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의미와 네가 나 없었으면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겠냐의 의미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가 겪지 못한 것에 대해선 왠만하면 대답을 함구하는게 나은데, 굳이 겪지 않아도 비난하거나 비판해도 되는 일은 세상에 많다. 살인을 저지른 놈이나 도둑질한 놈, 혹은 사기친 놈들은 우리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충분히 욕먹을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판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그 사람보다 많은 걸 경험할 필요는 없을 때도 있다.
증명이란 건 경험하지 않고도 수학 공식을 발명한 사람처럼 머리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고 대부분은 이런 고도화된 문명의 혜택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세계는 돌아가고 있다. 아인슈탸인이 E = mc2 을 경험으로 알아낼 수 있었을까라는 명제를 던져놓고, 우리가 이런 공식을 도출해내는데 경험을 언급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식은 때로는 오류 앞에서 허무하게 진실로 오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지못하는 우주를 향해 위성이나 로켓을 발사하는 과정 모두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배제하고 기계의 메커니즘에 의해 직접적으로 누리고 있는 현대문화의 진화앞에 사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경험과 연륜은 나이가 들어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우리의 의식은 진실보단 거짓의 논리에 의해 연명하고 있는 빈도가 훨씬 많다. 정치 싸움을 봐도 그렇고,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광적인 집착도 거짓의 논리 앞에 거짓을 덮어서 이전투구의 전형을 매일매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집단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경험많고, 정치를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의 실체이다.
지난 일에 대해 감사하는 자와 기득권이 되어서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잊어버린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해 내미는 생색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이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기득권이 말하는 예의란 것이 무엇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통념을 차용해 발휘하고 있는 예의의 실상은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갖추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아주 어린 시절에 똥오줌 구분하고 살 수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의란 차라리 가식에 가깝다. 보통 어린 시절을 지나고 똥오줌 못가린다면 기꺼이 그는 사람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똥오줌 가리고도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분명 상대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갑을 관계에서 갑의 비합리와 부정을 보고도 함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지어서 생각한다 해도 다분히 어떤 구조적 문제는 결함을 가진 상대가 과오를 정상인것처럼 끌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사회가 가진 선은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 선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악에 이용되지 않는데 최선의 방책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선은 카드 광고에서 포인트에 열을 올려 선전해대는 광고처럼 생색 내기에 불과한 것을 마치 모두가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인양 메인에서 딱 버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할부인생은 살기 싫어서 신용카드는 쓰지 않는다.
사실 기득권 세대들이 말하는 예의보다는 그들의 생활양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속은 똥만 가득찬 채 예전 세대보다 영악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답습해서 살아갈지도 모를 자라나는 세대들의 운명을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우울해진다. 앞으로의 삶은 선에서 모호하게 걸친채 적당히 악을 행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점점 어린 세대들에게까지 확산되어 도래한다면 누가 선과 악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최근 선생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선생이란 직업도 참 열악하기 짝이 없는 기간제 교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년이 보장되는 선생이란 직업도 점점 구차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직이란 관점에서 볼 때 안정적이지만 사람관계에서 자기보다 어린 상대에게 조롱을 받는 선생들을 나는 어린시절에도 많이 보아왔다. 학교라는 곳은 여타 직장생활과는 달리 그보다 어린 자들의 비율이 1대 수십명이다. 싸워도 17대 1의 싸움은 불가능한데 그보다 더한 상대들을 데리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최근 상황이 급속도로 개선된 선생님들의 근무환경이다.
그리고 인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들이 자식을 낳아 보내는 곳도 학교이다 보니 선생 알기를 뭣같이 아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30대 중반이며 미혼인 나도 선생에 대한 전인교육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하는 바인데, 나보다 더 빠삭한 세대들은 오죽할까. 자식을 가진 현재 부모 세대들은 돈으로 여기저기 쳐바르면서도 정작 공공교육에서 가장 최상위의 가르침을 전수해야 할 선생의 중요성보다 자기 자식이 남보다 우월할 수 있도록 차별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자식 교육의 실상이다.
경제가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군사정권이 지난 후에 비로소 문화의 개방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중산층의 위치가 급속도로 높아졌던 90년대에 학업에 열중했던 세대들이 우리들이고, 80년대 후반을 겪은 초등생이라면 치마열풍이 불면서 촌지가 판을 치던 시절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다. 나 또한 치마열풍의 희생양이 되었던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 있었고 그 후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지만 그중의 어떤 선생은 어렴풋이 촌지가 오가던 걸 봤던 기억들이 있다. 좀 못살던 시절에는 선생님들 앞에서 우리 자식 잘 봐줍네 좀 신경써 달래네 했던 부모의 돈을 받고 풍요를 누린 세대들이 부모에게 받은 유산은 무엇일까.
치마열풍 이전에 그 전부터 치고올라온 부동산의 졸부의 상징인 복부인처럼 우리의 모습에는 선한 양심보다 비겁하고 졸렬하지만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0년대 후반 누가누가 아파트 값의 꼭지를 잡을까 했던 놀이들을 거쳐 2009년 파생상품의 나비효과로 겪은 집값 하락의 급격한 후폭풍을 겪고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의 인사들은 IMF처럼 넘어갈 수 있었던 위기의 2009년을 비정규직의 양산을 통해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희생을 등에 업고 이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으며 사대강 사업은 기업의 배를 불려주고, 정부의 회생 노력을 위해 시행했던 워크아웃의 패해는 상당수 좀비기업의 생존수단이 된지 오래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바라볼 수 있을까. 한번 노동의 권리가 꺽이기 시작하니 갈수록 태산으로 흘러가는 것이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나이가 들면서 열정보다 유지에 급급한 세대들을 밀어낼 만한 젊은 시절의 열정이 우세해야 사회의 성장 동력이 시원시원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에 멀리는 기득권들은 자중하고 근신하며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숙고와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 어느 순간 기득권 세대가 자기가 살아온 시절의 지분을 늙어서도 요구하기 시작하거나 자기가 밟아온 사다리를 걷어내는 작업을 착수하고 있다면 그들의 수준은 저급해지고, 결국 노인을 위한 세상을 추구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흥부와 놀부라는 전래 동화와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를 보면서 새삼 느껴지는 것이 이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부끄러움과 염치를 알게 해주는 실화같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허영심을 채우는 과정과 사람이 종국에는 자기의 피붙이 조차도 매몰차게 도와주지 않고 재산을 혼자 독식하는 행위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말로와 놀부의 말로를 통해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 하다.
놀부가 만약 흥부의 생계를 대신 책임져 준다하면서 겨우 살등말등할 정도로 베풀고 내가 널 위해 큰 희생을 치른 것 마냥 거들먹거렸다면 이 동화의 결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벌거벗은 임금님이 조금이라도 더 똑똑해서 사기꾼에 동조하는 신하들과 그렇지 않은 신하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사기치는 놈들의 결말과 임금의 위신을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상황은 항상 똑같이 주어지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과 지혜,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는 사람들의 해결 노력에 따라 우리의 삶의 범위는 그 추구하는 다양성만큼 한가지의 보편성으로 향해 가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새옹지마란 말이 생겨나고 위록지마란 말이 생겨난 듯 하다. 말이란 동물을 가지고도 사자성어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이렇게 천지차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어떤 것을 정의하는데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 인식과 의식이다. 그런데 인식과 의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동일한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인식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의식할 수도 있다. 사회에서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는데 얼마든지 존재감을 발휘하는 이해관계로도 의식과 인식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아도 폭파시키면 그만인 듯 인식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왜곡해 버리면 열등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사장시키는데 엄청난 분노로 쓰여지기도 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식이 내뿜는 의식의 단면이다.
기득권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세대들은 점점 차상위계층으로 인식하게 되고,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차상위 계층은 최저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마지노 선에 겨우 걸쳐 있는 계층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교육의 중요성이 왜 필요하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일까. 흥부와 놀부, 벌거벗은 임금님은 동화속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는 현실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