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
논리적 해설이 의미하는 바는
불경을 대별하여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으로 나눈다. 이 중에서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논은 그 말씀에 대한 해설이다.
가전연 존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탁월한 논리적 분석력으로 간명하게 설한 부처님 말씀에 살을 보태고 피가 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논의제일(論義第一) 또는 분별제일(分別第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더불어 말을 하는 데는 논리적 구사는 필수적이므로 설법제일이었던 부루나 존자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굳이 설법제일인 부루나와 논의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이렇다.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한 사문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가전연은 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전연 존자의 산스크리트 명은 마하카차야나(Mahakatyana)로서 대가전연 또는 마하가전연으로 한역되었다. 그는 16대국 중 하나인 서인도 아반티(Avanti) 국의 수도인 웃제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크샤트리야 계급으로서 아버지는 아반티 국의 국왕인 악생왕(惡生王)을 보필하는 재상[보좌관]이었다고 한다.
'장로게주(長老揭註)'에 의하면 그는 악생왕의 명을 받아 부처님을 아반티 국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갔다가 부처님을 뵙자마자 그 인격에 감복되어 그대로 출가하여 왕을 불교에 귀의시키고 이어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킨다.
웃제니는 마가다 국에서 보았을 때 아주 먼 변방이다. 어느 정도 변방이었냐 하면 원래는 비구가 10명 이상 무리를 지을 때라야만 구족계(具足戒)를 주었는데, 이곳에서는 5명만 모여도 계를 줄 정도였다. 그렇다면 가전연은 자신의 고향인 변방에 가서 정확하게 부처님 말씀을 파악해서 전해 주려고 정확한 논리 훈련에 열과 성을 다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법제일인 부루나도 변방 출신임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설득력있는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본행집경'에서는 가전연의 출신 계급이 크샤트리야가 아닌 브라만이며 부처님 성도 후 12~13년 지난 시절, 베나레스에서 출가하였다고 말한다. 그 사연은 이렇다. 그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서기 전에 외숙인 아시타 선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웃제니 성(城) 부근의 빈드야(Vindhya) 산에서 수도한 결과, 사선(四禪)과 오신통(五神通)을 얻고 산을 내려왔는데, 어느날 그가 베나레스 외각에서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거주하고 있을 때 부처님을 만나 뵙고 사문의 길을 가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아무튼 그는 총명한 머리로 명석 판명한 논리를 구사하여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는 데 걸림이 없었다. 사실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논리가 발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에 버금가는 오단 논법(전문 용어로는 五支作法이라 한다)을 탄생시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도구로 삼아 왔다. 그것을 인명론(因明論)이라 한다. 아마 그는 인명론을 충실하게 학습한 결과 논리적 기반을 공고히 다졌을 것이다.
그래서 증일아함(제2 '지품(智品)')에서는 "뜻을 분별하여 진리를 펴는 데는 가전연 비구가 으뜸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같은 경전 제3 '제자품'에서는 그를 지칭하여 이렇게 말하다.
"비구들아, 마땅히 알라. 나의 이 성문 대중 가운데 민첩하게 뜻을 취하고 많이 들어도 총민하기 때문에 모두 깨달으며 조금만 듣더라도 남을 위해 널리 분별해서 설하는 데 으뜸이 사람은 바로 대가전연 비구이니라."
바로 가전연 존자가 언어를 분석하여 해설하는 데 있어 많은 분량의 내용을 듣더라도 그것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을 뿐더러, 설명이 거의 없다시피한 압축된 내용도 그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파악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구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아함 제28 '밀환유경(密丸喩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법을 설하시면 마하가전연은 그 법의(法義)를 잘 분별하였으므로 부처님의 칭찬을 받았다."
"세존이 약설하신 설법을 비구들의 요청으로 광설(廣說)하였다."(증지부 경전)
어째서 그는 논사(論師)로 불리었는가
가전연 존자가 뛰어난 논리력을 구사하여 긴 것은 짧게, 짧은 것은 길게 자유자재로 부처님 말씀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하자 후기의 불교학파에서는 그를 뛰어난 논을 지은 논사(論師)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그의 위치를 비약시킨 결과로 그것은 시대상 맞지 않는 설정이다.
즉 부파불교의 핵을 이루는 아비달마 논사들이 가전연을 자파로 수용한 결과 그러한 시대와 일치되지 않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에서는 자파의 근본 녹장인 육족론(六足論) 중 '시설족론(施設足論)'이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으며, '부집이론소(部執異論疏)'에서는 "대가전연은 부처님 재세 중에 논을 지어 분별하고 해설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심지어 용수(龍樹)의 저작으로 알려진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에서는 그를 일러 말하길,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여 '비륵(毗勒)'이라는 논서를 지었다 한다.
이 책은 비유비공(非有非空)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역유역공(亦有亦空)의 도리를 설한 논서다. 유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을 천명하다가 다시 그 유와 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그 지점에 집착한 결과 그러한 집착마저 떠나라는 역유역공의 논리를 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대지도론' 권5에서는 '지도론(指導論)', '장론석(藏論釋)' 등의 논서들이 가전연의 작품으로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렇게 부풀어진 그에 대한 설명 속에서 우리는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데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부처님의 소중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가전연은 빈틈없는 논리를 바탕으로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탁월한 변재를 구사하여 중생 교화에 힘쓴다. 그는 뛰어난 포교사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먹을 것마저도 구하기 힘든 악조건으로 부처님도 꺼려했던 마두라로 포교의 길을 떠난다. 그곳 한 숲에서 가전연은 국왕 아반티풋타를 만나 사성(四姓)의 무차별을 설득력 있게 구사한다.
국왕이 묻는다.
"브라만은 스스로가 제일이고 다른 사람은 비열하다 하며, 브라만은 청정한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것은 말로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업에 의한 것입니다."
왕은 이해가 안 가는 듯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묻는다.
"당신이 브라만으로서 왕이 되어 여러 계급의 사람들을 권력으로 다스리면 시키는 대로 말을 듣습니까?"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계급의 왕이 되어 시키면 백성들은 그 말을 들을까요?"
"듣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계급의 사람이 왕이 되더라도 모두 왕의 말을 듣는다면 네 가지 종성은 다 평등한 것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또 브라만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왕은 벌을 줄 것이며 그를 도둑놈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은 차별이 없으며 평등한 것입니다. 바라문이 제일이요, 청정하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업에 의한 것입니다."(잡아함 권 제20)
그야말로 기막힌 수사법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 언변으로 인도 내 많은 지역을 불법으로 교화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호근 교수는 "사리불과 목건련의 입멸, 그리고 뒤이은 부처님의 입멸은 교단 내의 가전연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