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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三陟市) 죽서루(竹西樓) 일원 탐방 안내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보물 제213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대공원역에서 257km, 3시간 18분, 무릉계곡에서 17km, 29분].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403년(태종3) 당시 삼척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고쳐지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어 있고, 누(樓) 아래의 17개 기둥 중 아홉 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 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 제일루(關東 第一樓)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뒷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1662년(현종 3) 부사 허목(許穆)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는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썻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1837년(현종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선생 등 많은 명사들의 시(詩)가 걸려 있다.
■삼척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삼척시 정상동(육향산). [죽서루에서 2.8km, 8분]. 척주는 삼척의 옛 이름으로 이 비석을 세운 이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년, 선조 28∼1682년, 숙종 8).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는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의 하나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한다.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운 퇴조비(退潮碑)이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는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인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글)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비(碑)를 세운 이후 수마(水魔)가 물러가고 바다가 잠잠해지다. 허미수가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게도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 비석과 비문의 신비한 위력에 놀라 이 비를 퇴조비로 부르기도 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미수 선생이 비석을 세운 곳은 정라진의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큰 방파제 끝부분)였다. 그런데 48년 뒤인 1708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김구용이 지은 『척주지』(1848년)에 의하면 1708년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허미수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을 했으며, 1709년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串島) 동쪽 산록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년 12월 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죽관도(현재의 육향산) 산정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척주동해비 원문 해석
州古悉直氏之地 左獩墟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都護府使 孔岩 許穆書
척주는 옛날 실직씨의 땅이요, 예나라의 터 남쪽으로, 서울로부터 700리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다. 도호부사 허목 쓰다.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千 渤遹汪濊 海動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殆珠 輿月盛衰 蒡氣昇霏
天吳九首 壞夔一股 颱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肅韜光 溥桑沙花 黑齒摩羅 撮髻莆家
蜑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古星遠德 百蠻衆譯 無遠不服 荒哉凞哉 大治鑛博 遺楓邈哉
큰 바다 끝없이 넓어서/온갖 냇물 모여드니/그 큼이 무궁하도다./
동북쪽 사해(沙海))*1여서/밀물 썰물 없으므로/대택(大澤))*2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바다 움직이고*3 음산하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4으로/태양의 문이라서/희백(羲伯)*5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6의 위차요/빈우(牝牛)*7의 궁(宮)으로/해 본시 돋는 동쪽 끝이네/
교인(鮫人)*8의 보배와/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 든 진주는/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9/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10와/외발 달린 짐승 기(夔)*11는/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찬란하고 눈부시니/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하늘의 수경(水鏡)이 되니/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12/상투 튼 보가(莆家)족*13/
연만(蜑蠻)의 굴과 조개*14/조와(爪蛙)*16의 원숭이/불제(佛齊)*17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한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주(註)
*1 사해(沙海)) : 모래바다. "동해는 모래바다여서 비습(卑濕)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새서 조수가 일지 않는다" <미수(眉叟)의 척주기사(陟州記事)>
*2 대택(大澤)) : 큰 못. 곧 동해를 말함.
*3 바다 움직이고(海動有) : "동해는 항시 큰 바람이 많아 파도가 열 길이나 되는데 오직 서풍이 불면 바다가 고요하고, 서북풍(西北風 일명 여풍(厲風))이 불면 바다가 움직인다.” 했고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이는 것을 해악(海惡)이라 한다.”고 했다. <미수(眉叟)의 척주기사(陟州記事)>
*4 양곡(暘谷) : 해 뜨는 곳.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暘谷)이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요임금은 관원을 뽑아 여러 소임을 분담 시켰는데, 희백이라는 관원을 우이(嵎夷)로 가도록 하였다. 우이는 동방을 가리키는 곳으로 우(嵎)는 즉 평원을 말하며, 태양이 언덕 위에 솟아 평지를 비치므로 동방을 뜻하는 것인데, 양곡(暘谷)이라고도 하였다. 양(暘)은 밝다는 말이며, 곡(谷)은 낮은 곳을 가리킨다. 이는 곧 낮은 곳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온누리에 비치므로 동방을 뜻하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
*5 희백(羲伯) : 요(堯) 때에 천지(天地)ㆍ사시(四時)를 다스린 관원. - 요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 氏)에게 명하시어 호천(昊天)을 공경하고 순하여 일월성진(日月星辰)을 역(曆)으로 하며 상(象)으로 하여, 공경하여 인시(人時)를 주라 하시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 敬授人時). 요임금은 희와 화라는 관원에게 명하여 자연의 변화 상태를 면밀히 조사시켰다. 광대한 하늘의 힘으로 말미암아 춘하추동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 하늘의 움직임을 잘 조사하여 일월성진의 운행을 자세히 관찰한 후 역(曆)을 만들어 널리 백성들을 가르치자 정월이 어느 때이며, 씨앗을 뿌릴 때는 언제이고, 추수를 할 시기는 어느 때라고 알리라고 하였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
*6 석목(析木) :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기(箕)ㆍ두(斗) 두 별 사이를 가리키며 정 동쪽 인방(寅方)에 해당한다. "석목의 나루는 기(箕)ㆍ두(斗)의 사이에 있으니 은한(銀漢)의 나루다" <이아 (爾雅) 석천(釋天)> - 이아((爾雅)는 중국의 13경(經) 중의 하나인 동양자전(東洋字典), 이(爾)는 가깝다는 뜻, 아(雅)는 바르다라는 뜻. 이아는 곧 천문, 지리, 음악, 기재, 초목, 조수(鳥獸)의 문자에 대한 설명서.
*7 빈우(牝牛) : 축방(丑方)에 있는 기(箕)ㆍ미(尾) 두 별자리.
*8 교인(鮫人) : 바다의 여신. 큰 잉어와 비슷하며 사지가 있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음성을 낸다고 함. 곧 인어. - "교인은 고기와 같이 물속에서 살면서 비단 짜는 일을 하는데, 힘들어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을 이룬다." <술이기(述異記)>
*9 조개 속에 든 진주는/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 “소라가 구슬을 잉태하는데, 그 구슬은 달과 더불어찼다 줄었다 한다.”<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 좌사는 '낙양지가(洛陽紙價)'를 끌내 올린 사람. 오도부는 그 삼도부(三都賦)인 촉도부(蜀都賦), 위도부(魏都賦)의 하나. 좌사는 제나라 사람으로 추남에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붓을 잡으며 장려한 시를 지었다. 삼도부는 그가 장장 10년만에 완성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라는 유명한 시인이 삼도부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 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 《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저술], 《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삼도부》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 환관, 문인, 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洛陽紙價貴]'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지은 《영시(詠詩)》가 더 중시되고 있다.
*10 천오(天吳)
여덟 개의 사람 얼굴과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가진 천오(天吳)다. - 조양곡의 신을 천오라 하는데, 그는 물귀신이다. (중략) 그 생김은 여덟 개의 사람 얼굴이며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는데, 등은 청황색이다.(朝陽之谷,曰天吳,是爲水伯,(중략) 其爲獸也,八首八面,八足八尾,背靑黃.) <산해경(山海經-海外東經)>
* 본문에서 천오구수(天吳九首)라 하여 머리가 아홉 개라 하였는데 잘못된 부분이다. 아래 그림이 <산해경-해내서경>에 나오는 개명수(開明獸)와 혼돈한 듯하다.
얼굴 아홉 개를 가진 개명수다. 곤륜의 남쪽 못은 깊이가 300 길이다. 개명수는 몸 크기가 호랑이 비슷하고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는데, 모두 사람의 얼굴이다.(昆侖南淵深三百仞,開明獸身大類虎而九首,皆人面)<산해경-해내서경(海內西經)>
*11 기(夔)
소같이 생겼는데 뿔이 없는 외발 짐승 기(夔)다. -동해 한가운데에 유파산이 있는데, 바다로부터 7,000리나 들어가 있다. 그 위에 소같이 생긴 짐승이 있는데 푸른 몸빛에 뿔이 없고 외발이다. (이 짐승이) 물속으로 드나들 때면 반드시 비바람이 일며 그 빛이 해와 달과 같고, 그 소리는 우뢰와 같다. 이름을 기(夔)라고 한다. 황제가 이것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雷獸)의 뼈를 (북채로 만들어) 두들기니 그 소리가 500리 밖까지 들려 천하를 놀라게 했다.(東海中有流波山,入海七千里,其上有獸,狀如牛,蒼身而無角,一足,出入水則必風雨,其光如日月,其聲如雷,其名曰夔,黃帝得之,以其皮爲鼓,橛以雷獸之骨,聲聞五百里,以威天下)<산해경(山海經-대황동경_大荒東經)>
뇌수(雷獸)를 뇌신이라고도 한는데,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자신의 배를 두드린다.(龍身而人頭, 鼓其腹). 한 번씩 두드리며 천둥소리로 울렸다고 한다.
*12 부상(扶桑)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 : 동해 가운데 있는 나라와 남만의 종족 이름. 부상은 해돋는 곳인데 일본의 별칭, 사화는 동해에 있는 나라로 미지의 나라인데, 발음상 사할린과 유사하고 아무르강 하류 타타르해협의 나라, 또. 黑齒麻羅(흑치마라)는 검은 이빨(흑치지국 : 그 나라 사람들의 이빨이 옻처럼 새카맣다 –곽박(郭璞) 산해경의 흑치국과 마라국인데, 마라국은 동남아 말레이 반도의 나라들을 가리킴. 곧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흑치국은 중국남부 광서 장족 자치구를 말함. 이 지역 사람들은「빈랑(檳榔)」 이라는 열매를 씹어 이빨이 검게 염색됨.
*13 상투 튼 보가(莆家)족 : "보가족은 중국 동남해에 사는 부족명으로 귀족은 머리털을 머리 뒤로 모아 묶고 백성들은 머리를 박박 깎았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才圖會)」> -삼재도회(三才圖會)는 여러 가지 책을 모아 항목에 따라 분류하여 찾아보기 편리하게 엮어 놓은 책이다. 명대(明代) 가정(嘉靖)·만력(萬曆) 연간(1522~1620)에 왕기(王圻)에 이어 왕사의(王思義)가 편찬했다. 여러 책의 도감(圖鑑)을 모아 문자설명을 덧붙였으므로 그림·문자가 모두 강조된 유서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106권이다, 천문·지리·인물·시령(時令:절기)·궁실(宮室)·기용(器用)·신체·의복·인사(人事)·의제(儀制)·진보(珍寶)·문사(文史)·조수(鳥獸)·초목(草木) 등의 14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대 문물·인물 그림을 찾아보기 위한 책이다.
*14 연만(蜑蠻)의 굴과 조개 : "연만은 세 종족이 있는데, 한 종족은 어연(魚蜒)으로 낚시질을 잘하고, 다른 한 종족은 호연(蠔蜒)으로 바다에 들어가 굴조개를 잘 잡고, 또 다른 한 종족은 목연(木蜒)으로 나무를 베어 과일을 잘 딴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才圖會)」> 모두 가난하고 미개한 부족들임.
*16 조와(爪蛙) : 조와국은 '파사국'이라고 조선말에 출판된 문헌비고는 기록했는데,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함.
*17 불제(佛齊) : 불제국은 '그 나라에서 소를 신성시한다'고 했고, 그 위치가 眞臘(진랍)과 파사의 사이에 있다고 함. 곧 인도를 가리킴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삼척시 정상동(육향산). 죽서루에서 2.8km, 8분].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비석이다. 그가 백이숙제의 나라 죽국(竹國)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죽국에서 3,700년 만에 지하에서 발굴된 하우(夏禹)의 형산비(衡山碑)가 있는 것을 알아내어, 그 글씨체로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내용은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1661년 현종 원년에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1904년 광무 8년에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이란 제액이 있다.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를 보면 문자라기보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고, 그 느낌을 의 표현해 놓은 것 같게 보인다. 그도 중국의 기서(奇書)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나 나오는 짐승들의 형상과 유사하다. 하기야 상형문자의 바탕인 금석문자가 그러했으니 일리도 있다고 하겠다. 분명 허목의 척주동해비를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그도 산해경에 나오는 짐승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남긴 문집들에서 그가 괴이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평수토찬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성호 이익(李瀷)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소개되었다.
『내 집 묵은 책상자 속에 구루비문이 있는데, 그 형상이 벌레가 갉아 먹는 것도 같고 새가 지나간 자국과도 같아서 얽히고 맺히고 깎이고 황홀하고 기괴하나, 가다가 혹 분변하는 이도 있으므로 이에 의하여 기록한다. 그 글을 살펴보면,
久作忘家 오래도록 자기 집을 잊어버리고
翼輔承帝 임금의 뜻을 받들어 보좌하였네.
勞心營智 마음을 쓰고 지혜를 내어
裒事興制 사업을 모으고 제도를 흥성하게 하니
泰華之定 온 세상이 안정되고
池瀆其平 바다와 하천 모두 평온하구나.
處水犇麓 물에 처하여 산록은 구불구불
魚獸發形 고기와 짐승이 모습을 나타낸다네.
而罔不亨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伸欝䟽塞 답답한 것이 해결되고 막힌 것이 뚫리리니
明門與庭 밝은 문과 뜰에서
永食萬國 만국의 백성이 길이 먹고 살리라.
라 하였다. 이것이 모두 48자인데, 삼가 수장하여 잃지 않으면 역시 호고(好古)하는 일단이 될 것이다.』
삼척 공양왕릉(恭讓王陵)-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죽서루에서 19km, 23분].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추천 고돌재에 있는 고분 3기, 삼척에서 남으로 약 40리 가면 동막리를 지나 "사래재"라는 나즈막한 고개를 넘어 가면서 바다쪽을 건너다 보면 큰 소나무가 외로이 서 있고, 그 곳에 석축굽을 돌린 큰 무덤과 그 옆과 앞에 작은 무덤이 2기가 보인다. 이 고분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3부자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척 공양왕릉(恭讓王陵)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 재위기간 1389-1392)의 능묘이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한다.
왕릉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현종 3년(1837) 정유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천추의 한을 품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묘소는 1942년 면장 김기덕과 이 지방인사들이 다시 개축하고 1977년6월 면장 최문갑이 봉축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이 곳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남아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곳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이 곳 왕릉은 조선조 헌종 3년(1837)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奎憲)의 개축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태조실록>과 <양촌집> 등에는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려 왕조의 왕씨를 위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수륙제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곳의 지명 유래에 따르면 궁촌은 임금이 유배된 속이라 하고 마을 뒷길 고돌산에 공양왕이 살해되었다는 살해재가 있다. 또한 공양왕의 맏아들 왕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이라는 지명도 전한다.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해신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왕릉에 와서 제사를 추모하고 있다.
삼척 장호항(莊湖港)-삼척시 근덕면 장호리. [대공원역에서 234km, 2시간 59분, 죽서루에서 울진 쪽으로 25km, 26분]. 삼척 시내에서 25km. 동그랗고 새하얀 해안선이 아름다워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곳이 있다. 희디흰 모래사장과 기암괴석이 손짓하고 맑은 바닷물 속에는 전복과 해삼, 미역과 다시마가 두 손을 나풀대며 하늘거리고 낚시줄만 던지면 우럭과 광어가 입질하는 그야말로 동화같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빠질 수 없는 매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장호항 어촌체험’이 그것이다. 어부들과 같이 어선을 타고 나가 정치망을 당기며 물고기를 잡노라면 어느새 강원도 삼척의 작은 마을에 사는 멋진 어부가 된 듯, 펄쩍펄쩍 뛰는 생선은 즉석에서 회를 떠먹을 수 있으니 신선함 그 자체다. 바다 속 양식장 체험도 이에 버금가는 즐거움 중 하나, 펄떡펄떡 뛰는 우럭이 신기하고 울퉁불퉁 못생긴 멍게가 줄줄이 달려 나오는 그물은 보기만 해도 신기한 이색체험이다. 갯배를 통째로 빌려 낚시를 해도 즐겁고 집어등(集魚燈)을 잔뜩 단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나가 밤하늘과 밤바다가 온통 새까만 세상에서 줄줄이 끌려나오는 오징어를 잡는 즐거움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또 갯바람 맞으며 걷는 지압보도장도 있다. 150m의 길이로 한쪽으로는 바다가 한쪽으로는 절경의 바다바위가 지켜준다. 지압보도를 걸은 후 아이들은 바위틈에서 톳이나 모미역 등 해초를 건지고 아버지는 갯바위 낚시를 하면 감성돔이나 학꽁치, 가자미에 뽈락도 잡을 수 있다. 이로써 저녁 준비 끝. 마을사람들이 준비한 정갈한 민박집에서 맛난 저녁을 해 먹을 수 있다. 혹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호항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 이리해도 저리해도 즐겁기만 하다.
붉은 해 떠오르는 아침에는 활처럼 둥글게 휘어진 백사장 일출이 근사한 장호항을 관망하고 낮에는 장호항 옆 장호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긴다.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백사장이 정겨우니 인근에 있는 대규모 해수욕장과는 사뭇 다른 한적함이 살아있는 별천지다. 정치망 고기잡이, 멍게 양식장 구경, 갯배 낚시, 조개잡기, 해조류 채취, 야간오징어잡이 등 TV에서나 보던 것들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삼척시 원덕읍 갈남리(신남마을). [대공원역에서 233km, 3시간 05분, 죽서루에서 울진 쪽 30km, 31분]. 동해안 유일의 남근숭배민속(男根崇拜民俗)이 전해 내려오는 해신당 공원에는 어촌민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어촌민속전시관,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남근조각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공원을 따라 펼쳐지는 소나무 산책로와 푸른 신남바다가 어우러져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웃음바이러스가 넘쳐나는 동해안 최대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 애바위전설-옛날 신남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초작업을 위해 총각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처녀를 태워주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파도와 심한 강풍이 불어 처녀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이후 이 마을에는 처녀의 원혼 때문에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 어느 날 한 어부가 고기가 잡히지 않자 바다를 향해 오줌을 쌌더니 풍어를 이루어 돌아온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나무로 실물모양의 남근을 깎아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음력 1. 15), 음력 10월 첫 오일에 남근을 깎아 매달아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