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의 일본선교 비망록 - 9 - 일본에서 들려오는 소식
찬 바람을 맞아가면서도 학원 언저리에 붙어 있었으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여건은 회복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2013년 어느 날 부모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것은 본래 다카사키 시에 있던 교회 건물도 매각하고 은행융자도 얻어서, 군마현 이카호 쪽에 있는 미술관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경매로 낙찰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폐관되기 전에 이 곳은 미술관으로 운영되어 왔었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방도시 시골에 왜 이처럼 큰 미술관이 세워졌을까. 그것은 여기에 이카호 온천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군마현에는 대표적인 온천 중 하나가 쿠사츠와 이카호 온천인데, 쿠사츠 온천은 규모에서 본다면 이카호 보다 두 배 가량이 되지만, 일본 수도 도쿄에서 본다면 쿠사츠에 비해 이카호가 훨씬 가깝다는 이점이 있다.
이카호로 오는 온천관광객은 물론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관광버스도 상당히 많이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버스로 와서 단순히 온천만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관광상품도 개발할 필요가 있기에 이카호 온전 주변만 보더라도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즐비하다. 시스티나 미술관도 바로 이와 같은 고객을 위해 세워진 관광지 중 하나인 셈이다.
이 미술관이 개관한 것은 1995년. 전시되었던 작품은 명화라기보다는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 ‘트릭 아트’라고 불리는 그림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점으로 보아 이미 일본의 경제는 하락세를 면치못하고 있었고 이 불황의 여파로 인하여 결국 몇 차례 휴관을 거쳐 결국 완전히 2011년 완전히 문을 닫게 되고 2년 후인 2013년에 매입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에 대하여 나는 너무도 무감각했다. 나는 일본을 떠나온 지 20년 이상이 흘렀고, 반면 부모님은 일본 영주권자이다. 스스로 원해서 일본을 선택하셨으나, 비록 일본어를 가르치고는 있어도 나는 일본에서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욕심이 없었다. 내가 도와드릴 수는 없어도 두 분이 일본에서 살아가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고 두 분의 인생은 두 분의 인생이다.
2013년 9월에 창립예배를 드렸다고 하기에 마침 10월에 잠시 시간이 나서 방문을 한 적이 있다. 건물은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을 3/5 크기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 내부도 미켈란젤로의 프로스코 작품이 가득하다. 위를 바라보면 아담의 창조를 비롯한 천장화가 가득하고, 뒤쪽 벽면에는 역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다. 일본에서 이처럼 시스티나 성당 내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은 도쿠시마 현에 있는 오츠카 미술관과 이곳 뿐이라고 한다.
당시 교인 수는 10명이 조금 안 되는 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카사키 시에 있을 때에는 어림 잡아 30명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굳이 거금을 들여 이곳으로 옮겨 오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사연이 있었던 것 같긴 하나 그리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건물을 인수하게 된 것은 결정적인 오산이었다.
첫번째 위기는 재산세였다. 부모님에 의하면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납부해야 하는 재산세가 매월 30만엔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감당이 안 된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김치라도 팔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 같은데 그야말로 주먹구구이다. 가만히 있으면 관광버스가 들어와서 손님들이 시스티나 벽화를 보고는 김치를 사갈 것이라는 판단 자체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다행이 이는 종교법인화가 됨으로 인하여 면세조치를 받게 된다.
둘째는 거리적인 문제이다. 다카사키는 군마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고 한국인들도 많기에 접근성이 좋은 반면, 시스티나 미술관이 위치한 곳은 다카사키 중심가에서 승용차로 30~40분은 걸리는 거리이다. 이미 지명도가 상당한 교회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오는 교인들이 많겠으나 우리 교회는 그 정도 수준이 못된다.
셋째는 인구감소 문제이다. 그야말로 고도경제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70년대~80년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으로 오고 싶어하는 한국사람들로 넘쳐났었으나, 이미 21세기에는 한국인 인구가 감소 추세이다. 그나마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으나 도쿄와 인접하지도 않은 군마현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상황은 현저하다.
가령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당연히 시스티나 미술관 매입을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군마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무했으며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부모님의 재산운용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2014년 경, 아버지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다. 일본으로 와서 도와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만약 당시 학원에서의 상황이 안정적이었다면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회복기미를 보이던 것도 잠시, 내 상황은 또다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 상황을 모두 알던 학원 교수부장과 마지막 상의를 했다. 어떻게든 학원에서 버텨보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신학을 시작하고 일본으로 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나서 교수부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어쩌면 능력시험 N2 자리가 하나 비어 있을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통화를 해보았더니 불과 얼마 전에 그 자리가 채워졌다고 한다.
민수기 22장에는 상황이 급박하자 나귀가 입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혀 신앙이 없는 교수부장이 말한다.
“홍 선생님, 일본으로 가세요. 어차피 당신은 사람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믿는 성경에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한다는 말이 있다면서요. 목사가 되십시오.”
나귀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