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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비록 노리쇠 작동식이 영국의 SMLE 소총보다 느리긴 했지만 저격용으로는 만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보병이 사용한 SMLE 소총은 군용 소총으로서 조작하기 쉽고 명중률이 높았으며, 참호전에서 이상적인 무기로 간주됐다. 그러나 많은 저격수는 P.14로 잘 알려진 엔필드 ‘No.3 MK.1’ 소총을 더 선호했다.
비슬리소총연구소 제품인 이 P.14 소총은 SMLE보다 총열이 무겁고, 총몸이 강해 저격수에게 알맞은 정확성을 갖춘 무기였다.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지옥과 같았다. 시체와 악취·진흙 수렁·질병 그리고 지루함까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무모한 살상전이 계속되고 동료·전우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저격수용 방탄판을 장착하고 참호에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독일군 저격수들
독일군 저격수들은 군모 표지 위에 두 개의 참나무 잎이 교차된 특별한 모양의 저격수 휘장을 부착하고 있었다. 영국군 장교들은 이런 독일군들의 모습에 공포심을 가졌다. 사냥꾼 출신인 영국군 프리차드 대위는 1915년 5월 프랑스 전선에서 독일군 저격수에 의해 영국군이 ‘심각한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경악했다.
이러한 불행한 경험으로 프리차드 대위는 후일 영국군 저격술의 선구자가 됐다. 그는 ‘프랑스 전선의 저격술’(Sniping in France)이라는 저서에서 자신이 겪은 참호선의 비참한 상황을 밝혔다. “영국군의 정확한 전사자를 세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1915년 초, 적의 저격으로 하루에 1개 대대에서 수십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계속 공격당하자 영국군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졌다. 병사들은 단순히 물적인 피해를 입은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쇼크가 대단히 컸다. ”저격수의 예리한 공격을 당해 참호에서 고통스럽게 죽는 전우를 목격하는 것은 병사들에게 있어 분명히 끔찍한 경험이었다. 1916년 솜므 전투에서 병사의 머리를 관통한 한 발의 사격이 일으킨 공포심과 그 파장에 대해 영국 장교가 전사기록으로 남겼다.
“용감한 영국 병사들도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날 병사들이 참호에서 진지 보수작업을 하려는 참이었다. ‘탕!’ 총소리와 동시에 프랫트 상병이 갑자기 돌처럼 넘어졌다. 그는 전우가 죽은 똑같은 장소에서 관자놀이에 작은 총 구멍이 났고 뒤통수가 깨져서 날아갔다. 프랫트는 가망이 없었다.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고 뇌수가 튀어 나왔지만 아무 의식이 없는 몸은 죽기를 거부하는 것같이 떨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참호에서 가짜 머리를 내밀어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적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면 그쪽으로 포격을 가한다.
참호전에서 저격탄을 맞고 쓰러지는 영국 병사가 비일비재했고 독일군 저격수는 약 400m의 거리에서 6㎝ 정도의 관측구를 관통시키기도 했다. 쌍방이 참호방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적정을 살폈는데 이 관측구를 쏘는 정밀사격이 참호선에서는 꽤 일반적인 일이었다. 최전선에서 누구든지 참호 위로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결국 끔찍한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됐다. 이는 쌍방의 저격수들이 잠시의 틈도 없이 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하여 전문 저격수를 양성했다.
영국군에 합세한 남아프리카군의 저격수 메스벤 중위는 SMLE 소총으로 100명이 넘는 적을 사살하면서 독일군들에게 큰 공포심을 줬다. 하지만 총 18명의 남아프리카 저격수는 오직 6명만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저격수들은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인내심과 지혜, 그리고 남다른 용기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더욱 혼란한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1915년 갈리폴리의 참호에서 포대경을 이용해 저격하고 있는 호주군 저격수와 관측수
출처 : 양대규 전사연구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