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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컴의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이 글을 발견해서 기뻤습니다. 이영문 교수는 현재 국립공주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원고는 그가 아주대학교 교수 시절에 강의했던 원고입니다. 오늘 원고를 쭉 다시 읽어봤는데, 감탄했습니다. 참 잘 쓴 원고이고 동의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 원고는 우울증에 대한 원고이지만, 조현병, 조울증을 대입해서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건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지의 기본원리는 우울증이든, 조현병이든, 조울증이든 다 같기 때문입니다. (원고의 맨 뒷부분에는 이영문 교수가 추천하는 추천영화목록과 참고문헌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좋은 영화, 좋은 책들인 듯합니다.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영문 교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왔습니다. 의과대학 학부시절부터 그는 이호영 교수(전 연세대의대 정신과 교수, 전 아주대학교 총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저는 비록 미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우리나라 지역사회정신보건이 이만큼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이호영 교수님의 숨은 공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대생 교육에서 지역사회정신보건 및 정신재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병이 아니라 사람에게 초점을 두는 진료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강의는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1980년대 당시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영문을 중심으로 <정신보건연구회>라는 공부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공부모임의 멤버들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에 진출한게 1990년대 초반인데, 이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정신보건법 제정운동" 이었습니다. 1995년 12월에 정신보건법이 제정되고 1997년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기 까지 이 공부모임 멤버들의 5년여에 걸친 피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5년도에 정신보건법안의 국회통과를 위해서 관련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지역사회정신보건 및 정신재활에 뜻을 둔 정신건강의학전문의, 정신전문간호사, 정신의료사회복지사, 임상심리전문가들을 결집하여 1995년 4월에 <정신사회재활협회>라는 전문가단체를 만들었고, 그해 7월에 창립된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의 발족을 지원했습니다. 저는 1995년 초에 개최된 <정신사회재활협회 창립발기인대회>에 참석했을 때 이영문 교수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이 단체에서 저는 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기에, 이영문 교수와 긴밀히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영문 교수는 이 단체 활동과 <경기도 정신보건기술지원단> 활동을 중심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갔습니다. 현재 경기도 지역의 지역사회정신보건사업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활발한 것에는 이영문 교수의 공이 큽니다.
이영문 교수는 치료의 개념을 뛰어넘어 공동체, 그리고 사회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펴기 위해 아주대 의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수년간 "치료공동체 소통과 담론"이라는 사회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국립공주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수년째 국립병원 개혁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영문(좌), 이호영(우) 교수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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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대한 이해와 치료
이 영 문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에 대한 방어이기 때문이다 "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우울이란 무엇인가?
우울은 영어 단어로 표기할 때 Depression 으로 표기된다. 이 용어를 경제학에서는 경기 침체로 쓰고 지질학에서는 땅이 내려앉음을 의미한다. 우리 문화에 맞게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모두 우울과 연관된다.
좌절감, 무력감, 실망감, 외로움, 슬픔, 괴로움, 고독감, 죄책감, 허탈감, 자기를 추스릴 수 없는 상태, 의지로 어쩔 수가 상태,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 극도의 양가감정, 상실감, 배신감 등
인간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라는 세 가지 영역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동물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균형을 잃게 되고 우리는 이런 불균형 상태를 정신질환의 한 범주로 진단내리고 치료해야한다. 과연 우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우울은 발생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감정이라는 영역에 큰 오류가 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우울증이라고 부른다. 물론 생각의 영역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이차적으로 우울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행동의 영역에서 결함이 있을 때 이는 역으로 생각과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울은 즐겁지 않은 감정 상태이며(나쁜 감정이 아님), 즐거운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며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정상적으로 작용해야할 신체 장기의 문제가 야기된다. 흔히들 뚜렷한 병이 없는데도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고 설사를 하거나 변비에 걸리고,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기가 싫으며 말도 하기 싫어지고 기운이 나지 않으며 밤에 아무런 이유 없이 잠이 오지 않거나 밥맛이 없어지는 일상의 경험들은 모두 우울의 변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왜 우울해지는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우울해지는가?
히포크라테스가 수천 년 전부터 제안한 인간의 네 가지 체액이론(Four Humors)은 지금도 우울증의 이해에 있어 유용하게 응용되고 있다. 고대 생리학에서는 인간 내부에 4가지 종류의 체액(혈액, 점액, 담즙, 흑담즙)이 흐른다고 생각하였다. 이 체액의 배합이 결국 인간의 성격을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본 것이다. 당시 인체 해부가 금지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매우 놀랄만한 분석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울증은 흑담즙이 다른 체액보다 훨씬 더 많을 때 생긴다고 하였다. 우울증을 뜻하는 '멜랑코리(Melancholy)'라는 단어는 흑담즙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히포크라테스는 우울을 인간내부에서 연유하는 내재적 개념으로써 파악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우울을 슬픔에 대한 방어라고 설명했으며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상태로 정의하였다(hostility toward self). 프로이드의 본능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늘 즐거움을 따라 움직여야하며(principle of pleasure), 이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인간은 우울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하였다.
또 다른 정신분석학자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생후 3-4개월부터 인간은 우울을 경험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하였다. 엄마와 유아의 관점에서 엄마를 좋은 엄마(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 늘 자기를 만족시켜주는 대상), 나쁜 엄마(좋은 엄마의 반대)와 구분하다가 이것이 통합될 때 우울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즉, 한 대상이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고 이것이 한 대상이로 통합되어지는 현실감각이 생길 때 인간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사랑과 증오가 같은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아이는 자신 내부에 내재된 공격적 충동이 엄마를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depressive fear)에 빠지게 되고 만일 사랑하는 엄마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속에 내재된 나쁜 충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감정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며 이는 우울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모두 병적이라고 분류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우울한 입장을 거쳐 인간은 성장하는 것이며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대상과 통합적인 관계를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사회화된다. 결국 우울은 인간이 겪는 아픔이기도 하지만 성장을 촉진하는 매개체로로도 작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만일 우울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성장으로 볼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우울을 경험하며 이중의 일부가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울의 진화론적 기능론(Evolutional functioning of depression)
우울증에 대한 많은 사실이 밝혀져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이라는 주제는 많이 연구되고 일치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그토록 불쾌하고 비생산적인 기분 상태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
인간은 역사적 변천을 통해 꾸준하게 진화하였다. 여기서 필자가 얘기하는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인들에 비해 현대인들의 다리 힘은 더 세고 튼튼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양결핍에 걸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시력 또한 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물고기를 잡거나 그릇을 만드는 창조성은 더 뛰어났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 인간의 유전자는 전파되고 유지된다. 인간의 유전자중 일부는 어떤 질병의 원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질병을 유발하는 많은 다른 유전자들은 실제로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다른 유전자들과 조합을 이루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예를 들어 빈혈증을 유발하는 어느 유전자들은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효과를 보인다. 어머니에게 해가 되지 않지만 아버지에게는 이익이 되는 또는 그 반대인 유전자는 여전히 앞으로도 생존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울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인간을 우울증이라는 큰 질병에 빠뜨림에도 불구하고 자연선택적으로 제거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전 인구의 10%는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앞으로도 앓게 될 것이다. 왜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우울 인자들이 진화에 의해 제거 되지 않는 것인가? 많은 학자들은 우울에 의한 질병의 위험도보다 우울이 가진 순화적 기능론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불안과 같은 맥락에서 우울은 인간이 더 진보하기 위한 정지나 후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시기나,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갈 때 더 이상의 탈진(burnout)을 예방하는 것 등은 모두 우울의 순기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단속에서의 역학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흥미롭다. 10명 중 1명은 우울증을 앓고 9명은 한 사람이 앓는 질병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더 조심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이타적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집단의 위기가 있을 때 누군가가 아프게 되고 이 같은 질병행동을 통해 인간 집단은 생존의 방향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우울은 더 이상의 슬픔에 인간이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존재로서도 기능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 저자가 결코 우울에 대한 예찬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우울과 우울증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울증이라는 질병 단위의 아픔이 있을 때는 반드시 치료라는 유용한 도구로 회복시켜야 하며 적극적 도움을 주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우울을 병적으로 우선 파악하려는 질병의 사회화 현상(medicalization)은 지양해야 한다. 마치 현재 우리나라가 비만이라는 개념을 질병화로 만듦으로써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집단적 의료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를 역설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우울과 창조성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인간을 괴롭혀온 질병 하나를 생각한다면 결핵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결핵환자는 1950년대까지도 사회의 부적응자나 무법자로 때로는 패배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문인들과 과학자들은 자신의 결핵을 창조성에 따른 자연적 결과로 받아들이는 모순되지만 당당한 태도를 작품속에 많이 남겨두었다. 결핵을 앓는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동반되는 우울증 또한 그들은 창조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였다. 때론 우울증이 있는 인물들은 뭔가 남다른 감성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인식되곤 하였다. 히포크라테스 또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예술가, 수학자, 또는 사색을 즐겨하는 종교인, 도덕가 들이 쉽게 우울증에 걸리는 체질임을 밝혀두고 있다.
창조적 인간들이 모두 우울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울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창조적 인간이 많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이런, 예이츠, 버지니아 울프, 아브라함 링컨, 윈스턴 처칠, 훼밍웨이, 에드가 엘런 포, 오 헨리, 베토벤, 브람스,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등
이들은 모두 우울속에서 창조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귀가 먹고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없다는 현실앞에 베토벤이 겪었을 우울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변의 많은 우울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우울증은 강한 자기 성찰을 일으키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성격에 더 잘 맞게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기여한다는 사실에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일부 진화정신의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며 우울증을 대인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적 질병의 한 축으로까지 이해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신의학이 추구하는 인간 질병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신의학과 인간행동에 대한 이론
1) 생물학적 이론
정신의학은 임상적 경험의학의 하나로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나 행동을 이해하고 치료하면서 발달된 학문이다. 이 학문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은 몇 가지 모델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생물학적 모델이다. 정신의학도 생리학이라든지 생화학과 같이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 임상적인 예를 들자면 내과에서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환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대부분 생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폐렴균이 신체내 특히 폐장에 침입하면 염증을 일으켜 그것이 폐렴으로 발전되고 결과적으로 침해받은 폐의 조직이 파괴되고 또 이 침해를 막고 최소화하려는 신체의 보호기능이 발동하여 여러가지 조직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폐렴이 생기면 이 모든 변화의 내용과 한계를 파악해서 확진이 되고 침입한 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를 투여하여 균을 일단 소멸시키면 신체의 회복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어 치유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순수한 생물학적 접근의 의학 이해와 치료방법이다.
정신의학에서도 생물학적인 모델로 정신장애와 이에 따르는 비정상적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 치료한다. 예를 들어 환청이나 이상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증상이 있다면 이것을 뇌에 있는 특수한 신경전달물질의 신진대사에 장애가 와서 이차적인 증상으로 사고의 장애와 행동의 장애가 온다고 본다. 그래서 이 물질의 신진대사의 이상을 시정하는 약물을 투여하여 증상을 제거시키면 이 치료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병을 이해하고 이에 준한 치료를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정신의학이 발달하면서 그 초창기에 인간행동의 이해를 생물학적 접근으로만 시도하는 것이 잘못이고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두된 이론이 심리학적 이론이다. 정신의학에서 심리학적 이론으로 기반을 잡은 것이 정신분석이다. Sigmund Freud가 제시한 정신분석 이론은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가장 편리한 이론으로 약 반세기에 걸쳐 독보적인 자리를 잡아왔다.
2) 정신분석 이론
정신분석 이론 중에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제일 많이 응용되는 것이 구조설이다. 구조설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기능별로 나누어 세 가지 정신장치(mental apparatus)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Freud의 유명한 정신구조설로서,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Id, Ego, Superego로 나누고 있다. 즉 인간행동은 이 세 가지 장치가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에 따라 특정지어진다. 그리고 이 구조안에 갈등이 생기면 노이로제 같은 정신장애를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이 갈등은 순수하게 정신내적 갈등일수도 있지만 외부와의 관계나 대인관계 그리고 외부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의해 생길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구조의 갈등의 뿌리를 찾으려면 과거 자라온 발달의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서 어떤 시기에 혹시 받았을 충격이나 상처를 기억에 떠올려 이해를 해야 한다. 그 외에 환경적인 충격요소도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과거의 경험들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3) 환경이론
정신의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소로 환경의 영향도 중요시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주변의 가족, 사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의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가까운 환경으로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이 경험에서 스스로 적응하고 사는 방법을 학습한다. 스트레스이론이 대두되면서 과도한 스트레스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적응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빠르게 변천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환경에서 오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슬기롭게 관리해서 마음과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상기의 생물․정신․환경 세 가지 모델을 최근에 와서 하나의 종합적인 모델로 합쳐져야 한다고 정신의학은 강조하고 있다. 환원주의적인 사고로 그 어느 한 가지 모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간행동을 종합적이고 다원적인 모델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무엇이 정상인가? (Definition of Normality)
정상이란 무엇이고, 비정상이란 무엇일까? 정상과 이상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요즘 제정신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 성격이 참 괴팍한데, 혹시 정신병자 아닙니까?", "요즘 자꾸 쓸데없는 잡념이 떠오르고, 괜스레 불안한데 이러다 미쳐 버리는 건 아닐까요?"
정신과 의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때로는 농담 삼아, 때로는 자못 진지하게 그러한 것들을 물어 온다. 사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정신 건강은 어떤 상태이고, 정신 질환은 또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로서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정신의학적으로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즉 정신질환자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법의학적 측면이나 윤리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대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그 사람이 정신질환자인지 아닌지 여부가 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 치료를 받게 할 경우에는 먼저 그 사람이 과연 정신 질환자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통계적 기준
어떤 집단의 통계적 평균치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비정상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신장이나 체중 같은 경우, 지나치게 뚱뚱하거나 지나치게 마른 사람, 그리고 너무 키가 큰 사람이나 너무 작은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정신적 측면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다. 이 기준대로라면 아주 똑똑한 사람,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사람,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모두 실현시키며 사는 사람도 비정상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2) 사회적 기준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어디나 그 사회의 표준과 기준이 있다. 즉 이러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바람직한 행동이며, 반대로 이러이러한 것은 용납되지 않는, 바로잡아야 할 행동이라는 사회 구성원들간의 묵시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기준을 상당히 벗어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준에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에서는 정상으로 간주되는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비정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은 나체로 다니거나 몸에 문신을 하거나 코걸이를 하는 등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과거에 현대 문명사회에서 이런 행동들은 금기시된 적이 있고 틀림없이 비정상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일부로 규정지었지만 지금은 본인이 선택하는 동성애적 행위는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입장을 바꿨다. 반대로 과거에는 흡연을 정상적 행동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알코올 중독과 마찬가지로 물질남용질환의 일종이라고 규정지었다.
3) 적응과 부적응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세 번째 기준으로 거론되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복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행동이 개인이나 사회에 악영향을 줄 때, 즉 부적응일 때 그 사람을 비정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서 사교적인 모임에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할 수 없는 사람, 또 비행기를 타지 못해서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그럼 회피 행동이 그 사람의 개인적 복지에 장애를 주기 때문에 공포증이라는 정신적 불건강 상태로 간주된다. 또 폭력 조직을 구성하고 마약을 복용하면서 파괴적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사회 전체의 복지에 악영향을 주므로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라는 정신질환자로 분류된다. 알코올 중독자는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사람 개인의 복지에 장애를 주며, 또한 가족과 사회에 폭력이나 경제적 손실을 가함으로써 사회 복지에도 장애를 주는 정신 장애의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준 역시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독립 운동가나 사회 개혁자, 혁명가는 그들의 신념으로 인해 그 사람 자신과 가족, 사회에 적어도 일시적으로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 과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써 지동설을 주장하며 교황과 싸웠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법정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 개인적 고통
마지막 기준은 그 사람 자신이 개인적,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 유무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불안이나 우울, 불면증, 두통 등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경험하고 또 호소한다. 예를 들면 강박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어떤 비합리적인 생각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경우 그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유일한 근거는 그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괴로움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절대적 기준은 되지 못한다. 조울증 환자나 일부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우,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고, 과대 망상을 갖고 있어서 다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감에 젖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 고통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면 이들도 정상인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렇듯 정상과 이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 기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대개는 이 네 가지 기준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히 혼합해서 적용하고 있고, 또한 그 기준을 사용하는 집단에 따라 각자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준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울증에 대한 임상의학적 이해
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각자의 형태와 질병양상이 다르게 진행한다. 남자와 여자에 따라서도 다르며 나이에 따른 반응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문화에 따른 차이도 두드러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체고통을 호소하는 우울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 반면에 서구사회에서는 자신의 우울감을 정확하게 심리적으로 설명한다.
1. 내인성 우울증(endogenous depression)
우울증은 다양한 원인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요소와 심리적, 사회적 요소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객관적으로 큰 스트레스가 아닌 상황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몸이 가라앉고 아침에 일어나면 더 피곤하며 기분이 떨어지는 현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대부분은 신체내부에서 기인하는 내인성 우울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중년기 남성과 여성이 겪는 스트레스와 무관한 우울증은 우리 체내에 있는 호르몬의 불균형에서 시작되고 점차 스트레스에 약한 유기체로 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출산직후에 보이는 임산부들의 우울증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인성 우울증은 생물학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듯이 적절한 우울증 치료제로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병의 시작도 빠르며 치료도 비교적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 같은 신체 반응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우울을 부정하다가 스트레스와 연관된 복합적 우울증으로 발전시킨다. 내인성 우울증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잠이 잘 오지 않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게 된다.
2) 식욕이 없어지며 체중이 감소한다
3) 뚜렷한 스트레스를 찾기가 어렵다
4) 오후보다는 오전이 견디기 어렵다
5) 병이 발생하기 전에 사회적 기능은 대부분 우수하게 유지된다
2. 반응성 우울증(Reactive depression)
상기 내인성과는 달리 뚜렷한 발병의 주요 유발인자가 있다. 갑작스런 실직이라든가, 가정불화, 청소년의 경우는 시험의 실패, 연인과의 헤어짐, 큰 수술이 요구되는 질병에 걸린 경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우울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는데 이들이 취약해지고 이 틈 속으로 사회적 요인들이 우울증을 유발시킨다고 판단되는 경우이다. 내인성에 비해 우울증 치료제에 부분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으며 면담치료나 인지행동치료와 같은 심리적 치료가 병행이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없이도 질병을 유발시킨 스트레스가 제거된다면, 예를 들어 취직이 다시 되거나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는 일이 발생하면 병을 즉각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을 다음과 같다.
1) 잠이 더 많아지거나 그 반대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2) 오전보다는 오후가 더 심하다
3) 대부분은 우울증에 선행된 스트레스가 존재하고 인과관계를 지닌다
4) 신체 증상보다는 심리적 불안정을 더 많이 호소한다
5)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반응이 느리거나 부작용이 많이 발생한다
3. 복합적 우울증(내인성과 반응성이 뒤섞임)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요소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경우다. 실제 임상에서는 이런 경우가 더 많음을 느끼게 된다. 부정적 감정이 이유 없이 나타나면 이로 인해 주변 생활사건에 대해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되고 그릇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결과는 다시 부정적 감정과 우울감을 더 유발하게 되고 이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스트레스가 우울증의 발병율을 높이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는 굴욕감이고 두 번째는 상실감이다. 생물학적 취약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사회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겪는 고통은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결국 최근 많은 학자들은 사회적 사건과 인체 내부의 반응이 매우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 정신병적 우울증(Psychotic depression)
우울증이 심하게 진행하여 정신병적 요소, 즉, 환청, 환시, 피해망상, 심하고 부적절한 피해망상, 의심 등이 동반되는 경우이다. 자살사고가 팽배해지며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하루종일 우울한 감정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눈에 띄게 체중이 감소하고 식욕이 없으며 이유를 알 수없는 공포와 불안이 교차하기도 한다.
우울한 감정에 의해 사고장애가 일어나 주변에 대한 의심이 퍼져가고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이럴경우는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와 상의하는 것이 현명하다. 상식적 수준의 위로만으로는 극복이 어렵다.
5. 조울증에 의한 우울증(Bipolar depression)
우울증은 단극성 우울증(unipolar depression)과 양극성 우울증(bipolar depression)으로도 구분된다. 단극성 우울증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수준의 우울증을 생각하면 되지만 양극성 우울증인 경우는 진단이 매우 어려워진다. 양극성 우울증은 조증 삽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조증은 우울증의 정반대 형태로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좋아지고 팽창하여 이 세상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상태를 느끼게 한다. 흔히 말수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행동이 분주하며 평소와는 달리 우울하던 사람이 일을 부지런히 하게 되고 잠을 자지 않고도 기운이 나며 모든 일에 간섭하기 시작하고 감정기복이 심하게 된다. 점차 발전하여 기이한 행동, 환청도 듣게 되고 과대망상이 명확해질 때 주변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알게 되고 병원을 찾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 명확한 우울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조증 삽화는 양극성 우울증이 선행된 것으로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울정신병은 매우 응급적인 상황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는 입원치료를 하는 것이 안전하고 조증을 거쳐 우울증으로 다시 진행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다.
우울증의 치료
1. 약물치료에 대한 기전
지금도 결핵치료를 산좋고 물맑은 곳에서 산림욕과 영양가 있는 음식과 심리적 안정만으로 치료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이고 현대의 과학을 무시한 행동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적합한 결핵치료 약을 수 개월 복용하고 그 다음에 요양을 취한다면 납득이 되는 치료로 인정될 수 있다. 우울증에 대한 치료경향도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다. 1960년대 최초의 우울증 치료약이 개발되었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차로 이 약물들은 우울증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80년대 들어 프로작(prozac)이 개발되었을 때는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약으로 인식되어 여성들의 핸드백에 프로작을 넣고 다니는 것이 아스피린 두 알을 넣고 다니는 것과 동일한 유행의 트랜드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유독 강하여 정신질환을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거부가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정신과가 아닌 내과나 외과계열에서 치료받는 것을 감안하면 실재로는 우울증에 대한 약물치료가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0년간의 임상적 치료를 통해 우울증 치료약물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인체 내부에 존재하는 노오에피네프린,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에 기여하는 항우울제는 심리치료(면담치료), 인지행동치료 등과 병행할 경우 매우 높은 치료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최근의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약이든 좋은 치료효과를 기본적으로 나타낸다. 약물치료는 기본적으로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비유될 수 있다. 밥을 먹고 우리는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한다. 밥을 먹는 것은 움직이기 위한 지렛대와 같다. 가장 기본적인 치료방향으로 항우울제는 작용한다. 약물치료만으로 우울증이 회복된다기 보다 지레대의 역할이 선행된 다음 인지, 사고, 감정을 발달시키는 면담치료, 행동치료가 동반될 경우 치료가 극대화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2. 심리사회적 치료
어떠한 형태의 심리사회적 치료든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 충분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특히 인지행동치료는 도움이 된다. 현재와 어린 시절의 외적인 사건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는 인지구조를 바꾸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파괴적인 생각들을 갖기 쉬우며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으면 자신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우울증은 그릇된 논리의 결과이므로 부정적인 추론을 바로잡으면 객관적 타당성을 갖기 쉽다는 이론이 전제된다. 그러나 실제 임상에서 우리나라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치료를 시행하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다는 것이 필자의 단견이다. 감정적 교류에 익숙한 우리 문화는 결코 합리적 사고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인간관계가 형성된 뒤에야 합리성을 따라가는 경향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관계 속에서 합리성이 추구된다. 문화적 변이를 잘 고려하고 개인의 특성을 살려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
우선 엉뚱한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 최선의 치료다. 우울증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돕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당사자들을 좌절시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중증 상태로 진행된 우울증 환자들에게 상식적인 얘기를 권하는 것이 오히려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다. 쉽게 안심시키려고 한다든가 심약한 마음을 꾸짖는 태도가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마음이 약해서 병이 생겼으니까 마음을 강하게 가지라고 하는 예는 허다하게 보는 경우이다. 우울과 우울증 상태는 판이하게 틀리다. 우울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마음을 강하게 가지자고 얘기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지만 우울증으로 진행된 경우는 전문가들과 일차로 상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정신질환의 치료는 정확한 평가가 우선 순위다. 섣부른 정신과 약물치료의 남발 또한 경계해야 되기 때문에 몇 명의 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받은 후 치료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약물치료도 일회로 끝나지 말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해본 뒤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찾도록 권하는 것이 순리이다. 수 십 종류가 넘는 치료약물에 대해 일반인들은 너무 쉽게 편견을 갖는다.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한 정신질환의 하나이다. 잦은 재발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꾸준히 당뇨병 관리하듯이 자신을 가꾼다면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질환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지금도 질병에 대한 의학 본연의 목표는 변화가 없다. 유명한 내과의사인 E. L. Trudeau 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가끔 치료하고 자주 도와주고 언제나 위로한다
의학의 목표는 언제나 그랬듯이 환자를 돕는 것이지 인간 종 자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의학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지원을 억제하고 부유한 사람, 돈을 가진 자들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또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고 집단의 이기적 질병관에만 의존하며 발전한다면 이는 또 다른 우생학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맺는 글 ; 인간의 복원력(Resilience)을 믿자
우울은 인간을 정체시키고 생산성을 잃게 하며 미래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울은 인간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수 있는 유용한 자원으로 쓰일 수 있다. 정신의학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의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인간의 창조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을 둘러싼 냉엄한 현실세계가 그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을 겪는 사람들은 고통속에서도 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근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우울증을 완화시킨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변의 고통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한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는 수많은 요소가 관여하고 있다. 생물학적 요인인 기질로부터 엄마와 같은 인적환경과의 상호작용, 학교, 직장과 같은 사회와의 상호작용 등을 통해 인간은 변형되고 발달된다. 그러나 모든 정신병리는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서 출발한다. 투명한 관찰이 더 중요하며 악의 없는 격려와 지지가 중요하다. 온갖 위험요소가 가득한 세상이지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복원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복원력은 용수철의 되튀김 현상에서 기인한 물리학적 개념이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아닌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용수철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복원력을 믿지 않는 세상은 탄력성이 없다. 결국 인간 복원력은 사회 복원력의 한 부분을 구성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우울로부터 인간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세상을 회복시킬 용기와 지혜를 이미 가진 셈이다.
덧붙이기 :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몇 가지
1) 쉬핑 뉴스 : Shipping News, 미국 2000
2) 제 8 요일 : The Eighth Day, 프랑스 1995
3) 개 같은 내 인생 : My life as a dog, 스웨덴, 1988
4) 라이프 애즈 어 하우스 : Life as a House, 미국 2002
5) 아름다운 비행 : Fly away Home, 캐나다, 2000
6) 죽은 시인의 사회 : Dead Poets Society, 1994
7) 사이더 하우스 : The Cider House Rules, 미국 1999
8) 신과 함께 가라 : Vaya Con Dios, 독일, 2002
9) 굿바이 레닌 : Goodbye Lenin, 독일, 2003
10) 흐르는 강물처럼 : A River Runs through it, 미국 1990
11)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A time for Drunken Horses, 이란 2004
12) 와이키키 브라더스 : 한국 2001
13) 여섯 개의 시선 : 한국 2002
14) 송환 : 한국 2004
15) 여자,정혜 : 한국 2004
16) 소피의 선택 : 미국 1988년
17) 박하사탕 : 한국 1998년
18) 굿윌헌팅 : 미국 1999년
19) 아들의 방 : 이탈리아 2002년
20) 아이리스 : 영국, 2002년
참고문헌
1. 수잔 손택(Susan Sontag), 은유로서의 질병. 도서출판 이후. 2002
2.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사이언스북스, 1999
3.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04
4. 케이 레드필드 제미슨(Kay Redfield Jameson), 자살의 이해. 도서출판 뿌리와 이파리, 2003
5. 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Visible Darkness). 문학동네, 2002
6. 대한신경정신의학 교과서, 제 2판,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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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편의 영화 중 2편 봤는데 나머지 18편 편안한 시간에 함 보고 싶네요. 좋은 info에 감사
아! 그러셨네요. 이영문 선생님이 추천하신 영화는 다 괜찮은 영화일 듯해요. 저는 이번에 본 건 아니고, 이전에 본 적 있는 영화가 5편이에요. 죽은 시인의 사회, 흐르는 강물처럼, 와이키키 브라더스, 박하사탕, 굿윌헌팅을 본 적 있어요. 하지만 오래 전 일이라 감상문 올릴 정도가 못되네요. 혹시라도 참 좋다 느끼시는 영화가 있으면, 영화평 짧게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