완전한 소멸된 결과로 생긴 소멸만을 관찰합니다.
일래의 지혜로 열반이 실현되면 거친 형태의 감각적 갈애와 욕계(欲界)에서
두번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이 함께 소멸됩니다.
열반이 불환의 지혜로 실현되면 미세한 형태의 감각적 갈애와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서 한번 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이러한 것들도 갈애의 소멸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일래, 불환, 아라한 도에서도 마음은
단지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에 내재해 있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인해 생겨나는 소멸만을 관찰합니다.
아라한 도의 지혜로 열반이 실현이 되면 모든 형태의 갈애와 괴로움은 완전히 소멸됩니다.
이것도 갈애의 소멸로 인해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수 있습니다.
1. 갈애가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때만 괴로움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수 있습니다.다른 방도를 써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래지 않아 다시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참된 벗어남이 아닌 일시적인 경감일뿐입니다. 예를 들면, 구부림으로 인한 뻣뻣함을 해소하기 위해 팔다리를 뻗습니다.통증은 팔다리를 뻗음으로써 일시적으로 없어지지만 나중에 또 피곤함으로 되돌아뿐입니다.
마찬가지로,장시간 앉아있어서 생기는 뻣뻣함도 일어서거나 이리저리 거닐어서 해소되겠지만 결국은 피로로 곧 대체될뿐입니다. 배고픔에 시달릴 때는 약간의 음식을 먹어서 그 고통이 해소되겠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다른 고통이 시작될것입니다. 병은 적절한 의학적 치료로 치유할수 있지만 또 다른 병들이 조만간 생겨나서 다시 고통을 주기 시작할것입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은 적절한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해서 성공하고 번영하게 되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종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아주 부유한 사람이 되어서 해결될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부침(浮沈)으로 높은 지위에서 추락하거나 빈털털이가 될수도 있습니다. 설령 전 생애내내 순조롭고 평탄한 항해를 한다하더라도 죽을때에는 어쩔수없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보시와 지계 같은 공덕행의 과보로 유복하고 번영하는 환경에 둘러싸인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막강한 신들의 왕으로 태어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선행의 공덕이 다하면 비참한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할수 없습니다. 만약 사마타명상의 색계선이나 무색계선을 얻어 긴 수명을 가진 행복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면 정말로 수많은 겁동안 행복하게 지낼수 있는 색계범천계와 무색계범천계에 이를수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선정의 선한 공덕이 다하는 때가 오면 제 5장 집제(集諦)에서 언급했던 어린 암퇘지의 사례에서 보듯 그 범천계에서 또 다시 악처로 추락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으면 어떠한 형태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난 완전하고 영원한 자유는 오직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였을때에만 비로소 성취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tassayeva taṇhāya asesa viraga nirodha,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 멸제(滅諦)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무명(avijiā)과 같은 원인이 되는 조건들이 멈추면
그 결과인 상카라(saṅkhāra)등도 함께 멈춘다고 설하는 12연기의 가르침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빠알리 성전『증지부(增支部)』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란 무엇인가?
무명(avijJ)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업형성력(saṅkhāra-kamma)이 소멸한다.
업형성력이 소멸함으로써 그 결과인 식(識 vinñāṇa)2이 소멸한다.
이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소멸함으로써
정신과 물질(名色)이 소멸한다.
정신과 물질이 소멸함으로써 육처(六處 salāyatana)가 소멸한다.
육처가 소멸함으로써 감각접촉(觸 phassa)이 소멸한다.
감각접촉이 소멸함으로써, 느낌(受 vedanā)이 소멸한다.
느낌이 소멸함으로써 갈애(taṇhā)가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함으로써 취착(取 upādāna)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함으로써 존재(有 bhava)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함으로써,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함으로써 죽음, 늙음,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소멸한다.
이렇게 영혼의 실재도 아니요 행복(sukha)과 아무 관련없는 단순한 괴로움의
이 전 무더기들이 소멸하게 된다.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라 한다.”
위의 경문에서 각각의 원인과 그 결과들의 상호연관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무명(avijiā)이 소멸하면 업형성력(saṅkhāra-kamma)이 소멸한다는 예로 소멸의 이어짐이 일련의 순서로 설해졌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중요한 점은 일단 무명이 빛바래어 사라지면 상카라(saṅkhāra)등과 같은 무명으로 생겨난 모든 결과물들이 다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빨리어 니로다(nirodha) 또는 니로도(nirodho)는 소멸의 장소나 조건이 아닌 그냥 소멸만을 뜻합니다.
비록 주석서가 니로다를 소멸의 장소나 소멸의 조건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니로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명(avijiā), 상카라(saṅkhāra), 식(識 vinñāṇa)과 같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연관된 조건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이요,
그들의 완전한 소멸이요, 멸진, 단절임을, 다시 말해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인 열반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멸성제(滅聖諦)를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더 상세한 것은「열반에 관하여(Concerning Nibbana)」라는
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의 해설로 넘어가겠습니다.
3. 도제-도의 진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amini patipada ariyam saccām. Ayameva ariyo atthingikomaggo. Seyathidam sammā diṭṭhi, sammā saṅkappo, sammā vācā, sammā kammanto, sammā ajivo, sammā vayamo, sammā sati, sammā samādh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우리는 이전에 아주 상세하게 도제(道諦)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강조할 필요성이 있는 몇가지만을 지금 살펴보겠습니다.
도의 여덟가지 각지중
바른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는 혜(慧)의 도,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는 계(戒)의 도,
그리고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는 정(定)의 도입니다.
우리는 계와 정의 도를 다시 상세히 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혜의 도의 바른 견해(正見)도 더 이상의 상세한 해설이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른 견해(正見)에 대한 다음 해설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4. 바른 견해에 대한 해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正見)라 한다.”
이것이 바로 세존께서 바른 견해(正見)에 내리신 정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성제(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해야 하는 대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오는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5. 사제에 대한 수행
‘사제(四諦)를 이해하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사제에 대한 명상을 설하셨다.’
이 사제(四諦)가운데 처음 두가지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윤회(vaṭṭa)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뒤의 두가지 진리인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윤회에서 물러남(vivaṭṭa)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비구 수행자는 오직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인 윤회의 진리(vaṭṭa-saccā)만을 명상주제로 취할뿐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인 윤회에서 물러남의 진리(vivaṭṭa-saccā)는 명상주제로 삼지 않습니다.3
실제로 범부들이 명상을 닦아서 종성(種姓 gotrabhū)4의 단계를 얻기전까지는 그들의 봄(見)과 지혜(智)의 범위내에서 도과나
열반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을수 없는게 사실입니다. 종성(種姓)의 마음은 위빠사나 지혜(vipassanā-ñāṇa)를 완벽히 개발할때
수순하는 지혜(anuloma-ñāṇa)다음에서만 일어납니다. 종성(種姓)다음에 곧바로 도과가 증득됩니다. 그래서 범부는 참된 열반, 또는 도과를 명상의 대상으로 삼을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하는 가르침이나 지도는 완전히 잘못된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고요함(upasama)을 관찰(anupassana)하는 대상으로 열반을 취할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 될수 있습니다.
탐욕의 빛바램(離慾 virago)과 같은 열반의 속성을 관찰하는 것은
집중(samādhi)이나
고요함(upasama)을 얻기 위한 사마타 명상으로는 행할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타 수련은 오로지 마음이 대상 한곳으로 집중된 상태(心一境性)를 얻기위한 목적으로 닦는 것이지
곧장 성스러운 도과를 얻기 위해 닦는것이 아닙니다. 어쩧든지간에 이 명상수련은 범부(puthujJna)가 아닌
이미 열반을 체험한 성자(ariya)에게나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시작부터 열반을 관찰하면서 도과를 얻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수행입니다.
비구 수행자는 스승에게서 오온(五蘊)은 고제(苦諦)이고,
갈애는 집제(集諦)라고 간략하게 배웁니다.
비구 수행자는 또한
물질의 무더기(rūpa-kkhandha)인 색온(色蘊),
느낌의 무더기(vedanā-kkhandha)인 수온(受蘊),
인식의 무더기(saññā-kkhandha)인 상온(想蘊),
상카라의 무더기(saṅkhāra-kkhandha)인 행온(行蘊),
식의 무더기(viññāṇa-kkhandha)인 식온(識蘊)으로 이루어진 오온(五蘊)을 더 종합적으로 배울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색온(色蘊)이란
네가지 근본요소(四大)와 거기서 파생된 물질(upada-rūpa)등을 뜻합니다.
그래서 비구 수행자는 스승으로부터 앞의 두가지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간략히,
혹은종합적으로 배우고 난후 그것들을 반복해서 암송하고 수행을 하면서 관찰합니다.
나머지 두가지 진리인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듣기만 합니다.
이 말은 이 두가지 출세간의 진리는 그냥 듣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와같이 하면서 사성제(四聖諦)를 하나의 통찰(pativedha)로
통찰하고 하나의 관통(abhisamaya)으로 관통합니다.
비구는 통찰로 괴로움을 바르게 잘 이해하였음을,
갈애를 버리고 소멸시켰음을, 소멸을 실현했음을,
도를 닦았음을 통달하게 됩니다.
비구는 관통5으로 괴로움을 바르게 잘 이해하였음을,
갈애를 버리고 소멸시켰음을,
소멸을 실현했음을,
도를 닦았음을 통달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대로 스승에게서 경청하고 배워서 질문하고 외우고 꿰뚫는 반조로 통달해서 도를 얻기전 두가지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아는 지혜가 비구 수행자에게 생깁니다. 이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스승에게서 경청하고 배워서 질문하고 외우는 것은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고 꿰뚫은 반조로 통달하는 것만이 위빠사나 명상에 의한 통찰입니다.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아는 지혜는 경청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닦아서 성스러운 도를 깨닫는 순간 통달지(pariñña)에 의한 통찰을 통해서 고제(苦諦)를,
버림(pahāna)에 의한 통찰을 통해서 괴로움의 집제(集諦)를,
실현(sacchikiriya)에 의한 통찰을 통해서 멸제(滅諦)를 각각 통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냥 배워서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알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히 이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명상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처음 두가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아는 지혜는 그것들을 배우고 명상을 해서 관통하는 통찰지로써 얻어야 합니다.
6. 들어서 아는 지혜
우리가 인용한 주석서에 나오는 것처럼
오온(五蘊)이 고제(苦諦)이고
갈애가 집제(集諦)라는 것을 그냥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서 오온(五蘊)이란 본「초전법륜경」에서 언급된 다섯가지 취착의 무더기인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오온(五蘊)이란 보고 듣는 순간에 나타나는 대상들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관련 항목에서 집제(集諦)를 종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이 두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아는 것은 연기법을 간략하게 아는 것이 됩니다.
「청정도론」의 대복주석서인「마하띠까(Mahā-tika)」는 앗사지(Assaji)장로가 설한‘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agato aha, 모든 법은 원인(hetu)이 있어 생겨나며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말씀하신다.’라는 이 게송이 전체 연기법을 간략하게 나타낸다고 명확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장』「대품(大品)」(Vin.i.40) 의 주석서 또한 앗사지 장로가‘ye dhammā hetuppabhavā, 모든 법은 원인이 있어 생겨나며.’라는 게송으로 고제(苦諦)인 오취온(五取蘊)을 가르쳤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앗사지 장로는 ‘tesam hetum tathāgato āham,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말씀하신다.’ 라는 게송으로 집제(集諦)를 가르쳤습니다.6 그래서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경청해서 간단히 배우고 나면 연기법도 간단히 배우게 됨은 명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표와 원형 도해로 설명되는 12연기를 완전히 숙달하지 않고서는 위빠사나를 닦을수 없다고 설법하는 이들은 주석서와 복주석서의 이러한 말씀들에 반하고 수행교법(paṭipatti-sāsanā)7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빠알리경전인『중부(中部)』근본오십품(根本五十品)의「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ṇhāsankhaya Sutta)」(M37)에서 우리는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접합니다. “오, 신들의 왕, 제석천이여, 이 교법에서 비구는 모든 법들이 영원하고 즐겁고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지니는 것이 부적합하고 부적절하다는 것을 듣는다.”8
이것은 비구가 보고 들을 때 매번 감각의 육문(六門)에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蘊)은 무상· 고· 무아이기 때문에 항상하고 즐겁고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일찍이 들었다면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 suta-maya-ñāṇa)9를 충분히 지녔으며 그로써 명상에 매진해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법문을 이어 나가셨습니다.“그렇게 경청해서 배운 비구는 명상과 실제 경험으로 모든 법을 안다.”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명상을 통해 어떻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등을 얻는지를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모든 법은 무상· 고· 무아이다.
2.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로 충분하다.
3. 명상으로 물질(rūpa)의 무더기에서 정신(nāma)을 구별해내기에 충분하다.
4.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무상과 고(불만족)의 본성을 알게 된다.
1번과 2번은 (명상을 닦아나가는데) 간략하게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로 충분함을 나타냅니다. 3번은 보고 듣는 등의
모든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려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와 보고 듣는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두가지 지혜가 세가지 통달지(pariñña)가운데 하나인
안것의 통달지(知邊知 nata-pariñña)인 최상의 통찰지(abhiññā-paññā)입니다.
4번은‘sabbaṃ dhammaṃ abhiññāya, sabbaṃ dhammaṃ parijānāti,
모든 법들을 경험하고 모든 법들을 두루 안다.’
라는 가르침대로 모든 법들에 대한 완벽한 지혜와
모든 법들의 무상· 고· 무아의 특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뜻합니다.
이는 조사의 통달지(審察邊知 tirana-pariñña)와
버림의 통달지(斷邊知 pahāna-pariñña)라는 심오한 지혜를 이룹니다.10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모든 법이 무상· 고· 무아임을 경청해서 배우고 나면
아라한의 도과를 얻기 위한 정진을 해 나갈만큼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를 충분히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연기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이 없이는 명상을 닦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빠알리 성전인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ṇhāsankhaya Sutta)」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수행에 매진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꺽고 수행의 교법(paṭipatti-sāsanā)이 번성하는데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12연기와 그 원형 도해 따위를 완전히 숙달하고 나서야만 명상을 닦을수 있다고 한다면
12연기를 배울 시간과 기회가 없거나 12연기를 종합적으로 배우는데 속도가 느린 사람들은 비록 도과를 얻을
충분한 조건이나 자격인 바라밀(pāramī)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도과를 성취할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예를 하나 들면, 세존당시에 쭐라빤타까(Cula-pantaka)11라는 비구는 4주간동안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5자모(字母)로 구성된 게송12하나도 외우기 어려웠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가 12연기의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명상수련법을 불과 오전 나절만
닦아서 아라한을 얻어 선(禪)의 신통지(abhiññā)와 봄(見)을 이루었습니다.
「초전법륜경」법문을 설하는 기회를 빌어 우리는 여러분들과 같이 선하고 배움있는 사람들은 명상수행에 전념하고
매진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꺽고 낙담하게 할수 있는 그러한 언행을 삼가할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만약 남의 도움없이 혼자서 수행에 매진하려고 한다면 무더기(蘊 khanda), 토대(vatthu), 요소(界 dhātu), 진리(諦 saccā), 기능(根 indriya), 12연기(paṭiccasamuppāda)를 폭넓게 배울 필요가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하고 덕있고 배움깊고 현명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도를 닦고자 한다면 그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바로 모든 법은 무상· 고· 무아라는 것입니다. 경청해서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두가지 세속적 진리, 다시 말해서 고제(苦諦)인 오온(五蘊), 그리고 집제(集諦)인 갈애에 범부가 지배당하고 있음을 배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대다수 미얀마의 불교인들은 이미 이러한 지혜를 많이 갖추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명상을 닦기 직전이나 명상을 닦으면서 명상스승의 법문을 들어 이러한 지혜를 갖출수도 있습니다.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로 딴 이 학점에 어떠한 회의나 의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요구되는 것은 믿을만 하고 덕있고 배움깊고 현명한 스승의 지도에 따라 명상을 닦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어떻게 닦기 시작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제 3장의 법문에서 설했습니다.
다시 요약을 하면 수행은
➀ 근본 도(mūla-magga),
➁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
➂ 성스러운 도(ariya-magga)의 세 가지 도로 닦습니다. 이 세가지 도를 닦아서 열반에 이릅니다.
근본 도(mūla-magga)는 우리가 이전에 상세하게 다루었던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sakata-sammādiṭṭhi),
계(sīla), 근접삼매(upacāra-samādhi)나 본삼매(appana-samādhi)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요소인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sakata-sammā-diṭṭhi)는 대다수 미얀마의 불교인들이 어렸을때부터
이미 이 믿음을 확립하였습니다. 계의 도는, 만약 재가 수행자가 아직 그것을 확립하지 못했으면 명상을 닦기 직전에
계를 수지하여 완성할수 있습니다.
비구 수행자는 자신의 계가 청정한지 일말의 의구심이 생기면 참회를 해서 계를 청정히 해야 합니다. 삼매를 이루는데에 있어
수행자는 들숨날숨(出入息 ānāpāna)과 같은 사마타 수련을 택해서 선(禪)이나 근점삼매(upacara-samādhi)를 얻을때까지
그것을 닦아야 합니다. 만일 시간이나 기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수행자는 네가지 근본 요소(四大)를 관찰하기 시작해서 근접삼매(upacāra-samādhi)와 비슷한 위빠사나 찰나 삼매(khaṇika-samādhi)를 얻을수 있을것입니다. 이 삼매는 장애(五蓋)를
몰아내어 심청정을 성취할수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근본 도(mūla-magga)를 어떻게 확립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7.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도
앞에서 설한대로 근본 도(mūla-magga)를 닦고 나서 수행자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각 현상들이 매 순간 일어날때마다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오취온(五取蘊)인 고제(苦諦)의 실상을 관하기 시작합니다. 오온(五蘊)에 대한 자세한 설명, 그리고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보지 못하게 되면 항상하고, 즐겁고, 자아가 있다고 오온에 어떻게 취착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알아차림(sati)으로 오온의 진정한 본성을 보아 오온에 대한 취착(upādāna)을 소멸하는지는 본 법문의 제 3장과 제 4장에서 이미 설하였습니다.
삼매를 완전히 확립하게 되면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매번 알아차림과 함께 무상· 고· 무아라는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그러한 알아차림을 개발하는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수 있을것입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구부림, 뻣음, 들어올림, 앞으로 나아감, 움직임, 쉼의 각 행위들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수행자는 물질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아는 마음(식)을 인식합니다. 이 구별이 바로 위빠사나 지혜를 개발하는데 초보적인 토대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입니다.세존께서는『장부(長部)』「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D2)과 『중부(中部)』「선생우다이대경(善生優陀夷大經 Mahasakuludayi Sutta)」(N77) 에서 루비의 예를 들어 어떻게 이 지혜가 개발될수 있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8. 물질과 구분되는 정신에 대한 부처님의 비유
갈색, 노란색, 빨강색, 흰색, 옅은 노란색의 실이 박혀 있는 웰루리야(Veluriya)라는 보석을 관찰하기 위해 그것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보석에서 실을 구별해낼수 있습니다. 그는 보석의 몸체에 파묻혀있는 색깔있는 실을 선명하게 볼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식의 대상에서 아는 마음을 구별해낼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식의 대상으로 돌진하는 아는 마음(식)을 압니다. 이 비유에서 물질적 대상은 보석과도 같고, 아는 마음(식)은 실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보석안에 박힌 실처럼 아는 마음(식)은 그 대상을 향해 파고듭니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의 구별이 비유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얼마나 많은 유형의 물질과 마음, 마음부수(心所)등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아는 앎의 언급이 없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냥 식의 물질적 대상에서 아는 마음(식)를 구별하는 것만이 언급되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청정도론」(Vis.XVⅢ.15)에서 관찰하는 수행자에게 어떻게 정신(nāma)이 분명해지는지를 묘사하는 구절을 또 다시 보게 됩니다.‘ 차츰 물질(rūpa)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얽힘이 풀리며 아주 선명하게 될 때 그 것을 대상으로 가진 정신의 법들도 스스로 분명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청정도론」(Vis.XVⅢ.34)에서 이러한 구절도 보게 됩니다.‘ 정신(nāma)을 의지하여 물질(rūpa)이 일어나고,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난다. 정신이 먹으려하고, 마시려하고, 말하려하고, 행동거지를 지으려 할때 물질이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동거지를 짓는다.’「청정도론」의 이 페이지에서는 정신과 물질의 다양한 분류의 열거에 관한 언급이 있고 실제로 체험될수 있는 것만 설해졌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다양한 분류를 그냥 숙고만 해서는 진정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가 개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진정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을 관찰하면서 아는 마음(식)과 식의 물질대상을 따로 따로 인식할수 있을때만 개발됩니다.
식의 대상인 물질(rūpa)에서 아는 마음인 정신(nāma)를 구별할수 있는 능력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설사 명상수행을 닦기전과 수행의 초보단계에서 책을 통해 아는 마음인 나마(nāma)가 물질적인 몸(rūpa)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배웠을지 몰라도 수행자는 아는 마음(식)과 물질적인 몸을 실제적인 체험으로 구별해내지는 못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가 개발된 단계에 이르렀을때에야 비로소 이 정신과 물질사이의 구별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수행자가 생각하는 현상이나 고통스러운 느낌을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생각하는 마음과 그 물질적 대상, 또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몸에 일어나는 고통의 지점을 따로 따로 구별하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에서 정신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으로,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오직 물질의 몸과 아는 마음만이 있을뿐 이 두가지외에는 살아있는 본체나 실체 따위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따위를 알아차리는 동안 집중의 힘이 더욱더 커짐에따라 수행자는
감촉을 느끼는 물질의 몸(身)이 있기때문에 감촉(觸)한다는 것을,
눈[慧眼]과 형상(色)이 있기 때문에 본다는 것을,
귀(耳)와 소리(聲)가 있기 때문에 듣는다는 것을,
구부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구부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일어나는 대로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본성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좋아함이 일어나고 이 좋아함때문에 취착(upādāna)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수행자는 취착을 일으켰기 때문에 몸으로 행하거나
입으로 말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행위가 선한것이면 좋은 과보를,
그 행위가 불선한 것이었으면 불선한 과보를 만듭니다.
이러한 식으로 수행자는 과거에 얻었던 바라밀(pāramī)의 한도까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이것이 또한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봄, 들음, 생각함, 뻣뻣함, 열, 통증따위를 알아차리는 동안
집중의 힘이 더욱더 강해짐에 따라 수행자는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각 현상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구별할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는 모든 현상은 무상한 것으로 일어났다가는 곧이어 사라질뿐이라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무시무시한 괴로움이며
누구의 통제와 의지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도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집중의 힘이 더욱 더 커 나가게 되면 설령 수행자가 일어남, 꺼짐, 앉음, 구부림, 뻗음, 고개를 듬, 앞으로 나아감, 발을 내려놓음 등의 행동들을 알아차리더라도 그는 더 이상 몸, 배, 팔다리와 같은 다양한 모양이나 형태로 대상들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오로지 신속하게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만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의 대상의 재빠른 사라짐과 알아차리는 마음을 알고 무상· 고· 무아라는 진정한 본성을 또렷히 깨닫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대상은 나타나는 시점에서 곧 사라지기 때문에 집착할 자아(atta)는 없습니다. 아는 마음(식)도 그렇게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집착할 자아가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것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본성을 꿰뚫는 지혜가 개발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가 생겨서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正見)가 개발되는 단계에 이르는 시점부터 있는 그대로를 아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사유(正思惟)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바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바른 집중(正定)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바른 알아차림(正念)이 연관지어져 있습니다. 이 오랫동안 수행자는 몸의 자세(身), 느낌(受), 마음(心)과 마음의 대상(法)의 사념처(四念處)중 하나에 매진합니다. 수행자는 노력을 해서 관찰을 하기 때문에 바른 정진(正精進)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명상에 매진할때는 정(定)의 도에서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삼매(正定), 바른 알아차림(正念)의 세가지와 혜(慧)의 도에서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사유(正思惟)의 두가지로 구성된 다섯가지 도가 관련됩니다. 이 다섯가지 도는 주의깊은 알아차림과 아는 각 행위와 관련됩니다. 주석서는 이를 일컬어 행위자의 도(karaka-magga)라고 합니다. 게다가 계를 훼손되지 않게 잘 지키고 절제(virati)를 완성함으로써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定業), 바른 생계(正命)와 같은 세가지 계(戒)의 도 관련이 됩니다.
이는 그러한 계· 정· 혜의 세가지 도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명상을 시작하기전부터도 계를 지키기 시작하여 계를 청정하게 보호합니다. 명상을 닦는 동안 계는 더렵혀지지 않고 그 청정함이 유지됩니다. 오히려 계는 더욱 더 청정해진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정(定)의 도와 혜(慧)의 도에 세가지 계(戒)의 도를 더하여, 수행자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아는 각 순간마다 팔정도를 함께 닦습니다. 『중부(中部)』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의「대육처경(大六處經 Maha Salāyatanika Sutta)」(M149)은 어떻게 팔정도를 닦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알아차리는 순간) 눈[慧眼]이 있는 그대로 보일때, 눈의 접촉으로 인해 일어나는 형상(色), 눈의 식(眼識), 시각접촉, 느낌이 있는 그대로 보일때에는 눈[慧眼], 형상(色), 눈의 식(眼識)등에 좋아함이 일어나지 않는다. 눈[慧眼]과 형상(色)등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눈과 형상(色)등에 좋아함과 취착(upādāna)이 일어나지 않고 그들의 혐오스러움을 보게되면 (알아차리지 못하여 일어났었을) 오취온(五取蘊)은 형태를 드러낼 기회를 넘보지 못하고 이들 대상에 대한 갈애도 소멸되고 사라진다.”
“그러한 사람의 견해가 바른 견해(正見)이다. 그의 생각이 바른 사유(正思惟)이다. 그의 노력이 바른 정진(正精進)이다. 그의 알아차림이 바른 알아차림(正念)이다.그의 집중이 바른 삼매(正定)이다. 수행자는 명상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를 잘 확립하였다. 이렇게 수행자는 팔정도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수행자가 보는 순간 알아차려야 하는 눈[慧眼], 형상(色)등의 연관된 다섯가지 법들의 진정한 본성을 구별할 때 팔정도를 어떻게 닦는 가에 대한 간략한 부처님 말씀입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보기 위해서는 『중부(中部)』〈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의「대육처경(大六處經 Maha Salāyatanika Sutta)」(M149)을 참고하면 될것입니다.
주석서는 성스러운 도를 이루는 순간 팔정도가 확립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잘된 해석으로 여겨지만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위빠사나 도를 이루어서 성취되는 목표인 성스러운 도가 아니라 위빠사나 도라는 견해를 취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해석은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만 눈[慧眼], 형상(色), 눈의 식(眼識), 형상의 접촉(觸)과 느낌(受)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혜가 얻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수 있을것입니다.반면에 성스러운 도는 눈[慧眼],형상(色)등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아는 기능만을 완수합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알아차림으로써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각각의 순간에 뚜렷해지는 다섯가지 법을 알게되고 이에 따라 팔정도를 닦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바는 위빠사나 명상을 닦을 때 청정하게 계를 수지해서 계의 도를 결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9.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자제해야 할 것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정신과 물질 대상들과 결부된 거짓말같은 그릇된 말을 할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사라짐뒤에 무상과 소멸의 참 본성을 보게되어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는 한 대상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과 관련하여 중상하고 허튼소리를 할 기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생하고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그릇된 생계에 종사하는것과 같은 그릇된 행동을 저지를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동안 실체를 보게 될때마다 대상과 관련하여 그릇된 말(miccha-vācā)을 삼가하는 바른 말(正語), 그릇된 행위(miccha-kammanta)을 삼가하는 바른 행위(正業), 그릇된 생계(miccha-ājiva)를 삼가하는 바른 생계(正命)가 고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삼가함으로써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라는 계의 도가 바른 견해(正見)의 도를 닦는데 연관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생각함, 뻣뻣한 느낌, 뜨거운 느낌, 통증, 들음, 봄등을 알아차리는 매 시기마다 바른 견해(正見)가 팔정도와 함께 개발됩니다. 사제(四諦)가운데 고제(苦諦)는 올바르게 잘 이해해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고제(苦諦)는 보고 듣고 감촉하고 알고 하는 등의 각 단계에서 감각의 육문(六門)에서 분명해지는 오취온(五取蘊)입니다. 그래서 고제(苦諦)는 육문(六門)에서 벌어지는 각 현상을 알아차림으로써 바르게 잘 이해될것입니다. 보고 들음을 알아차려서 고제(苦諦)가 개발되는 순간마다 닦아야 할 법(dhamma)인 팔정도가 닦아집니다.
그래서, 보고 들음을 알아차려서 고제(苦諦)를 관찰하게되면 팔정도가 닦아집니다. 그러니까 팔정도를 닦기 위해서는 보고 들음을 알아차려서 고제(苦諦)를 관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인 위빠사나 명상을 닦는 동안 보고 들음을 알아차려서 분명해지는 고제(苦諦)가 반드시 바르게 잘 이해해야 하는 대상(ārammaṇa)이고 고제(苦諦)를 이해하기 위해 꼭 닦아야 하는 도제(道諦)가 주체(ārammaṇika)입니다.
고제(苦諦)를 관찰해야만 팔정도가 닦아지고 위빠사나 도가 완성될때에야 비로소 열반이 증득될수 있음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제(苦諦)가 대상(ārammaṇa)이고 도제(道諦)가 도를 닦는 주체(ārammaṇika)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물질(rūpa), 정신(nāma),상카라(saṅkhāra)와 같은 괴로움의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만을 인지하는 것으로 귀결될뿐이기 때문에 평화와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열반을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교법(sāsana)의 번창에 해악을 끼치는 주장이 나돌기 때문에 이러한 부언이 필요한 것입니다.
10. 위빠사나 지혜로 얻는 사성제의 지혜
육문(六門)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려서 그 현상들은 단지 무상· 고· 무아임을 아는 것이 고제(苦諦)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고제(苦諦)를 통달하는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이 완수됩니다.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본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대상에 좋아함이나 갈애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집제(集諦)인 갈애의 일시적 소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매 순간마다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의 통찰지는 대상을 관찰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제거되고 버려짐을 아는 앎입니다.
갈애가 소멸하면, 갈애의 궤도를 따르는 취착(upādāna), 업(kamma), 상카라(saṅkhāra), 식(識 vinñāṇa),정신과 물질(nāma-rūpa), 다른 말로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14이 더 이상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그들은 억제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로써 일시적인 열반, 소멸(nirodha)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빠사나의 지혜는 성스러운 도로 얻는 것과 비슷하게 일시적 소멸로 개발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는 대상을 직접 관찰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그저 알아차리는 각 시기에서 일시적 소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로 소멸을 깨닫고 소멸을 앎으로써 소멸에 대한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이라 합니다.
위빠사나의 바른견해가 선도하는 팔정도는 관찰하는 모든 행위를 통해 내면에서 닦아집니다. 이것을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을 증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수행의 통찰지도 직접적인 관찰로는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려깊은 고찰로 수행이 내면에 일어났음을 알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한것처럼 알아차리고 아는 순간마다 고제(苦諦)를 바르게 잘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통달지의 꿰뚫음(parinñāṇa-paṭiveda)입니다. 집제(集諦)는 일시적으로 억제됩니다.이것을 일컬어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이라고 합니다. 일시적 소멸은 소멸로 얻어지는데 이를 소멸에 대한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이라 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도가 닦아집니다.이것이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매 순간 사성제(四聖諦)가 이해됩니다.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고제(苦諦)가, 버림(pahāna)을 통해 집제(集諦)가, 실현을 통해 멸제(滅諦)가 수행을 통해 도제(道諦)가 각각 완성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위빠사나 도로 사성제(四聖諦)를 이해해야 할 대로 이해하고 사성제(四聖諦)가 완성되고 성숙되면 성스러운 도가 일어나서 열반이 증득됩니다. 도가 생겨나는 순간, 바른 견해(正見)가 선도하는 성스러운 도가 완전히 확립됩니다.성스러운 도는 단 한번만 나타납니다. 이 단 한번의 출현으로 소멸해야할 번뇌인 집제(集諦)가 없어지고, 고제(苦諦)를 바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도제(道諦)를 닦는 임무가 완수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성스러운 도의 바른 견해(正見)로 사성제(四聖諦)를 모두 한꺼번에 이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11. 어떻게 성스러운 도를 통해 사성제를 다 이해하는가
이것이 성스러운 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나타냅니다. 열반의 평화인 멸제(滅諦)가 실제적인 깨달음으로 이해가 되면 쉴새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세간적인 정신(nāma), 물질(rūpa) 상카라(saṅkhāra)는 참으로 괴로움이라고 알게 되어 고제(苦諦)를 이해하는 과업이 완수됩니다. 정신(nāma), 물질(rūpa) 상카라(saṅkhāra) 이들은 그저 괴로움이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게되어 이들에 대해 좋아함, 갈애(taṇhā), 취착이 있을수 없게 됩니다.
갈애의 버림(pahāna)은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도(예류도)를 얻음으로써 악처(apāya)에 이르는 갈애와 선처(sugati)에서 일곱 번 이상 재생을 일으키는 갈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두 번째 도(일래도)를 얻음으로써 욕계선처(kāmā-sugati)에서 두 번이상 재생을 일으키는 거친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갈애가 제거됩니다. 세 번째 도(불환도)에서는 미세한 형태의 욕망과 갈애가 제거됩니다. 네번째 도(아라한도)에서는 색계의 욕망(rūpa-rāga), 무색계의 욕망(arūpa-rāga), 즉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불환과에 이른 사람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인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음은 버림(pahāna)을 통해 이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들과 관련하여서는 그것들을 스스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수행(bhāvanā)으로 이해가 완수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XII.92)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괴로움(苦 dukkha), 일어남(集 samudaya), 도(道 magga)의 세가지 진리에 대한 이해는 각각 통달지(pariñña), 버림(pahāna), 수행(bhāvanā)으로 완수된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성스러운 도의 지혜는 멸제(滅諦)를 앎으로써 멸제(滅諦)를깨닫고, 나머지 고제(苦諦),집제(集諦), 도제(道諦)를 이해하게 되는 과업을 완수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의 지혜도 고제(苦諦)를 관찰하고 앎으로써 나머지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또한 이해하게 되는 과업을 완수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돕는 주(注)로 요약을 합니다.
1. 도를 통하여 사성제(四聖諦)중 하나를 보게 될때
2. 사성제(四聖諦) 모두를 이해하게 된다. (사성제에 대한 꿰뚫는 통찰이 확립된다)
고제(苦諦)를 관찰하고 아는 것으로 발전되는 위빠사나 도가 충분히 강력해지면 팔정도가 확립이 되어서 열반의 요소(涅槃界 nibbana-dhātu)로 돌진해 들어가 거기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상카라의 대상들과 관련된 모든 괴로움과 아는 마음(식)의 상카라와 관련된 모든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1. 갈애의 소멸로 괴로움의 소멸이 일어난다.
2. 진정한 도는 이 소멸을 실현한다.
갈애가 소멸하면 오온(五蘊)의 모든 괴로움도 함께 소멸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가 확립되는 순간 관찰의 대상은 갈애의 소멸이 아닌 오온(五蘊)의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갈애의 소멸에 대한’가르침에서 가르치신 것은‘ 상카라의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는 오직 ‘상카라의 모든 괴로움의 소멸’만이 멸제(滅諦)인 진정한 열반을 이루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열반은 모든 상카라의 소멸로 정의되었습니다.그래서 모든 정신(nāma), 물질(rūpa), 상카라(saṅkhāra)가 존재하기를 그치고 소멸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측면에서 성스러운 도의 확립이 분명해집니다.
12. 위빠사나는 소멸에 이르는 도의 구성 요소
성스러운 도는 모든 상카라의 소멸로 이르기 때문에‘dukkha nirodha gamini patipada ariya saccā,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긴 제목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도없이 단독으로는 모든 괴로움이 종식된 열반을 얻을수 없습니다. 자신의 과거 바라밀(pāramī)에 따라 많은 시간, 많은 날, 많은 달 동안 수없이 위빠사나의 추진력(탄력)을 받아 위빠사나를 닦고 나서야만 마치 위빠사나 도 자체에서 나온듯이 그렇게 성스러운 도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빠사나 도가 궁극적인 목표로 여겨야 되는 성스러운 도의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라 하는 것입니다.비록 도가 선구자와 궁극적인 목표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더라도 하나의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으로 도를 닦습니다.
그래서「분별론(分別論 Vibhanga)」의 주석서인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는 위빠사나 도는 소멸에 이르는 도(nirodha-gamini- patipada)의 기본 각지로 여겨야 한다고 합니다.
“상술(上述)한 여덟가지 도는 여덟가지 각지로 된 출세간의 성스러운 도이다. 이 성스러운 도와 세간적인 위빠사나 도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dukkha-nirodha-gamini-patipada)를 구성하는 것으로 열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사성제(四聖諦)의 도제(道諦)가 출세간의 도이지만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라 하는 위빠사나 도없이 단독으로는 생겨날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도를 닦아 위빠사나의 지혜가 완전히 이루어질때만이 비로소 성스러운 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와 그 선도자로 초보적인 단계로 닦아야 하는 위빠사나 도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dukkha-nirodhagamini-patipada)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1. 근본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가 세가지 거룩한 도이다.
2. 이 세가지 거룩한 도를 닦아서 열반을 곧바로 증득한다.
우리는 도제(道諦)를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만 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들 모두가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인 위빠사나 도와 도제(道諦)인 성스러운 도를 닦아서 멸제(滅諦)인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역주(譯註) :
1. 따자웅몬(Tazaungmon)은 양력 11월에 해당한다.
2. 「경집(sutta-nipata)」의 주석서는 이 식(識)를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으로 설명하고 있다.
3. 이는 비구 수행자는 위빠사나 명상을 닦을때 세간의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만 관찰하고
명상의 적합한 대상이 아닌 출세간의 진리인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출세간의 진리인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명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주석서는 이러한 출세간의 진리는 범부들이 이해할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4. 종성(種姓 gotrabhū)이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 또는 열반으로 전향하는
첫 번째 마음이다. 즉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예류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종성(種姓 gotrabhū)이라고 부른다,
선(禪)의 증득의 경우에 이것은 욕계의 '범부 혈통'에 속하는 마음들을 극복하고 드디어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종성(種姓 gotrabhū)이라는 이름을 얻고 첫 번째 도인 예류도(預流道)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는 이름을 얻는다.그리고 이 순간의 마음을 종성의 지혜(gotrabhū-ñāṇa)라 한다.
또 이 종성의 지혜는 수행자의 지혜가 도(magga)를 얻을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도 한다.
5. 「청정도론」(Vis.XXXⅡ.92)과 같은 주석서들에서는
사성제(四聖諦)를 철견하는 것을 이렇게 관통(abhisamaya)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통달지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관통한다.
버림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관통한다.
도 닦음을 관통하여 도를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무엇을 말했는가?
소멸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진리들에 이르고, 보고, 통찰한다.”
<참고> 「청정도론」(Vis.XVI.84)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지혜(sacca-ñāṇa)는 두가지로
① 수각지(隨覺智 anubodha-ñāṇa)와
② 관통지(貫通智 paṭivedha-ñāṇa)가 있다.
"수각지(隨覺智)는
세간적인 것으로 남에게 들음등을 통해서 소멸과 도에 대해 일어난다.
관통지(貫通智)는
출세간적인 것으로 소멸을 대상으로 삼고서 역할에 따라 네가지 진리를 통찰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도 본다.(S.v.437)' "
6.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후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었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王舍城)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2대 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뿟따와 마하 목갈라나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띳사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사문은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였다.
우빠띳사는 이 거룩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법(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앗사지 존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우빠띳사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앗사지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게송을 한 수 읊었다.
그것이 바로 위의 게송이다. 우빠띳사는 이 게송을 듣자 마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yamkiñci samudaya dhammam sabbam tam nirodha dhammam)’
임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예류과를 성취했다.『율장』〈대품〉에 나오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ṃ vādi mahā samano (Vin.i.40)
7. 상좌부 불교에서는
법(Dhamma)을
교학(pariyatti),
수행(patipatti),
통찰(pat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patipatti)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통찰(pat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움은 수행의,
도수행은 통찰의 토대가 된다.
교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수행은
성위를 증득하는 돌파구가 되기 때문이다.
8.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ṇhāsankhaya Sutta)」의 관련 경문은 다음과 같다.
"간략하게 말해서 어떻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신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되는가?
신들의 왕, 제석천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
만약 비구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곧바로 아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곧바로 알아서,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나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
그는 이러한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함을 관찰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며,
소멸을 관찰하며,
보내 버림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태어나는 일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안다.
신들의 왕, 제석천이여, 간략하게 말해서 이렇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신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된다.”(M37)
9.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로 번역한 수따마야냐나(suta-maya-ñāṇa)는 suta(聞, 들음)+maya(만들어진, 이루어진)+ñāṇa(지혜)로 분해된다. 그리고 suta는 √suṇāti(to hear)의 과거분사로 쓰였다. 여기서 이 suṇāti의 의미를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냥‘들었다’로 이해하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등 고대 인도의 전통에서는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듣는다는 의미 이상으로 배웠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모든 가르침은 문자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승의 입에서 제자들에게로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로 빠알리 경전에서 다문(多聞)의 의미로 많이 나타나는 바후수따(bahussuta)는
영어로도‘very learned’라고 번역되듯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보다는 많이 배워 지식과 학문과 수행과 인격이 고상하다는 뜻이다.
10. 「청정도론」(Vis.XX.3)에 따르면 세가지의 통달지(pariñña)가 있다.
통달지의 영역은 full comprehension.
① 안것의 통달지(知邊知 nata-pariñña):
물질은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성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통찰지이다.
② 조사의 통달지(審察邊知 tirana-pariñña):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빠사나의 통찰지이다.
③ 버림의 통달지(斷邊知 pahana-pariñña):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빠사나의 통찰지이다.
11. 쭐라빤타까(Cula-pantaka)비구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상인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인과 눈이 맞아서 라자가하를 도망나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형은 마하빤따까(Mahā-panthaka)라고 불렸다. 두 형제는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jātattā) 빤따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하인이 도망다니면서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것이다. 그는 후에 형과 함께 외갓집에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그의 형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을 뵈러 다녔기 때문에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도 형의 권유로 출가하여 형이 준 게송(A.iii.239)을 넉달이나 외웠으나 외울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형은 그를 쫒아내려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천 조각을 주시면서 ‘먼지 닦기(rajo-haraṇ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셨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무애해와 육신통을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12. 45자모(字母)로 구성된 게송은『증지부(增支部)』(A.iii.239)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의 연꽃이
아침에 향내음을 풍기면서 피듯이
멀리 빛을 드리우신 부처님을 보라.
마치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구나.”
(A.iii.239)
13. 『장부(長部)』「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D2)에 나오는 관련 경문은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깨끗하고 최상품인 유리 보석이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으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 손에 놓고서‘ 이 유리보석은 깨끗하고 최상품이며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는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구나.’라고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번뇌가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때
지와 견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14.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은 존재들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이다.
무명으로 눈멀고 갈애로 인해 내몰려서 사람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회전은 또 다른 번뇌의 회전을 낳는다. 이와 같이 세가지 회전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때까지 쉼없이 계속 돌아간다.「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상카라(行)들과 존재(有)는 업(業)의 회전이고,
무명과 갈애와 취착은 번뇌의 회전이고,
식(識), 정신과 물질(名色), 여섯가지 감각장소(六處),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과보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