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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교회(고전4:19-20)
대민성결교회 / 이석민 목사
벌써 부족한 목사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세월이 15년이나 되었습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옛 말이 되었고 현재는 10년이 아니라 수개월 안에도 강산이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과학의 발달로 하루가 달리 새것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도 예측불허 합니다. 자연환경이 변화무쌍합니다.
예레미야서 51장 29절에 "땅이 진동하며 소용돌이치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섰음이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땅이 사실은 진동하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 시대가 너무 어수선합니다. 우리 사회가 불안합니다. 전쟁의 잔인, 경제 질서의 붕괴, 계층의 갈등, 도덕과 윤리의 증발, 모든 가치관이 사라지고 혼란만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성도 된 우리가 변화무쌍한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능력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합니다. 성도가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안타까움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세상이 교회를 지배하려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끌려가며 매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가 역할을 다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기능이 있겠지만 특별히 사회를 향하여 해야 하는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사회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라는 것은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권위'에서 오는 그런 힘을 말합니다. 즉, 교회는 스스로 그런 힘을 갖고 있을 때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발견하고, 그 일에 우리 전부를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은혜 안에 사는 이들은 심히 적은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성도인 우리와 교회의 역할 여하에 따라서 소망을 가질 수도 있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기뻐하실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평안을 누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 서로가 섬김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기득권을 주장하거나, 높아지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마찰이 생기고 갈등과 아픔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칭찬하고 높여주고, 겸손하게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면 따뜻해집니다.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면 행복한 교회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급호텔 종업원이 투숙객을 섬기는 것 이상으로 교회에서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창립15주년을 기념하며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는 일에 함께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교회는
1.주님의 허락을 따릅니다.(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을 앞세우지 말고 능력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교회를 세웠고,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앙도 부패되고, 윤리도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울이 떠난 이후에 고린도에 흘러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에게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바울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바울은 정통 사도가 아니요, 핍박자였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파벌을 조성하여 성도들 간에 갈등이 생기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신앙이 혼돈되었고, 진리에서 떠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자들을 책망하며 권면합니다. 바울이 교회에 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 교만한 자들을 책망합니다. 너희들이 내가 교회에 오지 않을 것처럼 교만하였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너희에게 갈 것이다. 그래서 교만한 자들의 말의 진실 됨 보다는 그들의 삶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신앙을 본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한 가지 분명한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이 모든 일들을 주께서 허락하시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가 의미하는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 아무리 훌륭한 목회계획일지라도, 궁극적으로 그 일을 인도하시고 성취케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계획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계획보다 예수님의 계획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의 모든 계획을 그 순간 철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저한 계획 수립과, 이것은 예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스스로 결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역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자주 갈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과 좀 생활의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하지 않는 고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 결혼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또,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업은 하나님의 계획인가, 아닌가? 어떤 때는 우리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망함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인가?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합니다. 내가 병이 든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인가?’ 이런 것들은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는 하나의 영적 고민 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는 인생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만인의 연인이요 세계 남성의 우상처럼 군림했던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수백 통의 팬레터도 매일 받습니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너무나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마릴린 먼로는 1962년 어느 날 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는 해수욕장과 같다”는 글을 남기고 자살하였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세상의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을 우리는 꿈 꿀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또한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안됩니다.(마10:29) 오늘 건강한 사람도 내일 하나님께서 오라 부르시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눅12: 20)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을 아껴서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일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2.말에 있지 않습니다.(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 앞에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2-13)
사도 바울은 모욕 당하고 저주를 받아도 축복하였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참고, 비방을 당해도 좋은 말로 타일렀습니다. 힘없고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재주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요즘 예수쟁이들은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참 사도라면 말로 따져서 시비를 가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중요한 것은 모욕, 핍박, 비방이 아닙니다. 누가 인생의 승리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백 마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실천입니다. 병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해설보다 비록 말은 어눌할지라도 그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척 하는 것이 교만이요 허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직에 대해서 평가할 정도라면 자신들이 사도 정도의 능력이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로 그치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교만이라 하고 있습니다. 무디가 한 번은 말씀을 전하고 내려왔는데 어떤 지성인인 듯한 분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무디의 설교중 문법이 틀리고, 단어가 부정확한 곳을 몇 곳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말에는 비록 졸하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당신은 그 정확한 문장으로 몇 사람이나 구원시켰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종 종 볼 수 있습니다.
말 많은 말꾼은 정말 위험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고,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좋은 일은 덮어두고 나쁜 일은 퍼뜨리고 다니며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게 합니다. 말꾼이 많은 교회일수록 교회 은혜롭지 못하고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신앙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위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언10장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사람의 언어가 그 사람의 운명의 기초요,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말을 심는 자는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는 자는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는 자는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자제하고 자신을 위해서도 긍정적인 말을 즐겨해야 합니다. 시험 들었다는 말 대신에 은혜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겠다는 말 대신에 살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없다는 말 대신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입술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시면 인간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자주 하게 됩니다.
잠언13장3절에 “말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입술을 크게 벌린다는 것은 함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입술의 열매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말, 칭찬과 격려의 말,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되는대로 말합니다. 생각 없이 마음만 앞서고, 감정만 복받쳐서 말합니다. 그리고 악한 말을 주저 없이 행합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말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36-37절에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무익한 말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말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들은 무익한 말을 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신에 가득 찬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무익한 말은 비방하는 말입니다. 남을 해치는 말입니다. 참소하는 말입니다. 저주하는 말입니다. 더러운 말입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익이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정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고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말은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심으면 싹이 납니다. 줄기가 생깁니다. 잎이 납니다. 커집니다. 꽃이 핍니다. 열매가 맺어집니다. 이것이 씨를 뿌리는 원리입니다. 모든 말은 씨앗과 같습니다.
성도 된 우리는 무엇보다도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말, 긍정적인 말, 위로와 격려와 소망과 용기를 주는 말, 칭찬하는 말, 이웃을 살리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물론이고 이웃의 삶까지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된 우리는 말도 은혜 가운데 잘 해야 하지만 말로만의 신앙이 아닌 능력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평가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잘난 척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삶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말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내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의 삶 속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심령 천국, 교회 천국, 가정 천국, 생활 천국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얼마나 천국 시민다운 가치관 인생관을 가졌는가? 얼마나 하나님 자녀다운 인격을 갖췄는가? 얼마나 하나님 자녀다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 과연 지금 천국 생활을 하고 있는가? 신앙은 내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삶을 바로하고, 오늘 내 삶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실제로는 지옥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천국 시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교회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말을 실천하는 능력있는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오직 능력에 있습니다.(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은 교만에 빠진 고린도교회의 능력을 알아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교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복음의 능력은 아닙니다.
말의 능력, 육체의 능력, 감정의 능력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의 능력은 심판, 정죄 ,거짓, 비방으로 이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큰소리를 치고, 말로 상처를 줄 때, 아프게 할 때, 그들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육체’의 능력은 폭력으로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행동들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감정’의 능력은 분노, 혈기부리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사실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것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없고, 문제해결의 수단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 저급한 가치의 능력으로 삶의 수단과 문제해결 방법으로 삼는 자마다 패배할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위와 같은 저급한 육체와 감정의 능력을 보인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생각했던 능력은 화려한 외적인 은사 등이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을 방언, 통변 등의 외적인 은사들처럼 성령을 받은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부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능력에 대한 이해가 엇갈림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능력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있어서 고린도교인들의 수준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 남보다 뛰어나서 보란 듯이 살게 되는 능력, 남보다 더 많거나 뒤지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은사를 가질 수 있는 능력 등을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소위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세상이 추구하는 그런 능력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능력이란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은 나타낼 수도 없고, 세상의 여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능력을 의미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무성한 이론과 명분을 내세우면서 아무런 실적도, 행위의 열매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고 책망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종말론적 메사야 왕국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곧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를 더 엄격하게 말하면 불 완성을 지니고 있는 지상교회로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무성한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행사하는 기관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능력을 잃은 교회라면 하나님의 나라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이며, 사실상 죽은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써 그 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에게 말만 있고 그 말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다면 무능한 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불신자와의 대조를 보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비슷하면 전도해도 관심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뜻 자체가‘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때문에 생생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2장4-5절에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실 변론, 설득이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믿음에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성령이 드러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드릴 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한 육신으로 예배드리게 됩니다. 예배 도중 계속 사탄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예배에 집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예배 안에서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성령님꼐서는 우리 인생을 정말 멋있게 이끌어 가십니다.
직장 생활이든, 사업장이든, 학교이든 내 삶속에서 정말 살맛나는 삶의 가치를 알려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여러분,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나를 믿어주시고 받아주신 그 은혜 앞에 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을 통해서 능력을 증거 하는 종교입니다. 현대는 능력을 찾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쓰는 용어 가 운데 생산력, 경제력, 창의력, 지도력 등 힘(力)의 능력을 알아보는 시대입니다.
어떤 직장에 취직하려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지식은 국력이요, 체력은 국력이요, 경제가 국력이요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는 정보가 국력이라 합니다. 나라도 능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종교와 철학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철학은 지식이나 이성을 가지고 깨닫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종교는 신앙은 말씀을 통해서 능력 을 체험하고 그 능력을 응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능력 있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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