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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者 皆當時公卿士大夫及七十二弟子之所諮訪交相對問言語也 旣而諸弟子各自記其所問焉 與論語孝經竝時 弟子取其正實而切事者 別出爲論語 其餘則都集錄 名之曰孔子家語 凡所論辯流判較歸 實自夫子本旨也 屬文下辭 往往頗有浮說煩而不要者 亦由七十二子各共敍述首尾 加之潤色 其材或有優劣故 使之然也
孔子家語는 모두 당시 公‧卿‧士‧大夫 및 72제자가 공자를 찾아가서 서로 묻고 대답한 말이다. 제자들이 각기 자신이 물은 것을 기록하였으니, 論語, 孝經과 기록된 시기가 같다. 제자들이 正實하면서도 일에 절실한 것을 모아서 따로 論語로 편찬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모아 기록하여 孔子家語라고 이름을 붙였다. 무릇 의논하여 변론하고 분류하여 판단하고 비교하여 하나로 모은 것은, 실로 孔子의 본래 뜻인데, 엮고 지은 文辭가 왕왕 근거가 없는 말로써 번다하여 긴요하지 않은 내용이 많은 것은, 또한 72제자가 각기 전체(首尾)를 함께 서술하고 潤色(윤색)까지 하는 과정에서, 그 재주가 더러 우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正實: 참되고 올바름. 屬이을 촉, 불러 모으다, (글을)짓다, 엮다. 頗자목 파. 浮뜰 부. 煩괴로워할 번, 번거롭다. 尾꼬리 미. 潤젖을 윤
▶王肅과 公(孔)安國에 대해: 孔子家語는 魏나라 王肅이 公安國의 이름을 빌려 史記․禮記․說苑․荀子․韓非子․列子 등에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僞書이다. 그러나 孔子家語는 위서임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행적과 생애에 관한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많은 논자들이 공자에 관한 행적을 거론할 때, 자주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孔安國(公安國): 전한 초기의 학자로, 자는 子國이며 노국 사람이다. 공자의 11세손이다. 王肅: 삼국시대 魏나라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자는 子雍(자옹)이며 195~256년에 활동. 경서 주석과 실용적 유학 해석에 큰 영향을 끼쳤고, 鄭玄의 학설에 반대하며 신비주의적 해석을 실용적으로 전환한 인물로 평가
孔子旣沒 而微言絶 七十二弟子終 而大義乖 六國之世 儒道分散 遊說之士 各以巧意而爲枝葉 唯孟軻荀卿 守其所習 當秦昭王時 荀卿入秦 昭王從之 問儒術 荀卿以孔子之語及諸國事 七十二弟子之言 凡佰餘篇 與之 (子)由此 秦悉有焉 始皇之世 李斯焚書 而孔子家語與諸子同列 故不見滅
공자가 돌아가신 뒤에 隱微한 말이 끊겼고, 72제자가 죽은 뒤에 큰 義理가 어그러졌다. 六國의 시대에 儒道가 나뉘자, 遊說(유세)하는 선비들이 각기 巧妙(교묘)한 뜻으로 枝葉적인 것을 만들었지만, 孟軻(孟子)와 荀卿(荀子)만은 전수받은 것을 지켜 보존하였다. 秦昭王 때에 荀卿이 秦나라에 들어가서, 秦昭王이 그와 從遊하면서, 儒術에 대해 묻자, 순경이 공자의 말과 여러 나라의 일과 72제자의 말을 가지고, 모두 백여 篇을 지어서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나라에 이에 대한 기록이 모두 남아 있게 되었다. 秦始皇의 시대에 李斯가 書籍을 불태웠지만, 孔子家語는 諸子書와 같은 반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았다.
▶乖어그러질 괴. 巧공교할 교. 軻굴대 가. 荀풀이름 순. 習익힐 습. 悉다 실. 焚불사를 분
高祖克秦 悉斂得之 皆載於三尺竹簡 多有古文字 及呂氏專漢 取歸藏之 其後被誅亡 而孔子家語乃散在人間 好事者或各以意 增損其言 故使同是一事而輒異辭
漢高祖가 秦나라를 이기고, 모두 거두어 모아서 3尺의 竹簡에 실어 기록하였는데, 古文이 많았다. 呂氏(呂不韋, 여불위)가 漢나라의 국정을 專橫할 때 미쳐서는 모아서 숨겨 두었는데, 그 후 (呂氏가) 誅罰되어 죽은 뒤로 孔子家語가 세상에 흩어지자, 好事家가 더러 각자 자신의 뜻에 맞게, 글을 보태거나 빼버렸기 때문에, 똑같은 하나의 일인데도 글이 다르게 되었다.
▶克이길 극. 斂거둘 렴. 載실을 재. 誅죽일 주. 損덜 손. 輒문득 첩, 도리어, 번번이, 제멋대로
孝景皇帝末年 募求天下禮書 于時京師士大夫 皆送官 得呂氏之所傳孔子家語 而與諸國事及七十子辭 妄相錯雜 不可得知 以付掌書 與曲禮衆篇亂簡 合而藏之祕府
孝景帝 말년에 천하의 禮書를 모으고 구하자, 이때 京師의 사대부들이 모두 서적을 官에 보냈으므로, 呂氏가 전한 공자가어를 찾았는데, 여러 나라의 일과 70제자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掌書에게 맡겨, 曲禮에 관한 여러 篇 중에서 어지러운 簡冊들을, 합하여 祕府에 보관하게 하였다.
▶景볕 경. 募모을 모. 妄허망할 망, 거짓. 錯섞일 착. 掌손바닥 장. 祕府: 重要한 文書 따위를 保管하던 宮廷의 倉庫. 남이 보아서는 안 될 物件을 숨겨 두는 倉庫.
元封之時 吾仕京師 竊懼先人之典辭 將遂泯滅 於是因諸公卿大夫 私以人事 募求其副 悉得之 乃以事類相次 撰集爲四十四篇 又有曾子問禮一篇 自別屬曾子問 故不復錄 其諸弟子書所稱引孔子之言者 本不存乎家語 亦以其己自有所傳也 是以皆不取也 將來君子不可不鑑
漢武帝 元封 年間(B.C.110~B.C.105)에 내(孔安國)가 京師에서 벼슬하면서, 선인들의 典籍이 장차 泯滅(민멸)될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여러 公卿大夫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내 副本을 구하여 모두 얻은 다음, 유사한 일끼리 編次하여 44편으로 撰集(찬집)하였다. 또 曾子問禮 한 편은 曾子問에 따로 소속시켰으므로,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글에서 공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인용한 것이, 공자가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또한 자신이 개인적으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취하지 않은 것이니, 훗날의 군자들은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封봉할 봉. 竊몰래 절, 훔치다. 懼두려워할 구. 泯망할 민. 副버금 부, 다음. 撰지을 찬. 鑑거울 감
孔安國者 字子國 孔子十二世孫也 孔子生伯魚 魚生子思 名伋 嘗遭困于宋 作中庸之書四十七篇 以述聖祖之業 授弟子孟軻之徒數百人 年六十二而卒 子思生子上 名白 年四十七而卒 自叔梁紇始出妻 及伯魚亦出妻 至子思又出妻 故稱孔氏三世出妻
孔安國은 字가 子國으로 공자의 12세손이다. 孔子가 伯魚를 낳고 伯魚가 子思를 낳았는데, 이름이 伋이다. (伋이) 일찍이 宋나라에서 곤란한 일을 당하자, 中庸 47편을 지어 聖祖의 功業을 서술하여 제자인 孟軻의 무리 수백 인에게 전수하였다. 62세에 졸하였다. 子思는 子上을 낳았는데 이름이 白이다. 47세에 졸하였다. 叔梁紇이 처음으로 妻를 내쫓았는데, 伯魚도 처를 내쫓았고, 子思도 처를 내쫓았으므로 孔氏三世出妻라고 하였다.
▶伋속일 급, 人名. 遭만날 조. 庸쓸 용, 功. 紇질 맞은 명주실 흘
子上 生子家 名傲 後名求 年四十五歲而卒 子家生子直 名㯼 年四十六而卒 子直生子高 名穿 亦著儒家語十二篇 名曰 言 年五十七而卒 子高生武 字子順 名微 後名斌 爲魏文王相 年五十七而卒 子武生子魚 名鮒 及子襄 名騰 及子文 名祔 子魚後名甲
子上은 子家를 낳았는데, 이름이 傲이고 後名은 求이다. 45세에 졸하였다. 子家는 子直을 낳았는데 이름이 㯼(개)이다. 46세에 졸하였다. 子直은 子高를 낳았는데 이름이 穿이다. 또한 儒家와 관련된 내용 12편을 짓고 言이라 하였다. 57세에 졸하였다. 子高는 武를 낳았는데 자는 子順이며, 이름은 微이고 後名은 斌(빈)이다. 魏文王 때에 재상을 지냈고 57세에 졸하였다. 子武는 子魚를 낳았는데 이름이 鮒이고, 또 子襄을 낳았는데 이름이 騰이고, 또 子文을 낳았는데 이름이 祔이다. 子魚는 後名이 甲이다.
▶傲거만할 오. 㯼개(뜻은 未詳). 穿뚫을 천. 微작을 미. 斌빛날 빈. 魏나라 이름 위. 鮒붕어 부. 襄도울 양. 騰오를 등. 祔합사할 부.
子襄 以好經書博學 畏秦法峻急 乃壁藏其家語孝經尙書及論語於夫子之舊堂壁中 子魚 爲陳王涉博士太師 卒陳下 生元路 一字元生 名育 後名隨 子文 生㝡 字子産 後從高祖 以左司馬將軍 佐韓信 破楚於垓下 以功封蓼侯 年五十三而卒 諡曰夷侯 長子滅嗣 官至太常
子襄은 경서를 좋아하고 박학하였으나, 秦나라의 법이 매우 가혹한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家語, 孝經, 尙書, 論語를 孔子의 옛집 벽에 숨겼다. 子魚는 陳나라 王涉의 博士와 太師로 있었는데, 陳下에서 죽었다. 元路를 낳았는데, 또 다른 자는 元生이며 이름은 育이고 後名은 隨이다. 子文은 㝡(최)를 낳았는데 자가 子産이다. (子産은) 뒤에 從高祖의 뒤를 이었고, 左司馬와 將軍으로서 韓信을 보좌하여 垓下에서 楚軍을 격파하여, 그 공로로 蓼侯(요후)에 봉해졌다. 53세에 졸하였다. 시호는 夷侯이다. 子産의 長子는 宦官(환관)이 되어 벼슬이 太常에 이르렀다.
▶畏두려워할 외. 峻높을 준. 壁벽 벽. 涉건널 섭. 陳늘어놓을 진. 隨따를 수. 㝡가장 최. 佐도울 좌. 垓해자 해, 지경, 경계. 蓼여뀌 료, 나라이름. 諡시호 시. 嗣이을 사. 從高祖: 高祖父의 4촌 형제
▶陳王涉: 陳勝. 陳涉. 陽城사람으로 字는 涉이다. 秦말기의 농민 출신으로 戍卒(수졸, 邊方에서 戍자리 서는 軍事)로 가던 중 봉기하여 농민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세 황제 원년(BC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張楚를 건국하였다.
次子襄 字子士 後名讓 爲孝惠皇帝博士 遷長沙王太傅 年五十七而卒 生季中 名員 年五十七而卒 生武及子國 子國 少學詩於申公 受尙書於伏生 長則博覽經傳 問無常師 年四十 爲諫議大夫 遷侍中博士
次子인 襄은 자가 子士이고, 後名은 讓이다. 孝惠皇帝의 博士로 있다가 長沙王의 太傅로 左遷되었다. 57세에 졸하였다. 季中을 낳았는데 이름이 員이다. 57세에 졸하였다. 武와 子國을 낳았다. 子國은 어려서 申公에게서 詩經을 배웠고 伏生에게서 尙書를 전수받았으며, 커서는 경전을 두루 보았고, 물음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40세에 諫議大夫가 되었다가 侍中과 博士로 옮겨졌다.
▶遷옮길 천. 傅스승 부. 覽볼 람.
▶申公: 중국 前漢시대의 文臣. 노나라 출신으로, 순자의 제자에게서 배운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 한때 초나라의 태자 교육을 맡았으나,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죄인이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제자를 백 명 이상 배출, 유학의 씨앗을 널리 퍼뜨렸다. 그의 제자 중에는 무제를 섬긴 왕장, 조광 같은 고위 관리도 있었다. 신공은 말년에 무제에게 다시 불려와 국정 자문 역할을 맡았다.
▶伏生: 秦朝济南郡鄒平人. 自幼嗜古好学,博览群书,对尚书研读尤精,为儒学博士(진나라 제남군 추평인.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고, 尙書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유학 박사로 활동함. 焚書坑儒 때 목숨을 걸고 서경을 숨겼던 인물로, 그는 집 벽 속에 경서를 감추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그것을 꺼내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가 지켜낸 29편의 서경은 후대 서경 전승의 핵심이 되었다.)
天漢後 魯恭王壞孔子故宅 得壁中詩書 悉以歸子國 子國乃考論古今文字 撰衆師之義 爲古文論語訓十一篇 孝經傳二篇 尙書傳五十八篇 皆所得壁中科斗本也 又集錄孔子家語 爲四十四篇 旣成 會値巫蠱事 寢不施行 子國 由博士 爲臨淮太守 在官六年 以病免 年六十卒于家
天漢(漢 武帝의 연호) 후기에 魯恭王이 孔子의 옛집을 허물다가, 벽 속에서 詩經과 尙書를 발견하고는, 모두 子國에게 보내자, 子國이 古今의 文字를 고찰하여 논의하고, 여러 뛰어난 사람들의 뜻을 뽑아서, 古文論語訓 11편, 孝經傳 2편, 尙書傳 58편을 지었는데, 모두 벽 속에서 발견된 科斗文字(蝌蚪文字)로 된 本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 孔子家語를 集錄하여 44편을 만들었는데, 완성한 뒤에 마침 巫蠱(무고) 사건이 일어나 폐기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子國은 博士로 있다가 臨淮太守가 되었는데, 관직에 있은 지 6년이 지나 병으로 免職되었고, 60세에 자신의 집에서 졸하였다.
▶壞무너질 괴. 寢잠잘 침. 淮강 이름 회. 値값 치, 값어치, 價格, 만나다, 때를 맞이하다, 즈음하다, 當하다. 蠱독(毒) 고, 벌레
科斗文字: 글자 모양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周代에 사용된 가장 오래된 문자 중 하나. 蝌蚪: 올챙이(蝌올챙이 과. 蚪올챙이 두)
▶巫蠱: 漢 武帝 때에 있었던 옥사이다. 武帝가 晩年에 병치레를 많이 하여 혹시 누가 저주한 소치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던 차에, 江充이 태자의 궁중에 木人이 많이 묻혀 있다고 誣陷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겁이 나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하고, 그 후유증으로 승상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漢書 武帝紀, 江充傳) 誣陷(무함): 없는 事實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남을 어려운 地境에 빠지게 함.
其後孝(武)[成]皇帝 詔光祿大夫劉向 校定衆書 都記錄 名古今文書論語別錄 子國孫衍 爲博士 上書辯之 曰 臣聞 明王不掩人之功 大聖不遺人之善 所以能其明聖也 陛下發明詔 諮群儒 集其天下書籍 無言不悉 命通才大夫校定其(議)[義] 使遐載之文 以大著於今日 立言之士 垂於不朽 此則蹈明王之軌 遵大聖之風者也
그 뒤에 孝成皇帝가 光祿大夫 劉向에게 詔勅(조칙)을 내려 수많은 책을 校定하게 하니, 모두 기록하여 古今文書論語別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子國의 손자 孔衍(공연)이 박사로 있을 때, 글을 올려 공자가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신이 듣건대, 明王은 남의 공로를 가리지 않고 大聖人은 남의 작은 善도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 때문에 明聖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밝은 조서를 내리고 여러 儒者에게 자문하여, 천하의 서적들을 모을 적에 간곡하게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通明하고 재주 있는 大夫에게 그 뜻을 校定하도록 명하여, 먼 옛날 기록된 글을 오늘날 크게 그 의미를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立言하는 선비들이 不朽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는 명왕의 법도를 따르고 대성인의 풍모를 따른 것입니다.
▶詔고할 조, 알리다. 勅칙서(勅書) 칙, 詔書, 申飭하다(신칙: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다). 衍넘칠 연. 掩가릴 엄. 陛섬돌 폐. 諮물을 자. 遐멀 하. 垂드리울 수. 朽썩을 후. 蹈밟을 도. 軌길 궤, 法度. 遵좇을 준. 明王: 政事에 밝은 임금. 立言: 意見을 世上에 發表함. 後世에 敎訓이 될 만한 말을 함.
▶劉向: 前漢 말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자는 子政이다. 황실의 宗親으로 漢宣帝 때 名儒로 선발되어 궁중 내에 설치된 궁중도서관인 石渠閣에서 五經을 강의하였으며, 흩어져 있던 先秦의 古籍들을 수집하여 자신이 직접 교감,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들 劉歆(유흠)과 함께 七略을 저술하여 목록학의 鼻祖(비조)로 추앙되었다. 각 시대의 고사와 설화를 모은 新序와 說苑을 지었다.
雖唐帝之煥然 周王之彧彧 未若斯之極也 故述作之士 莫不樂測大倫焉 臣祖故臨淮太守安國 建仕於孝武皇帝之世 以經學爲名 以儒雅爲官 讃明道義 見稱前朝 時 魯(共)[恭]王 壞孔子故宅 得古文科斗尙書孝經論語 世人莫有能言者 安國爲之今文讀 而訓傳其義 又撰次孔子家語 旣畢訖 會値巫蠱事起 遂各廢 不行于時 然其典雅正實 與世所傳者 不可同日而論也
비록 唐帝(堯)의 찬란한 事業과 周王(周나라)의 성대한 文章이라도, 이처럼 지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선비들이 大倫의 뜻을 헤아리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의 조부 故 臨淮太守 安國은 孝武皇帝 때에 벼슬하였는데, 經學으로 이름이 났고 儒學으로 관리가 되어 道義를 도와서 밝혀 前朝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당시 魯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허물다가, 古文인 科斗文字로 기록된 尙書, 孝經, 論語를 발견하였는데, 세상 사람들 중에 능히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안국이 이 때문에 今文으로 판독하여, 그 뜻을 訓傳으로 달았으며, 또 공자가어를 撰次하였습니다. 일을 다 마쳤는데 마침 巫蠱의 사건이 일어나, 결국 각기 폐기되고 당시에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典雅하고 正實한 내용은,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같은 수준으로 놓고 논할 수 없습니다.
▶煥불꽃 환. 彧문채 욱. 雅바를 아, (규범에)맞다, 맑다, 優雅하다, 高尙하다, 큰부리까마귀. 讃기릴 찬. 畢마칠 필. 訖이를 흘
▶堯의 찬란한 事業이란 論語 泰伯에 堯임금의 德을 칭송하면서, 巍巍乎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높고 큰 그 공이여, 찬란한 그 문장이여!) 라고 한 말을 가리키고, 周나라의 성대한 文章이란 論語 八佾에,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周나라는 夏나라와 殷나라의 두 왕조를 본받았으니, 그 문물이 성대하구나. 나는 周나라의 예법을 따르겠다.) 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光祿大夫向 以爲其時所未施之故 尙書則不記於別錄 論語則不使名家也 臣竊惜之 且百家章句無不畢記 況孔子家古文正實而疑之哉 又戴聖 皆近世小儒 以曲禮不足 而乃取孔子家語雜亂者及子思孟軻荀卿之書 以裨益之 總名曰禮記
光祿大夫 劉向은 당시에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尙書는 別錄에 기록하지 않고, 論語는 一家로 명명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이 점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또 百家의 글들은 모두 다 기록하였는데, 하물며 공자 집안에 보관된 책들이 古文의 正實임을 의심하겠습니까? 또 戴聖은 모두 근세의 보잘 것 없는 儒者라 曲禮의 내용이 부족하다고 하여, 공자가어에서 어지럽게 뒤섞인 글과 子思, 孟軻, 荀卿의 글을 모아서 보태고는 禮記라고 총칭하였습니다.
▶惜아낄 석. 戴일 대. 裨도울 비
▶戴聖: 前漢 때 사람으로, 漢宣帝 때 博士가 되었다. 戰國시대 때부터 漢나라 초기까지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禮에 관한 논저들을 모아 오늘날의 禮記로 불리는 小戴禮記를 편찬하였다. 여기에서는 大戴禮記를 편찬한 숙부 戴德까지 아울러 가리킨다.
今(向)[尙]見其已在禮記者則便除家語之本篇 是爲滅其原而存其末也 不亦難乎 臣之愚以爲宜如此爲例 皆記錄別見 故敢昧冒以聞 奏上 天子許之 未卽論定而遇帝崩 向又病亡 遂不果立
이제 오히려 이미 禮記에 실려 있는 것을 보니, 바로 공자가어에 있는 본래 내용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는 그 근원을 없애고 지엽을 남겨두는 것이니, 또한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마땅히 이러한 것을 본보기로 삼아 모두 기록하여 별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몽매함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렇게 上奏하자 천자가 허락하였는데, 즉시 論定하지 못하다가 孝成皇帝가 崩御(붕어)하고 유향 또한 병으로 죽어, 결국(果) 學官에 나열되지(立) 못하였다.
▶愚어리석을 우. 宜마땅할 의. 昧어리석을 매, 새벽. 冒무릅쓸 모. 奏아뢸 주. 遇만날 우. 崩무너질 붕. 崩御(붕어): 임금이 世上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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