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석파괴역학과 하버드 연구년 회고
최성렬 / 기계공학
돌이켜 보면, 전공을 통해 참 좋은 많은 분들을 만났다.
재료가 파손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힘의 능력으로 단위면적당 최대 힘의 세기를 재료강도(强度)라고 말한다. 고체물을 구성하는 원자가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이론적 강도는 매우 큰 값으로 예측이 되지만, 실험결과 값은 훨씬 작다.
이러한 결과에 기반하여, 거시적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미시적으로는 수많은 결함(缺陷)이 고체물에 산재(散在)한다는 연구 결과를 얻게 되었다. 점결함, 선결함, 면결함 등 여러가지 결함을 내재하는 고체물은 결함에 의하여 손상을 가지게 되는 바 손상의 정도가 증가할수록 재료 강도는 취약해진다. 이와 관련된 학문을 미세역학(Micromechanics)이라고 한다. 점결함은 선결함이 되고 또한 면결함인 균열(Crack)로 성장하게 되므로 이들 결함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고, 최종적 결함인 균열은 파손에 핵심적인 원인결함이 되므로 이에 대한 평가가 해석의 주된 관심이 된다.
비록 균열이 고체물에 존재하여도 재료가 파괴되지 않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료의 손상정도를 나타내는 값으로 매개변수(Parameter)라고 불려지는 정보함수를 이론적으로 유도해야 하고 또한 이를 평가하는 정량적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된 학문을 파괴역학(Fracture Mechanics)이라고 한다.
종래의 재료강도 평가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균열이 내재된 상태를 다루는 재료 안정성 평가법으로서 파괴역학(破壞力學)은 이론및 실험해석으로 학문이 발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균열선단 주변의 손상에 대한 엄밀 해석, 전산수치해석, 그리고 실험해석의 세가지 방법이 구축되어, 구조물 건전성 평가에 필수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파괴역학은 파괴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되지 않도록 유지 및 관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해도 될 것이다. 인체도 그렇듯이 재료는 필연적으로 결함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적절히 잘 관리하면 내구성(耐久性)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관점에 따라서는 매력적인 학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구조물의 파단을 평가하는 매개함수가 무엇인지와 그 값을 어떻게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연구자의 화두가 되었는바, 이와 같은 이론적인 해석방법을 해석(解析)파괴역학이라고 한다. 실제로 1960년대에 많은 성과(成果)가 있었다. 이로부터 균열선단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몇몇 함수가 유도되었고, 이런 매개변수(媒介變數)를 이론적, 수치적, 실험적인 방법으로 계산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KAIST에서 엄윤용 교수님을 모시고 역학 계보를 열고
해석파괴역학은 1960년대에서부터 발전하였지만, 국내에서는 1970년 후반에 연구가 시작되었다. 대학원 과정으로 KAIS(현재 KAIST)에 입학하여, 파괴역학 전공으로 부임한 지 2년째인 엄윤용 박사님을 사사(師事)하게 되었다. 지도교수의 권유로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어 전공 학문를 접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지도교수는 당시 몇십년 앞선 나노역학과 미세(微細)역학 학문분야로서 쉼표하나에도 의미를 두고서 교육하는 Brown대학의 ‘위너’라고 발음하는 Jerome H. Weiner 유태계 교수를 사사했다고 한다. 그 분은 당시 한국학생에게는 극소수에게만 장학혜택이 주어지는 초창기 외국인 유학장학금 수혜자였다. 10년 직장생활 급여를 모아도 한 학기 대학원 등록금으로 모자라는 때에 교수로부터 등록금 걱정 없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는 답신(admission)을 얻게 되었다고 당시의 기쁨을 피력(披瀝)하셨다.
나는 파괴역학분야로서는 최고수준 대학에서 정식으로 전공과정을 이수한 분으로부터 전공을 이수하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전공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다. 역학(力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뉴턴에까지 닿지 않을까 싶다. 이 과정에는 복소함수(複素函數)를 기반으로 하고 핵심적이면서도 난해한 5권 정도의 전공서적 내용을 습득해야 하는데, 많은 수강생들이 한계를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시 전공은 다르지만 김문언 교수님의 문인(門人)답게 복소함수 해석에서 남다른 능력을 가진 2년 위의 김경훈 선배와 정재택 동기께 세부 계산방법에 대하여 문의와 토의도 하는 등 이런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복소해석에 대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다소 해석이 난해하고 연구자에 따라서 각기 상반된 3개 결과를 도출 하고서 쟁점이 된 균열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다 명료한 해석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를 기반으로 보다 넓어 보이는 파괴역학분야 학문세계를 경험하고자 마음먹고 필요한 논문도 정리하며 최고 수준의 연구그룹 문을 두드려 보기로 하였다. 이력서 등을 이메일로 보내고서 결과를 기다리는 중 1996년 9월 John W. Hutchinson(1939-) 교수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그간 나름대로 노력도 했지만 지도교수의 교육과 더불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최고 수준 교수로부터 답신을 받았다는 마음에 한동안 힘이 되기도 했다.
허치슨 교수 밑에서 연구년 시작
채비를 준비하여 가족과 함께 1997년 7월에 출국하여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내게 되었다. 초청교수의 연구실은 ‘Pierce Hall, 315’라고 기억된다. 반년은 같은 층의 공동 연구실에 배치되어 생활하게 되었고, 나머지 반년은 재직교수 중 한 분이 타대학으로 이직하게 되어 초청교수의 배려로 초청교수와 인접한 이분의 연구실을 박사후과정 중인 청화(淸華) 대학 출신 중국인 연구원과 함께 두 명이 공동 사용하는 혜택을 얻었다.
Pierce Hall은 붉은 벽돌의 4층 건물로서 철골구조의 투명창 엘리베이터가 별도로 설치되어 접근성과 외부 경관 조망성이 빼어나게 설계되어 있고 하버드 법대 건물과 인접해 있는 공학 및 응용과학부(SEAS) 중심 건물이다. 파이프오르간 음과 분위기에 끌려 채플에 간혹 참석하고 한국전쟁 전사자 이름도 새겨진 하버드 기념교회도 가까이에 있다.
연구실과 학생강의실에는 주로 적청색 계통 카펫이 깔려 있었고 강의실은 다목적 계단형 홀로서 9개 정도의 칠판을 자유롭게 올리고 내리며 판서가 가능할뿐더러 영상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당시로서는 별천지 같았다.
초청교수의 연구실 주변에는 전공분야 최고 교수들의 연구실이 포진(布陣) 되어 있었다. 연구실 맞은 편에는 허치슨 교수의 지도교수인 부디안스키(Bernard Budiansky, 1925-1999), Anthony G. Evans(1942-2009) 교수 연구실과 몇 개의 연구실이 배치되어 있고, Baiba Menke 라고 하는 개인 사무원 실도 있었다. 동 건물에 라이스(James R. Rice) 교수와 Howard A. Stone 교수의 연구실도 배치되어 있었다.
나를 초청한, 존이라고 부르는 허친슨 교수, 부디안스키 교수와 짐 라이스라고 하는 라이스 교수, 이 세 분은 기계공학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미국기계학회 티모센코메달을 수여받은 쟁쟁한 분이기도 하다.
180센티 정도 키의 부디안스키 교수는 제일 연장자 교수로서 주변 교수의 논문이 집필 완료되면 간혹 연구실에서 관련 교수와 무제한 논쟁을 벌이며 학술적 검증과 토의를 즐겨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논점이 소명(疏明)되면 하루 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기분으로 웃으면서 그야말로 학문을 즐기신 분이었는데 애석하게 그다음 해에 작고하셨다.
또, Stone 교수는 연배가 비슷하고 휴일도 잊은 채 연구에 매진하는 분으로 기억되고, 열유체역학 전공으로서 대학원 강의에서 노트를 보지 않고도 비선형 수식을 거침없이 기술하는 분이었고 CALTECH 화공계열에서 가까이 지낸 분이 KAIST에 재직 중이라며 필자에게 자주 말을 걸어오며 배려와 관심을 보였다.
당대에 기라성 같은 여러분을 동일건물에서 뵐 수 있고 또한 돌이켜 보면 연구실과 각종 프로그램과 전산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허락받았으니 큰 혜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연구년 절차를 밟으면서, 주거공간 마련이 여의치 않다고 초청교수에게 언급한 바 있었다. 그런데 출국 즈음에야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되었음에도 그만 그 사실을 잊고서 초청교수에게 알리지 못하는 바람에, 초청교수는 주거공간에 대해 두 번이나 물어보았다. 텁스대학 학위과정 마무리 단계에 있는 지인에게 말했더니 아마도 도와주려고 개인적으로 사전에 잡아둔 공간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개인적 불이익을 감내할 수도 있을 터이니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결과는 모르겠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튼 진솔하고 배려 깊은 분위기에서 한식구가 된 느낌이 들곤 하였다. 매년 학기초에 발간되는 하버드 구성원 안내 책자에 내이름과 연락처가 이미 등재되어 있었고 학문 앞에서 겸손하기가 그지 없어서, 평소에 이를 깨우쳐주시던 고국의 지도교수 말씀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초청자 허치슨 교수의 개인 비서격인 멩케라는 함자의 여사무원은 중년의 젊은 분으로 기억되는데 문서작성 등 여러 연구 보조업무로 점심시간에도 사무실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일을 계속하고 있던, 사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분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생산성 높게 사무일을 해야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간혹 나에 대한 메일이 오면 무슨 좋은 일이 있다는 듯 ‘독토르초이’라고 크게 이름을 부르며 울림이 좋은 목재복도를 따라 종종걸음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와 웃는 얼굴로 메일을 전달해 준 친절한 분이었다. 연구실 방문은 대부분 열려 있었지만 부디안스키 교수실은 닫혀있고 문에는 스모킹주의라는 환기(喚起)성 영어문구를 써서 붙여 둔 듯하다.
쟁쟁한 교수들 밑에서 해석의 문을 열고
사실 허치슨 교수는 고체역학분야의 난해한 이론으로 알려진 비선형 역학 분기거동(分岐擧動) 이론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이 분야에 초보 수준인 필자로서는 핵심강의를 들어 보겠다는 기대를 하고 출국하게 된 면이 컸다. 하지만 그 해는 이와 관련된 강의는 개설되지 않아서 기대 하나는 접어야 했다.
강의는 개설되지 않고 대신에 이 분야 수작(秀作)논문으로서 1975년에 게재된 비선형 분기현상(Bifurcation phenomenon) 문제의 이론 해석 논문인데 허친슨 교수가 원본을 제시하면서 읽어 보기를 제안하였다. 대가(大家)인 Rodeny Hill 및 허친슨 교수의 26쪽 분량 논문이었다. 내용이 매우 압축되어 있고 비선형문제로서 해석이 난해하여 마지막 고비를 넘기가 만만치 않았고 이해의 한계에 부딪혔다.
초기 3개월을 보내는 중에 다만 파괴역학의 대가 반열에 오른 James R. Rice(1940- ) 라고 하는 유태계 교수 개설의 탄성학(彈性學)강의가 개설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분은 파괴역학분야에 큰 획을 그은 분으로서 1968년에 게재된 한편의 논문 피인용 횟수(2025년 현재 피인용 횟수 12159회)가 독보적인 분이다.
또한 난해한 수식을 아예 노트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대학원 전공강의를 소화하는 분으로 정평(定評)이 나있다. 그 당시 자신의 주관심분야는 파괴역학에서 사촌쯤 되는 지진(地震) 역학으로 바뀌어 있었고 단순 청강을 허락받아 몇 차례 수업에 임해보았다.
90분 강의에서 난해한 이론해를 구하는데 자료를 보지 않고 그 많은 수식풀이를 진행하였고 심지어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풀이 절차를 뛰어넘어 중간 과정 결과를 한번씩 요약하며 최종 결과를 도출할 때는 기가 막혔다. 자유자재로 그 길고 난해한 수식을 칠판에 기록하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귀국하고서 라이스 교수 강의를 들어 봤느냐고 해방둥이인 지도교수께서 말씀하면서, 브라운대학 시절에 라이스 교수 강의을 듣고 놀랐다고 언급하였다. 지금까지 이 정도의 수식 암기력을 소유한 분을 만나본 바가 없다.
한편, 허친슨 교수실은 깊이보다 폭이 크고 자주색 카펫이 깔린 볕이 잘 드는 조용한 공간으로 기억된다. 연구 성과물을 요약한 본인의 집필도서 몇 권과 퇴고(推敲)를 거쳐야 할 두루마리 논문 몇 개 꾸러미, 그리고 컴퓨터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이론 전개가 필요할 때는 지우개 달린 황색 일자 연필을 귀에 걸고 다니면서 즉석에서 수식을 유도하며 사용하는 것 같았다. 키는 180센티 정도로서 나와 비슷하고 시력도 좋을뿐더러 걸음도 빠르고 활기찬 웃음을 가진 건강한 분이다.
몇 차례 청강한 바를 회고해 보면 이분 역시 상당한 수준의 암기력을 보이며 수식이 복잡한 대학원 강의도 거의 노트를 보지 않고 기술(記述) 과정이 간결하면서도 수준이 높다고 할 것이다.
건물의 4층이 온통 도서관인데 참고도서가 필요할 시에는 개인비서를 통해서 도서를 대출하여 보며 지우개 달린 일자연필과 수식 필기용 백지 정도가 전부이니 최고 수준이 되면 더 이상 전공도서도 필요하지 않는 모양이다.
비선형 분기문제에 대하여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을 때 허치슨 교수는 대신에 열차단 박막(薄膜)세라믹 코팅재의 박리(剝離) 파괴현상을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문제를 제안하였다. 시간에 쫓기는 잔여기간의 일정이었지만 시간을 아껴서 일했다. 교수는 이론적 계산이 난해한 문제인데도 결과를 수치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깨끗하다면서 만족해 했다. 주위의 교수들이 그러듯이 이분 역시 두 명 정도의 박사과정학생과 한 명 정도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방대한 내용의 연구를 수행하는 듯했다.
연구 결과물을 가지고 짧은 체류기간에도 초고(草稿)를 완성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버드 Report ‘MECH 340(August 1998)’ 와 논문을 남길 수 있었다. 학교 이름도 등재되었다. 무엇보다도 초청자 허치슨 교수와의 관계를 학문적 결과물로 엮게 되어서 연구년의 혜택에 보은하는 기쁨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반년간 실원(室員)이자 라이스 교수의 지도학생으로서 마크(Mark)라고 부르는 M. A. J.Taylor의 도움이 컸다. 192센티미터 훤칠한 키에 지진역학 전공학문은 물론 전산에도 탁월한 실력을 겸비한 대학원생으로서 친하게 되었다. 그는 학위를 받고 내가 귀국할 즈음에 결혼하여 박사 후과정으로 영국 런던으로 직을 옮겼다.
허치슨 교수의 일상
1997년 그해 12월은 나라가 어려운 시기였다. 허치슨 교수는 국가가 부도 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상태임을 알게 되어 경제적으로 어떠냐고 묻기도 하며 걱정하는 눈빛을 보였다.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다만 연구력이 있어 보였는지 계획에 없던 프로젝트에 참여토록 하여 연구에도 기여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교수님의 배려로 몇 달의 연구 보조금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월 2천불 남짓한 정도의 수당을 받는 때라고 기억된다.
허친슨 교수는 봄이 되어 우리 가족 모두를 댁으로 초대하였다. 연구실에서 일킬로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도로변을 따라 이어지는 빌딩건물 중에 하나였다. 우리 가족은 한 다발 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교수님 댁은 3층을 실내 계단으로 터서 사용하는 단독 수직형 콘도미니엄 형태의 주거건물로서, 2층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친절하게 집 구조와 방을 소개해 주시고 3층은 아들 가족이 오면 사용하는 공간이란다. 특이한 것은 꼭 필요한 것만 있는 듯하고, TV도 없고 카세트 라디오와 컴퓨터, 식탁 그리고 간단한 식기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알바 알토가 떠오르게 서재도 간단하고 책상 앞 벽면에 중학교 때 이마를 맞대며 찍은 부자(父子) 액자 흑백사진이 있는 정도로 기억되고 말씀에서 부자간의 정이 두터움을 알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12시가 되면 이웃한 연구실이고 세라믹 재료의 권위자로서 토니라고 불리는 Evans 교수와 같이 조깅을 하고 저녁에 다시 조깅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면서 간혹 터진 입술에서 과중한 연구 집필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지역을 달리하는 분들과 자주 다자간 화상토의를 하고, 또 갑자기 여러 연구진이 밀물처럼 찾아와서 제3의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어느 분이 방문했다는 말씀에서 시간을 아껴 쓰는 분임을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은 전통적인 사고(思考)로 얼굴에 웃음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나를 보고서 먼저 스마일을 유도하곤 했다. 주말에는 2시간 운전하여 큰 바위 얼굴로 유명한 산인 와이트마운틴의 통나무 집에서 장작도 패며 여가를 보낸다고 하셨는데, 당시 부학장직까지 감내하는 힘의 원천이 이것이 아닌가도 싶다.
또 다른 모습으로 6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계단형 세미나실에는 교수중심 강연회가 자주 개최되었는데 주로 여러나라에서 신청하는 연사들인 것 같았고 대화와 분위기에서 품격과 예의가 있었다. 간혹 허친슨 교수는 보스톤 대표 맥주인 ‘사뮤엘 에담스’ 소형 트위스트 캡 맥주를 분위기 전환용으로 한팩 가져오기도 하고, 스톤 교수는 개인적으로 강의실에서 얇은 크러스트 피자 파티와 소규모 프로젝트 모임에서 서서 경청하고 즉석 수식전개 등 여러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다.
예순을 바라보는 연세이고 나보다 18세 연상의 허치슨 교수는 부인께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틈나는 대로 왕복하며 생활한다면서, 오늘은 우리가족이 손님이고 모든 준비를 당신께서 하겠다고 손도 못 대게 하였다. 유럽에도 쌀이 생산된다면서 동양인이라고 배려한 듯 미리 길쭉한 그리이스 쌀로 밥도 지어놓고, 연어구이랑 버터와 소금을 발라 맛을 더해주는 삶은 옥수수 등 마음이 담긴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다. 초등학교 아들은 물론 프리스쿨 딸도 그때의 맛나는 소금버터 옥수수에 대한 추억을 말하곤 한다.
감사해서 우리 가족의 주거 공간으로서 찰스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808 아파트로 이분을 초대해서 한국 음식을 대접해 보기도 했지만 귀국하고서는 자주 안부를 묻지 못했다. 괜찮은 적포도와인을 한 병 챙겨왔다면서 담소하셨다. 아내의 솜씨로 빚은 육전이랑 튀김이랑 한국 음식도 잘 드시고 이분의 뿌리인 영국 아일랜드의 옛날 교통수단인 장거리 여객선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 마크 트웨인 및 호손과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격인 시에라네바다산맥 풍광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대화하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허치슨 교수는 더 준비하여 이어서 같이 연구할 기회를 가지자고 그분이 제안도 했지만 나의 사정이 맞물려서 내려놓게 되었다. 재차 방문연구의 마음도 가져봤지만 나의 준비가 미흡하여 접게 되었고 다만 숲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서 기회가 되면 산골에 통나무집을 한번 만들어 보고 이분을 초청하여 유명 학술기관에 순회 강연회 일정도 잡아보는 등 작은 마음을 품어 보았지만, 또한 준비가 미진하여 이루지 못했다.
몇년전 신종 호흡기 질병인 코로나19가 발생하여 세계가 몸살의 고비를 넘은 즈음 허친슨 교수의 근황이 궁금해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 옛날 일이라서 혹시나 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할 수도 있을뿐더러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레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바로 이메일이 도착하였다. 당연히 기억나고 여러 가지 추억의 일을 언급하기도 하고 연구년 방문기념으로 드린 작은 선물을 지금도 댁 거실에 두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당시 공동작업하여 게재한 논문이 아직도 잘 언급되고 있다는 내용(2025년 현재 피인용 횟수 277)과 공동연구자인 에반스 교수께서 2007년 안타깝게 타계하셨다는 말씀이었다. 혹시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언급하신 모양이다.
허친슨 교수는 2023년까지 research.com을 통하여 집계된 누적 연구를 보면 기계항공분야를 통털어 세계 연구능력순위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2025년 현재는 3위이고 h-index 152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재료분야 연구능력도 두자리 순위이다. 그만큼 연구능력이 탁월하고 체력관리도 잘하여 2023년에도 85세의 연세에 4편의 연구논문을 집필 게재한 분인데 당시에 이런 분과 연구실을 이웃하며 지냈다는 것만도 감격스럽다.
에반스 교수의 이른 타계에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을 메일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분의 업적을 기리는 자서전적인 기고문(寄稿文)을 보내왔다. 구체적으로는 영국왕립학회 회원자격으로서 2022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 전기회고록’에 에반스 교수의 일대기를 허친슨 교수가 집필하여 게재된 17쪽의 회고록(回顧錄)이었다.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에반스 교수가 학자로서 또한 세라믹 재료개발 전문가로서 평생을 헌신하신 그 분야의 큰 별임을 알 수 있었고 두 분간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敦篤)했는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연간 40편 정도 게재된다고 하며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10분 내외의 회고록이 주목받고 있다는데 에반스 회고록도 문체와 내용이 수려하고 충실하였다.
2023년경부터 논문지도 학생은 받지 않지만 집필을 이어가며 명예교수로서 보스턴과 코펜하겐을 내왕하는 듯하다.
2023년 봄날 지리산 쌍계사 주변에서 자생하는 녹차잎을 덖어서 만든 수제 덖음차가 생각나서 말씀드리니 코펜하겐이라면서 코펜하겐 댁으로 보내라고 하셨다. 코펜하겐 부두와 왕립도서관에서 멀지 않고 합리성과 실용성 측면에서 항공이나 물길이 닿는 적지(適地)에 계시는데 3주가 되어 이메일을 받아보게 되었다. 한국에도 오래된 전통차가 재배되고 있고 천년 전 신라의 왕실 행사에서 사용한 ‘신라왕실녹차’라고 말씀드렸더니 무척 고마워하였다.
그 옛날 전공학문으로 관계를 맺은 분에 대하여 정리해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갔음을 느꼈고 기쁨도 있었다. 나는 대학원 전공서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이분의 역작 중 하나로서 2017년도 집필된 Begley and Hutchinson저 “The Mechanics and Reliability ....” 이름의 도서를 구매 신청하여 청색 바탕의 원서(原書)를 받아보게 되었다. 책 뒷면에 ‘이 자료는 영남대학교의 소중한 자산이오니, 깨끗하게 이용해 주십시오’ 라는 표지(標識)를 붙여서 배달된 전공도서를 보면서 소중한 도서임을 마치 도서관에서 먼저 눈치챈 것 같아서 마음이 행복하였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비선형 고체물의 분기현상에 대하여 쉽게 풀이한 서적을 얻거나 그리고 이 분야 대가 반열의 한국인 학자가 배출되어 만나게 된다면, 다시금 오르기 힘든 학문의 산을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다. 그러한 날이 다시 올려는지는 모를 일이다.
지난 일을 정리하면서 크고 높은 산인 분들도 만나고 여러 추억을 간직하니 새삼 해석파괴역학 학문의 작은 유희(遊戲)를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평해 보기도 하지만, 돕기보다는 오히려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았으니 빚진자라고 생각된다.
연구노트를 정리해 보면서 수식에서 시작하여 수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분들의 친필수식을 모아 보았다. 나와 지도교수와 초청교수의 친필을 차례대로 몇자 집자(集字)해 보니 어쩌면 나에게는 해석파괴역학글씨가 서예 전문가의 서예 글씨 못지않게 그때의 말을 거는 것 같다. 필자의 전공분야에서 장수하는 분은 흔치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해석파괴역학을 낙(樂)으로 삼고 매진하신 교수님들의 만수무강을 빌어보며 지난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사과정 진학을 권유하여 해석파과역학을 전공하게 하신 지도교수님과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응용문제해석을 공동수행하는 낙을 제공하신 초청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연구년의 또다른 수확
짧은 연구년 기간에도 연구에만 매진한 것은 아니고 간혹 작은 휴식기간도 가지게 되었다.
외부는 붉은 벽돌로 허름하게 보이지만 내부는 목재로 구성되어 울림이 빼어난 보스톤 심포니홀을 찾아 세이지 오자와 지휘의 음악도 만났다. 하지만 탱글우드 공연은 아쉽게 되었다.
귀국 한달을 두고 나와 아내는 하버메이어라고 기억되는 존함의 워싱턴 근교 퇴역 해군제독 댁에서 3일간 홈스테이하며 가족같이 숙식 대접을 받으며 추억을 가지는 행운도 갖게 되었다. 고맙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서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이분의 친가 및 처가 부모님 액자사진이 함께 거실에 걸려 있었는데 한국 전통적인 사고와는 달리 장수의 복을 상징하는 노년기 사진이 아니고 젊었을 때 생애 최고의 모습을 담은 훌륭한 사진이었고 설명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분 가족이 다니는 페어팍스에 위치한 성공회 워싱턴교회로 기억이 되는 교회를 이분 가족과 함께 성공회 미사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미사 시작과 함께 교회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서 동시 입장하며 이어서 성직자들이 뒤를 이어 들어오는 모습이 기억에 남기도 하고 밝은 분위기의 미사가 특징적이었다.
한편, 하버메이어 제독은 대학생 아들에게 경제적 독립심을 심어주는 모습에서 실용주의 정신을 느끼기도 했다. 이때가 여름 방학기간이어서 큰 아들이 새벽 수영장 단기 안전요원 일을 하는데 아들을 위해 운전으로 매일 데려다주는 배려심 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분 주택의 옥외 잔디정원 나무숲에는 실제로 백마리는 훨씬 넘고 느낌 같아서는 수백마리 정도로 수많은 반디불이들이 빛을 깜박이며 나뭇가지에 혹은 날라다니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연출하는 야광 반디불이 군무를 보면서 무슨 이런 세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연환경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했다.
또한, 워터타운 지역에 있는 보스톤산성장로교회라는 임차형 한인교회에 주일과 그리고 간헐적 주중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백명미만의 신자들이 예배하는 교회라고 기억되고 호박죽 아줌마로 통할 정도로 나름대로 추억을 만들어 보려는 요량에서 아내는 자주 한국 전통식 호박죽을 직접 만들어 포트락 친교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연구년 준비과정에서 지금은 퇴직했지만 외우(畏友)금오공대 이지수 박사와 경북대 의대 이재태 박사의 도움이 있었고 연구년 체류 중에는 홍익대 나건 박사와 런던올림픽 주치의 서동원 박사 그리고 주요한 선생 손(孫) 주원열 박사와 금오공대 심은보 박사와 또한 함자가 어렴풋한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다. 업무 등 제반일과 기계관 준공에 따른 실(室) 이동에 도움을 주신 당시 학과의 김재웅, 김용철, 이태희, 정일섭, 채영석 교수와 여러 교수께 감사드린다.
학문적으로 보스톤과 인연이 깊어서 자신의 연구년 과정도 바쁘지만 짬을 내어 방문하신 이재원, 신재균 선배교수께도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의 일정이 여의치 않아서 유메스와 토론토에 답방을 하지 못하여 못내 아쉽기도 하다.
특별히 하버드병원에 소속되어 체류하면서 축구경기 클럽 맴버로 활동하며 축구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서 박사 가족을 만나게 되어 발바닥 쇠철판 자상과 무릅타박상 등 장기간 의료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유태인 학교가 많은 뉴턴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틈날 때마다 이분의 밴형 차량으로 이분 가족과 같이 여러 장소를 방문하여 추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아파트를 주선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교회안내와 연구년 생활에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나 박사 가족을 잊을 수 없다.
여름방학과 함께 계획하던 코펜하겐 출국을 미루면서까지 3주 동안 허치슨 교수께서 직접 논문을 집필하는 가운데, 나는 연구실에서 그때마다 추가로 필요한 계산과 그림 작성을 이어갔고 귀국 일주일 정도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집필이 완료되면 한달 여유는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시간이 훌쩍 가버린 것이다. 비교적 근거리에 있는 나이아가라폴 관광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귀국 즈음 허겁지겁 마무리 이사짐을 싸게 되었는데, 아내와 이웃하며 친하게 지내게 된 정윤이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분은 생명과학전공의 한국인 박사후과정 부부박사로서 초등학교 자녀도 기르면서 하버드에서 경력을 쌓고 계신 분이었다.
짧은 체류기간에도 불구하고 논문집필이 완성되었으니 큰 산을 넘은 것 같고 체류 과정에서 많은 분의 손길이 있었음을 회고해 보며 다시금 감사드리고 싶다.
참고문헌
Begley, M.R., Hutchinson, J.W." The Mechanics and Reliability of Films, Multilayers and Coatings.." A Book Publish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Choi, S. R., Hutchinson, J. W., Evans, A. G., Mechanics of Materials, 31, 431-447 (1999).
Choi, S. R., Lee, K.S., Earmme Y.Y., J. Appl. Mech., 61, 38-44 (1994).
Hill, R., Hutchinson, J.W., J. Mech. Phys. Solids, 23, 239-264 (1975).
Hutchinson, J.W." Anthony G. Evans.." Biographical Memoirs of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2022).
Rice, J. R., J. Appl. Mech., 35, 379-386 (1968).
|
|

첫댓글 교수님, 옥고에 감사드립니다. 저와는 전혀 다른 분야인 자연과학계통의 계보를 짚어가게 됩니다. 연구년 1년을 섬세한 마음으로 소환해 주셔서 독자들에게 외국생활에서 '쌓은 인연들'을 다시 그리게 합니다. 그리고 올해가 가기 전에 원고부담을 털어내심도 축하드립니다. 늘 관심 기울여 주시고, 또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