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이 바닥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지성인이 있는줄 알았다. 환상은 깨졌다. 지구에 와서 유감스러운 것은 생각하는 인간 하나를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멀쩡하게 세상이 돌아가는게 신기하다.
옛날에는 생각하는 인간이 더러 있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겠는가 말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생각을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1만년 인류의 역사에서 유일한 성취는 갈릴레이의 관성이다.
나머지는 다 부스러기다. 혹은 묻어가는 것이다. 아니면 개소리다. 종교를 믿고 미신을 믿는 인간이 99퍼센트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이념을 믿고 무신론을 믿는데 이것도 일종의 회피기동이다. 그들은 지식인 집단의 세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관성이 인류의 유일한 성취다. 관성은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관성은 상태의 변화에 저항한다. 상태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건드려야 관성이 드러난다. 관성은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같다. 알수 없는 미지수 X다.
인류가 1만년 동안 생각해서 알아낸게 모른다는 것이다. 구조론은 관성을 해명한다. 왜 상태의 변화에 저항하는가? 내부에 숨은 밸런스가 복원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관성은 객체 내부에 밸런스가 있고 축이 있고 자체 질서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먼저 객체의 관성을 죽여야 한다. 철사를 휘어봤자 원위치 된다. 고무줄 당겨봤자 원래대로 돌아간다. 스프링의 탄성을 제거해야 고분고분해진다. 특히 좌파가 실패하는 이유다. 관성을 제거하지 않았잖아.
PC열풍이든 LGBT든 관성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이준석은 국힘당의 관성을 죽이지 않았다가 팽을 당했다. 해리스는 관성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트럼프에 깨졌다. 관성을 제거하려면 밖으로 문을 열어 열린사회로 가야 한다.
닫힌사회는 절대 관성이 제거되지 않는다. 열린사회에 머무르기만 해도 곤란하다. 관성을 제거하려면 열린사회에서 닫힌사회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맷돌에 콩을 집어넣고 손잡이를 돌려 내부를 압박해야 한다. 그래야 두부가 만들어진다.
좌파는 콩만 집어넣고 손잡이를 돌리지 않아서 망하고 우파는 콩도 없는데 맷돌만 돌리다가 망한다. 적절한 방향전환이 사회를 바꾼다.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것이다. 종교를 믿고 미신을 믿는 99퍼센트는 문을 닫아걸고 대화를 포기한 자다.
그나마 대화가 되는 1퍼센트는 세력에 의지하므로 세력이 계속 이기고 있는 동안만 합리적이다. 지면 변절하여 진중권 된다. 지지 않는 싸움은 역사의 싸움, 문명의 싸움, 진리의 싸움 뿐이다. 정권획득을 목표로 하면 백 퍼센트 깨지게 된다.
이기는 그룹에 들어서 이기려고 전략적 판단을 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진보는 이기려고 하고 보수는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기려면 대세력작전이고 지지 않으려면 실리바둑이다. 대륙거대화현상은 이기고 섬 왜소화 현상은 지지 않는다.
섬왜소화는 시간을 지연시킬 뿐 결국 진다. 환경변화 때문이다. 지지 않으려고 하므로 지는 것이다.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지는 경우를 무시한다는 거다. 독립군은 99패를 해도 한 번 이기면 독립한다. 지는 싸움은 큰 전쟁의 작은 전투다.
전투에 99번 져도 전쟁에 한 번 이기면 된다.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는 전투에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져주지 않고 이길 수 없다. 결국 싸우지 않게 된다. 보수는 말로만 떠들고 싸우지 않으므로 전투기술을 잊어서 결국 지게 된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빠져야 한다. 생각하게 하려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의 관성에 빠져야 한다. 그것은 이기는 팀에 들어서 집단과 긴밀해지는 것이다. 천하 단위의 큰 싸움판을 벌여야 한다. 작은 전투를 치르면 무조건 지게 된다.
패배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인간이 강해지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군대가 약한 이유는 전투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보의 긍정주의다. 환경변화를 두려워 않는 것이 진보의 열린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