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편액글씨를 한번 봐 주세요.. 어느 글씨가 선생님 마음에 드십니까?? 글씨의 주인공은 조금 뒤에 나옵니다만,, 답지를 먼저 보지마시고 글씨를 한번 관(觀)해보세요..
2007년.. 6만9384자의 묘법연화경(법화경)을 120여 미터에 달하는 68폭 병풍으로 만들어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남석 이성조 선생의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 ........(중략)..... 처음 못쓴 글씨단계가 악필이고, 그 다음이 졸필, 그 다음이 달필, 그 다음이 능필, 그 다음이 명필, 그 다음이 신필이고 마지막 한 군데 남은 것이 도필이지요.. 글쎄요,, 한석봉은 명필이고, 추사는 신필단계에 올라갔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답사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추사와 석봉의 글씨를 보면 석봉의 글씨에는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 지는데 추사의 글씨에는 늘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 도대체 뭘 보고 신필(神筆)이라는 건지... 내 보기엔 추사보다는 석봉이 나아보이고 석봉보다는 퇴계선생의 글씨가 훨씬 나아 보이는데... 거참~~~’
위 현판글씨의 주인공을 공개합니다....
옥산서원의 강당인 구인당 전면에 걸려 있는 秋史(1786-1856)의 옥산서원 편액입니다..
경북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을 모신 사액서원입니다.. 옥산서원은 다행이도 그 고약했던 임진왜란의 병화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죠..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본래의 이름은 迪이었는데, 후에 중종의 명으로 彦자를 더해 ‘언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편액은 추사의 편액 뒤쪽에 걸려 있는 것으로 아계 이산해(1538-1609)의 글씨입니다.. 다시말해 추사의 편액은 강당 바깥을 보면서 걸려 있고,, 아계의 편액은 강당인 구인당 내부를 향해 걸려 있는 셈이죠.. 사진 속 아계의 편액이 1574년(선조7) 사액받은 편액입니다.
이 편액은 옥산서원을 이야기하면 늘 함께 거론이 되는 독락당(獨樂堂)에 걸려 있는 옥산정사 편액입니다.. 독락당은 서원 앞을 흐르고 있는 자계(紫溪)를 따라 서북쪽으로 약 700여 미터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회재 선생 생전에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독락당은 안채, 사랑채, 별채의 구분이 뚜렷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이 바로 옥산정사입니다.. 퇴계선생의 글씨입니다..
‘ 난 암만 봐도 퇴계 선생의 글씨가 제일인 것 같은데,,, 거참....’
역락문... 한석봉(543-1605)의 글씨입니다..
역락문은 옥산서원의 외삼문입니다.. ‘역락’은 그 유명한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입니다..
역시 한석봉의 글씨인 옥산서원의 강당인 구인당 편액입니다.. 求仁이란 말은 성리학에서 성현의 학문은 오직 ‘仁’을 ‘求’하는데 있다는 뜻으로 회재의 저서 ‘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인당 남쪽 방은 양진재(兩進齋), 북쪽 방은 해립재(偕立齋)인데 양진은 ‘明’과 ‘誠’ 둘을 모두 갖춰 나아감을 이르는 것이요.. 해립은 ‘敬義偕立’즉 ‘敬’ 과 ‘義’를 취한 것입니다..
獨樂’이라함은 아마도 생각건대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의 이치를 자연 속에서 홀로 즐기며 깨우쳐 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곳 독락당은 회재가 1531년 사간(司諫)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낙향을 할 때 회재선생의 큰 부인이 있던 양좌동으로 가지 않고 작은 부인이 거하고 있던 이 곳 옥산을 거처로 택하게 됩니다.. 작은 부인이 거하고 있던 옥산의 살림집에 사랑채와 별채를 따로 세우게 되니 바로 지금의 독락당입니다.. 회재 선생은 이 독락당에서 1532년부터 다시 조정에 등용되기까지 6년간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독락당 별채에 해당하는 계정의 온돌방 양진암... 안동의 퇴계 선생 산소 오르는 길 초입에도 養眞庵이라 똑같은 글자가 쓰여 있는 立石이 하나 서 있죠.. 퇴계선생께서 잠시 거하셨던 양진암 터를 알려주는 입석입니다..
옥산서원 소장본 중에는 1577년(선조10년)에 내사(內賜)된 귀중한 전적(典籍)이 만여권이나 되어 가까이에 있었던 정혜사(淨惠寺)에까지 보관하기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 때 당시의 병화로 홍문관(弘文館)이 회진(灰 火+盡)이 되어 1599년(선조32년)에 옥산서원에서 책을 나누어 보낸 적도 있다. 그 후 귀중한 서적이 유출되어 정조(正祖)는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문밖으로 못 가져 나간다는 어명을 내린 바가 있었으며 이보다 먼저 서원서책불출문외(書院書冊不出門外)란 퇴계선생의 훈시가 적힌 편액(篇額)이 경서각(經書閣) 앞에 걸려 있으며 독락당(獨樂堂)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앞에는 관찰사(觀察使)의 표기로 서책(書冊)을 문 밖으로 못 가져 나가도록 지시한 편액이 걸려 있다. (옥산서원,독락당 자료집에서 인용)’
옥산서원의 문루(門樓)인 무변루입니다.. 무변이란 말은 염계(廉溪) 주돈이(周敦頤,1017-1073)선생의 주염계찬(周廉溪贊) 중 ‘風月無邊’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 무변루는 본래 납청루(納淸樓)로 불리다가 후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선생의 유허(遺墟)에 맞지 않다 하여 무변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구인당 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인 체인묘입니다... 체인은 말 그대로입니다... 만선(萬善)의 근본인 仁을 체득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죠.. 회재선생의 자신잠(自新箴) 속에 지재체인(志在體仁)이 있습니다.. 사진은 대구청년유도회 답사팀이 분향(焚香) 알묘(謁廟)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조금 이상한 점이 눈에 띌 겁니다... 여성분들이 보이지 않죠??? 옥산서원 체인묘는 아직 금녀(禁女)의 지역입니다... 요즘의 時俗과는 많은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존중하는 수밖에요..
참으로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관심있는 분들은 이미 다들 알고 계시죠... 회재 선생의 후손이 양자과 서자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양자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양동의 무첨당 종손인 이지락 선생과 서자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옥산 독락당의 종손인 이해철 선생... 사진 속 좌의 인물이 독락당 종손인 이해철 선생입니다.. 현재 독락당에 거주하시면서 옥산서원 일대를 관리하고 계시는데 여강이씨 옥산파 문중일은 물론 이거니와 회재 선생 전도사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계시는 선생님이십니다...
퇴계 선생께서 쓰신 회재선생행장(晦齋先生行狀)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몇 자 인용해 봅니다..
“............(중략).... 지난해에 선생의 서자 전인(庶子 全仁)이 나에게 와서 선생의 찬수(纂修)한 제서(諸書)를 보이더니 근일(近日)에 전인이 또 그 아들 준(浚)을 보내어 그 수집한 선생의 시,문,지(誌),명(銘)과 관직을 역임한 시말(始末)이며 언행 사실 등으로써 거듭 와서 나에게 보였다...(중략)...(행장 끝부분)...선생의 부인 정경부인을 봉작한 박씨는 선무랑 숭부(宣務郞 崇阜)의 여(女)인데 불행히 아들이 없으므로 종제 경력 통(從弟 經歷 通)의 아들 응인(應人)으로써 후사(後嗣)를 삼았다. 서자(庶子) 한 사람이 있으니 즉 전인(全仁)이고 二子를 낳았으니 준과 순이다. 전인은 詩, 書를 일고 義方을 알며, 玉山의 별업(別業)은 전인이 받들어 지킨다고 한다..
가정45년(명종21년) 병인년 冬10월 乙亥에 後學 嘉善大夫 前工曹參判 眞城李滉은 삼가 行狀을 쓴다..“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도산우리예절원 여 선생님 5분이 한 앵글에 잡혔네요...
양재 이갑규 선생님...
예절공부 조금 했다고... 그 많은 서적자료 중에서 회재 선생의 봉선잡의(奉先雜儀)가 눈에 띄더군요...
앞에서 간략히 설명 드린바 있는 회재 선생의 서재 겸 사랑채였던 ‘독락당’입니다..
회재선생의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 중 ‘其 十二 獨樂’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其 十二 獨樂
離群誰與共吟壇 (벗마저 떠났으니 눌과 함께 읊으리오)
巖鳥溪魚慣我顔 (바위 새와 시냇고기 내 얼굴 반겨하네)
欲識箇中奇絶處 (이 중에 奇絶한 곳 어디서 찾을 건가)
子規聲裡月窺山 (두견새 울어대고 밝은 달 솟아오네)
사진 속 건물이 독락당 내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정자인 계정(溪亭)입니다.. 건물 너머 아래쪽에는 맑은 紫溪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자계의 넓은 너럭바위에다 기둥을 세워 계곡 쪽으로 정자를 달아낸 구조인데.... 이 계정을 계곡 쪽에서 보면 아래사진과 같은 모습입니다..
역시 회재선생의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 중 ‘其 十一 溪亭’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其 十一 溪亭
喜聞幽鳥傍林啼 (숲 속에 우는 새는 듣기에도 즐겁구나) 新構茅簷壓小溪 (시냇가 경치따라 집 한 채 이룩했네) 獨酌只邀明月伴 (밝은 달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日間邀共白雲褸 (한간의 흰 구름과 함께 살아보리라)
회재선생의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을 잠시 음미해보았습니다.. 특히나 제 생각을 잡아끄는 부분은 관물(觀物), 관심(觀心) 그리고 존양(存養) 부분이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는 누구처럼 세간에서 한 건 챙겨 산으로 튀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였습니다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산으로 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튀되 入山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퇴계선생의 도산기에 보면 정말 제 생각을 정확히 읽은 듯... 산림에 居하는 두 부류에 대한 퇴계선생의 뛰어난 안목이 잘 표현된 부분이 있죠... 또 인용해봅니다..
" 그러나 옛날 산림을 즐기는 사람을 볼 때 거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현허(玄虛)함을 사모하여 고상(高尙)함을 일삼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또는 도의(道義)를 즐기어 심성(心性)을 기르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나니 전자를 말하면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인륜을 어지럽게 하여 새와 짐승같이 살면서 그것을 그르다고 생각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후자로 말하면 즐긴다는 것이 조박(糟粕)일 뿐이어서 전할 수 없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구할수록 더욱 얻지 못하거늘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라나 차라리 후자를 위하여 스스로 힘쓸지언정 전자를 위하여 스스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느 여가에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데 골몰하는 등의 일이 나의 영대(靈臺:마음)에 들어오겠는가..“
다시 한번 편액글씨들을 들여다봅니다... 뭔가 달라졌을까요??
일전에 무호서당 이성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서예에서 말하는 ‘入木三分’이라는 고사를 인용하셨는데 요지인즉슨...
‘왕희지가 임금 앞에서 현판글씨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희지가 글쓰기를 마쳤으나 임금은 그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써보라고 명을 내렸다나요.. 목수는 다시 글씨를 쓸 수 있게 왕희지가 이미 쓴 글씨를 대패로 지우기 시작했는데.. 아뿔사??? 어찌된 영문인지.... 분명 붓으로 쓴 글씨인데 마치 무언가로 먹물을 박아 넣은 듯... 대패로 아무리 깎고 또 깎아도 나무 속에 까지 깊이 스며든 먹물이 사라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때서야 임금은 왜 왕희지를 명필이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밤....
‘入木三分’을 머리 속에 띄워 놓고 다시 한번 들여다봅니다...
2009.1.17 억시 추운 새벽녘
송은석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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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