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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포럼 제31강
거룩의 관점에서 본 요셉의 어린 시절의 거룩신앙과 죽음의 체득, 그리고 노예로 팔림의 원인과 그가 받은 보이지 않는 선물들에 대한 탐구(창 37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의 계승자들은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 이어졌다. 그들은 시대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다.
야곱 12아들 중 11번째 아들인 요셉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주도해 나가는데 아버지 야곱이 미완성으로 남긴 이스라엘의 12조상 내면성 훈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한다. 그리고 창세기와 출애굽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인물로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이방에서 400년 동안 객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작을 알린다(창 15:13).
당시 나일강을 중심으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이집트에서 한 가족의 가문에 불과 했던 이스라엘이 주변의 위기를 느낀 이민족의 견제 없이 특화지역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지혜와 그의 그늘 덕택인데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탁월케 하고 충성스러운 자로 바로에게 인정받은 총리 요셉을 세우셔서 그를 통해서 이루는 구속의 섭리 역사인 것이다.
그때까지는 가나안을 중심으로 가족 문제가 주된 주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이집트와 같은 큰 배경의 세계적인 역사 속으로 중심점이 옮겨진다. 그러한 획기적인 전환에 적합한 인물은 더 큰 도덕성, 탁월한 통찰과 지혜, 누구나 그를 믿게 하는 놀라운 신뢰성 등등 같은 품성들과 능력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애굽의 주도세력의 도전을 견디어내는 내공과 오히려 그들을 교훈할 만한 그런 사람은 탁월하고 거룩의 빛으로 산 요셉에게서 발견 된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는 주체는 조직이나 시설 혹은 권력이나 군대, 사람들 사이의 위치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중심의 자리 같은 외형적인 하드웨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 사람 곧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예배자 그 한 사람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 한 사람은 거룩의 통로로 합당한 자, 복의 통로로 합당한 자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인류 구속사에 쓰기에 부족함 없이 구비조건을 갖춘 자 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20>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21>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현대어 번역 딤후 2:20-21)라고 했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인 큰 틀의 한 부분에 해당되는 한 가족의 가문에 불과 했던 이스라엘이 주변의 위기를 느낀 이민족의 침략이라는 견제 없이 특화지역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배경에는 탁월하고 충성스러운 자로 바로에게 인정받은 총리 요셉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그런 총리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인물은 예외 없이 훈련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적절한 시기 곧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요셉이 아버지 야곱 집에서 30 40세의 어느 날 바로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지시로 견딜 수 없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야곱의 집에서 와서 그를 데려다가 애굽의 이인자인 총리로 삼았다면 그가 과연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아니다 본인은 물론 모두가 비극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영예는 짓밟힐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적인 접근에서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고난을 통한 성숙의 과정을 거친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이외에 다음의 조건이 구비되어야한다.
첫째는 인간의 선한 면, 밝은 면, 순수한 면, 진실한 면이 그 사람의 성품에 본성적인 혹은 바탕적인 주된 요소들이 되어 자란 사람이 자기 의만 버리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유리하다. 그것은 가정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유산과 교육에 의하여 태어나남과 어린 성장기에 대부분 형성된다.
두 번째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깊은 성찰 곧 인간성 본질에 대한 이해와 체득, 그리고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인적으로, 내면적으로, 어둔 부패성이나 어떤 생각이나 심중계획을 꿰뚫어보고 통찰하는 능력을 갖추어 그것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흔히 가장 가까운 사람,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 죽음에 처하는 운명 등 같은 경우 수에서 이론이 아닌 오직 체득으로만 배우게 되는 독특성을 지닌다.
세 번째는 직무를 통해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그 직무에 최적화되고 유일무이한 만큼 전문화된 능력과 기능적인 재능이 준비 된 자이야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요셉은 유학이나 학교한 번 가보 않은 처지에서 애굽의 고급언어에 능통했고 대제국 총리로서의 경제경영 능력, 재무능력, 인사경영 능력, 사람관계 능력, 정치력, 애굽의 왕궁전통과 문화를 이해한 후 두루두루 갖추어진 후에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웠다.
네 번째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거룩한 생명 갈구의 삶을 멈추지 낳고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자리를 처해도,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절망의 지옥도에서도 거룩한 삶을 향한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 때마다 하나님섭리와 인도하심의 운명의 고리들이 연결되고 엮이고 하여 애곱의 국무총리로 향해가는 황금 고리 줄이 되었다. 한마디로 인생이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요셉의 삶의 특징이다.
다섯 번째는 모든 사람과 평화와 용서의 길을 침묵으로 가돼 순발력 있고 예견하는 통찰로 자행되는 해악을 피하거나 방지하며 정의를 위하여 분연히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이어야한다. 요셉은 형들을, 보디발의 아내를, 자기에게 악행을 행한 자들과 침묵으로 용서했고 화해했으며 끝까지 품고 그들의 모든 악행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했다.
여섯 번째는 생의 어떤 절망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 그것이 수 세월 지속이 되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결코 실망치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살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그분만을 열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셉은 하늘의 지혜와 총명이 임했고 지혜와 통찰력은 그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열쇠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믿고 중히쓰는 증거가 되었다. 그래서 요셉은 노예의 때도, 감옥의 죄 수의 때도 감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역설을 낳았다.
일곱 번째는 어떤 압력과 부담에도 견디고 압도하는 거룩한 영성과 정신, 그리고 마음의 힘을 가진 자 곧 평정심을 유지하는 자 이어야한다. 요셉은 불어다치고 또 겹치어 오는 지옥도 같은 시련을 잘 견디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애굽의 본토 권력자들에게는 이방인이 갑자기 왕 다음가는 이인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집단으로 모함하고 질투하고 압박했을까? 그러나 요셉은 잘 견디었고 그들을 압도했으며 심지어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특히 오늘 탐구라고자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갖추어야 할 것들의 지금 앞에서 나열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요셉의 생애에 대비하여 숙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에게 온 고난과 핍박의 시작은 그가 이런저런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기거나 주어진 어려움이 아니라, 무고하게 주어지는 외부의 압박이었음을 먼저 전체한다. 그럼에도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기에 처했던 것은 그 자신에서 비롯된 보다 근원적인 몇 가지 이유가 유추되어 지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요셉의 고난의 시작의 원인이다.
1) 그 첫째, 요셉이 겪은 고난의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거룩함과 구별된 삶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소년요셉의 고난은 본질상 그의 거룩성과 그의 구별 돤 삶이 형제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역 반응이다. 형제들은 소년요셉을 통해서 오는 거룩의 빛 앞에 이스라엘 아들들로서의 거룩한 삶으로 분발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고 급기야는 ‘핍박’하는 자들로 변하였다. 왜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요셉과 다른 형제들은 달랐을까?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의 신비의 영역이라는 점은 전제한다.
먼저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에서 보자. 인간은 악한 영향에 쉽게 영향을 받고 그것들이 내면화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는 것에 야곱의 아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곱의 아들들이 자라서 혈기 방자한 젊은이로 성장하였을 때에는 그들이 아버지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것들의 열매를 맺어 그것들은 현실에서 심각한 결점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부정적인 영향들은 아들들의 품성과 생애에 쓰라린 결과를 가져오도록 한 나쁜 열매들이었다. 아버지의 일부다처주의 폐해로는 아내들의 남편을 독차지하려는 사랑의 욕망은 결코 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기질투도 끝없이 일어나고 언제나 사랑을 더 얻기 위한 경쟁은 끝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그녀들의 사랑경쟁의 한이 아들 낳기 싸움과 그 아들의 이름 짖기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그래서 가정 분위기는 밝을 때보다 어둘 때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적으로 배다른 아이들은 서로 생모 편에 서서 빈번하게 싸우고 때로 패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제제를 받을 때 마다 쉽게 분노하는 성격이 형성되며 자라났고 폭력성을 띠면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생애는 가족사로 인하여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근심과 염려로 얼룩져 있었다.
반면 17세 소년 요셉은 어린 시절 어느 날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라헬이 세상을 떠남으로 친어머니 없이 그 복잡한 집에서 자랐기에 형들보다 더 성격이 삐뚤어지고 매사에 부정적 운명론자가 되기 쉬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밝고 긍정적인 요소만을 어어 받은 특별한 자로 자랐다. 이런 그의 태어남과 자라남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신비의 영역이다.
아버지의 긍정적인 면은 하나님의 인정과 거룩함의 복을 받을 때까지 결코 멈출 없는 열망과 끈기, 그리고 삶의 아름다운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측면이다. 하나님과의 겨룸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꺾이지 않는 근성과 그 환도 뼈가 부러져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데도 결코 싸움의 샅바를 놓지 않고 매달려 하나님을 이긴 모습이다. 그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변화된 이스라엘의 하늘의 품성만을 닮은 자로 자라갔다. 그의 성품과 성격은 정직하고 구김살 없이 거룩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온유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소유자로 그의 내면은 진실함과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어린 요셉은 외모까지 아름다웠는데 성경은 한마디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창 39:6).라고 기록했다.
그러니 그러한 요셉의 모습은 다른 형제들에게 극명한 차이로 다가와 그들은 본능적으로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시기심은 미음과 증오심을 낳았고 미움과 증오심은 자라서 결국 그들 마음속에도 가인의 동생 아벨을 죽였던 살인의 추억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 그 둘째, 야곱의 여전히 미숙한 아버지 역할에 대한 긍정인 요인들과 부정적인 요인들의 비교이다. 즉 아버지의 편애의 증거와 내용, 그리고 결과에 대한 고찰이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서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창35:16~18). 아버지 야곱은 라헬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녀에 대한 못다한 사랑을 그녀의 소생 요셉과 베냐민에게 쏟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요셉은 친어머니가 죽은 후에 아버지에게 더욱 밀착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밀착되게 사랑하였다. 그런데 야곱의 요셉에 대한 극한 사랑은 편애로 비치비칠 만큼 다른 아들들의 눈에 띠일 정도로 드러났다. 그러한 모습은 나머지 형제들을 계속 자극해 왔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였고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 게다가 요셉을 위해 특별한 채색 옷을 지어 입혀는 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요셉에 대한 편애 증거가 되었고 다른 형제들과 구별하는 표식이 되어버렸다.
그 채색 옷은 여러 장식이 달린 그 화려한 채색 옷은 불은 색 계통의 물감들로 물들인 알록달록한 옷으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이었다. 그것은 값도 비싸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주로 입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채색 옷은 요셉은 형제들 중 가장 존귀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장자를 제쳐놓고 그 장자권을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주려고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 칭함 받은 이후 온전한 성결인 이라 칭함 받아도 부족함이 없었던 야곱일지라도 그러한 편애는 여전히 미숙한 아버지 역할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의 미숙한 아버지 역할은 가족관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그것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인생의 말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로서의 미숙한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참 놀랍다! 야곱 자신이 어린 시절 에서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저지른 잘못으로 형의 복수를 피해 도망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광야에서 유랑하며 보냈는데, 그 자신이 지금 똑같은 편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야곱의 극심한 편애는 다른 자녀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명한 원인이 되고도 남았다.
3) 그 셋째, 형들이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는 중에 저지른 잘못(허물)을 아버지에게 수시로 알리면서 나눈 대화들 그리고 그것들을 알아차린 형들의 반응이다.
요셉과 함께 양을 쳤던 형들은 레아의 몸종이었던 빌하의 소생인 갓과 아셀, 그리고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의 소생인 단과 납달리였다. 야곱이 요셉을 시켜 이들 형들과 함께 양을 돌보게 한 것은 이 아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요셉은 형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보고해 왔다. 본문 말씀은 형들이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먼저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면서까지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 같은 잘못을 암시한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나 형들에게나 결코 유익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형제들을 의식해서 적절히 행동을 취하거나 아버지에게 사랑과 관심의 조절을 요구할 줄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상태이었다. 그렇다고 몰래 형들의 잘못을 지켜보다가 그들의 잘못을 보고 부풀려서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간교한 자도 못되었다. 소년 요셉은 형들의 목격된 악한 행동을 매우 괴로워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들이 그 허물과 과실에서 벗어나가를 간청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미움만 살뿐이었을 것이다. 단지 요셉 자신은 여러 형제들의 악한 일에 자신을 분리시키며 그들의 영향력에 대해 싸웠으며 그들의 꾀와 그들의 악한 행위들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을 것이다. 즉 요셉은 형들의 죄 짓는 집단행동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는 형들의 과실이 멈추지 않자 더 이상 보고 견딜 수 없어서 아버지에게 낱낱이 보고하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혹은 수많은 역본은 요셉이 형들의 잘 못을 아버지께 일일이 아뢴 것을 고자질로 번역했으나 실재로는 고자질이 아니다. 그는 형들의 과실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여 아버지의 훈계로 형들의 악행이 멈추기를 원했을 것이다. 즉 실제적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미치어 그들의 악한 행실을 멈추고 이스라엘의 자녀다운 신분에 걸맞게 살도록 하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면서 대화를 나눈 것은 형제들이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무시하고 큰아버지 에서처럼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방 여인들과 함부로 결혼하는 것과 이방인처럼 정욕을 따라서 사는 것을 서로 안타까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빌하와의 통간하는 일들이나 유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를 얻고 아들마저 이방여인을 아내로 얻는 것을 아버지께 보고하였고 아버지는 훈계로 자식들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교훈 받은 언약의 말씀대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예배의 삶에 걸맞게 형제들이 믿음의 조상들을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 섬기며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맘 아파하며 아버지께 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형들의 증오와 원한은 깊어만 갔다.
훗날 그들이 12조상의 거룩한 길, 믿음의 길을 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가뭄훈련과 총리요셉이 형들에 대한 거룩한 공동체 훈련, 그리고 고센에서의 구별된 지역에서총리요셉의 통제 하에 거룩한 공동체 삶에서 바로 잡아지어 간 것은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 분의 전적인 은혜의 섭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4) 그 넷째, 요셉의 꾼 꿈 이야기로 그의 형제들의 시기 질투심을 극한으로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시기 질투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 37:3-5)
청춘 (靑春) -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미의 용모,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손발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의 청신함을 말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마음이 시 든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7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의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우체국이 있다.
인간과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혀질 때 20세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치켜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 사무엘 울만 지음, 정성호 옮김, 젊은 나무에서---
노인은 대개 과거 지형적이라 과거만 자꾸 만복해서 말하니 듣는 사람은 잔소리가 되고 미래의 꿈을 꾸지 않으니 희망 없는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청년은 미래지향적이고 꿈을 꾼다. 희망이 넘친다. 그래서 생명력의 냄새를 풍긴다. 꿈은 생각과 연관되었다고 한다. 생각은 인생관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은 생각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평소의 생각이 의식 무의식속에 담겨 있다가 꿈을 꾸는 순간 그것이 영상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꿈은 평소 그 사람의 뜻과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전혀 타자에 의해서 주어진 꿈조차도 그 꿈이 전개되는 영상은 대부분 꿈꾸는 자의 의식의 틀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은 요셉의 평소 생각과 의식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고 축복하실 것을 영상으로 담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소개된, 두 번에 걸친 요셉의 꿈 이야기, 곧 그 첫 번째 꿈은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는 내용이 명료하게 드러나 요셉을 향한 형들의 미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꾸었을까? 왜 요셉의 꿈에는 그가 형들 위에 군림하는 스토리가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에 하나님이 그를 향한 미래의 계획을 계시하셨다고 답해 버리면 명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아멘 하면 끝이다. 그렇다면 그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다. 왜냐하면 요셉에게만 해당되고 그 꿈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준비하거나 어떤 역할이 없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 주어진 그 꿈 이야기는 인간에게 역동적인 수 없고 요셉만 사랑한 하나님의 편애만을 느낄 수 있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문학적인 접근이 참으로 필요하다. 우선 그 꿈을 꾼 자와 그 꿈 이야기를 생산해 내고 담은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우선 그 꿈꾼 자는 요셉이다. 사실 요셉은 꿈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환경의 사람처럼 보인다. 숙명적으로, 필연적으로 주어진 유목민의 한 가정의 천륜적인 위계질서가 깨지고 열 명의 형과 한 명의 동생이 합동으로 동시에 요셉에게 절할 일이 생기겠는가? 그 열한 명의 형제와 함께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요셉에게 절하는 상황 즉 요셉이 존귀한 자의 위치가 되어서 부모와 함께 온 가족이 절하는 상황이 이 유목민의 한 집의 가족사에서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아직 자기 나라도, 자기들 왕국도 아니다. 그러니 요셉이 그곳에서 높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 되거나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전무하다.
현대에는 교육과 유학이라는 인생의 사닥다리가 종종 젊은이들이 타국에서 존귀한 자로 부상하는 경우가 있으나 고대시대의 목동 요셉은 그곳 타국에서 권력자나 왕이 될 인생의 사닥다리가 전무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니 요셉이 생각 속에 의식 무의식 속에서 존귀한 신분을 열망하고 왕이 될 미래를 상상이나 했겠는가의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숙고해보면 요셉의 꿈은 순전히 우연도 아니며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시만도 아니다. 요셉의 꿈은 그의 의식, 무의식과 불가불의 관계가 있다.
먼저 요셉의 무의식, 의식의 형성을 살펴보자. 그의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당연 부모다. 아버지 야곱의 아내 사랑 시작도 끝도 라헬이었다. 그러한 라헬이 아기가 없다가 늦게 태기가 있어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요셉이다.
그러니 라헬과 야곱의 요셉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을 까? 그리고 요셉은 언제나 부모 사랑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 무의식 간에 자기가 최고의 귀한 존재라는 의식이 심겨져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늘 형들보다 더 귀한 존재이며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이 생기게 만들었다. 그가 형들 머리위에 있다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생겼는데 그것은 형들은 들에 나가 일할 때도 그는 귀인으로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다음 가는 주인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과 상속자를 의미하는 채색 옷을 입음은 역시 그가 귀인, 상속자, 형들 위에 있는 의식이 뼈속 깊이 심겨져 있었다. 집안에서 최고라는 자존감, 부모 최고의 사랑 결정체가 그의 내면에는 형성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의식 무의식에 황태자의 의식, 킹쉽이 생겨나고 자라게 만들었을 것이다. 특 아버지 거룩한 약속과 유산, 그리고 신앙교육은 그를 더욱 존귀한 자로, 키우고 그 의식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의 자라고자하는 소망을 심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요셉에게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 다만 그 표현 방법에서 미숙해 다른 아들들이 비교 당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요셉이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영상으로 전달하셨다. 그러나 요셉은 그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뜻 곧 꿈의 내용이 의미하는바와 그 꿈이 외부로 알려졌을 때 오는 부정적인 반응을 생각지 못하는 순진한 상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그 꿈을 맘속에 감추는 것에는 대해서 고민하거나 머뭇거리는 일 없이 곧 바로 드러냈다. 그는 이 꿈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미칠 파장이나 형들의 부정적 반응에 대해 헤아림 없이 순수하게 말했던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순진무구하게 신뢰하는 터라 꿈을 꾸자 숨기지 않고 신나게 말했던 것이다. 그 꿈을 형들 앞에 자랑하는 조로 이야기 한 것을 보면 자기가 존귀하게 되어 형들이나 부모에게 조차도 절을 받는 꿈의 내용을 형들이 아무런 딴지를 거는 일없이 그냥 좋아 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야곱은 비록 아버지로서는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영적 지각이 있는 족장이어서 그 꿈을 예사로운 것으로 그냥 넘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무지하였고 무관심 했으며 오히려 그를 질투하고 더욱 미워하게만 되었고 결국에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지경에 빠지었다.
결국 요셉의 꿈 이야기는 이미 시기와 질투로 영적인 어둔 형들의 마음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 하는 격이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살의의 마음까지 품게 된 것이다. 요셉의 앞날이 그 꿈대로 된 것이 아니라 그 꿈은 배신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그 꿈대로 형들이 굴복하고 절하기는커녕 그들의 시기 질투는 극을 이루어 마침내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린 비극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우리는 성경의 지난 과거의 일이라 그 결말을 알고 있듯이 이 꿈은 후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후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꿈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의 예언적 계시였다. 형들이 동생 요셉이 꾼 꿈의 진가를 알았다면, 핍박 대신에 칭찬과 격려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막으려는 적대 세력이 되고 말았다.
본래 시기 혹은 '질투'를 뜻하는 영어 젤러시(jealousy)는 젤로스에서 비롯된 말이다. 질투의 여신 젤로스는 사팔뜨기에 빼빼 마른 볼품없는 신이다. 이빨은 군데군데 썩어 문드러져 버렸고 가슴은 절벽에다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젤로스가 웃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낮이고 밤이고 남이 고통 받는 인간들을 쫓아다니며 즐기고 남이 잘되는 꼴을 보면 속이 상해서 밤잠을 못 잔다. 그는 남이 잘못되어야 즐거운 신이다.
그녀는 ‘사팔뜨기’라 곁눈질, 남의 눈치를 잘 본다. 그래서 항상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남이 자기보다 아름답다고 느끼면 질투가 시작되는데 그녀는 사팔뜨기 눈을 흘기며 분노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 질투는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잘못된 감정으로, ①자신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②자신의 일상생활을 무너뜨리며, 결국에는 ③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투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고, 행운에 애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그것을 은밀히 도모하는 질투는 죄질이 가장 추하고 악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 이 질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7대 대죄로 꼽았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여 저주의 주인공이 된 유대인의 악행도 이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질투는 영적인 생활과 성장에 심각한 장애다. 창37장에 묘사된 요셉의 형들 역시 질투의 화신이다. 그들의 질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 본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아버지의 지시대로 그의 형들을 향한 길을 떠남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죽음을 마주하는 여행길이었고 긴 세월의 이별의 길이 되고 말았다.
1) 그 첫째, 요셉이 집을 떠나 형들에게 가게 만든 환경적인 요인과 아버지의 염려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 듯이 고대에 가나안 지역의 척박한 황야서 생존하기 위한 직업은 목축업이 주 생계수단이었다. 그것은 생명유지의 최선의 방법이었다. 야곱은 세겜 성 모든 남자들 죽였던 잔혹사의 망령으로 아들들이 보복은 당하지 않았는지 염려가 떠나자 않았을 것이다. .
그곳에 거주했던 야곱의 아들은 양떼들이 먹을 목초를 얻기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때때로 그들은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런 환경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야곱의 아들은 지금은 아버지가 일찍이 세겜 땅에 사 놓은 땅에 장막을 치고 그곳 주변에서 양들을 쳤던 것 같다.
그런데 성경 기록의 문맥상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났으나 그 아들들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자 아버지 야곱은 아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하고 불안했던 것 같다. 게다가 전에 디나 강간 사건으로 세겜 성 남자들이 할례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그들을 모두 죽였던 잔혹사가 망령으로 떠올라 아들들이 보복은 당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안전에 대하여 더 염려가 되기 시작하였다.
2) 그 둘째, 그러므로 야곱은 요셉을 보내어 그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잘 있는 지 안부를 물어 오도록 심부름은 수년의 이별의 길이었다.
이제 언제나 순종적인 요셉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나갔다. 그 날의 떠남이 죽음을 향한 떠남이었으며 수십 년의 이별의 떠남을 요셉 자신도 아버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 부자는 다시 만나기까지의 사이에 어떤 파란만장한 일이 일어나고 펼쳐질지는 늙은 아버지도 17세의 어린 아들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요셉은 쉽게 순종하기 힘든 외롭고 긴 여행이지만 5일 길 이상을 걷고 걸어서 세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때 그의 형제들과 양떼들이 보이지 않았다. 피곤과 허탈감에 기진해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었겠지만 아버지의 당부의 말이 더 올라 형들의 행방을 물어물어 형들이 있을 법한 곳 도단광야를 향해 하루 이틀 길이 넘는 광야 길을 또 걷었다.
만약 야곱이 요셉에 대한 자기 아들들의 진정한 적개심을 알았더라면 그를 보내지 않았거나 보내다하더라도 홀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의 감정을 심중에 감추었고 드러내지 않으므로 아버지와 요셉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3) 그 셋째, 그 형들은 지친 모습으로 다가오는 요셉을 보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아버지께 말하자 — 살의 계획과 음모.
그리고 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창 37:20)고 말하여 살의 동기를 요셉의 꿈에 직접 연관 시키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신들의 안위의 안부를 물으러온 요셉을 반가워해야하고 기뻐해야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편애의 증거인 겉옷인 채색을 웃을 보자 그들은 눈이 돌아 버렸다. 요셉은 형들에게 주려는 건량 즉 마른 음식이 한 짐 지워져 있었을 것이다. 이는 요셉이 수일동안 자기들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먼 길을 여행해 몹시 피곤하고 지쳤으리라는 생각, 무척 목마르고 배가 고프리라는 생각, 요셉이 자신의 따뜻한 환영과 형제 우애를 무척 갈망하리라는 생각도, 그 어떤 동정심도 요셉을 향한 치밀어오는 그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살의의 증오심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즉 그들은 분명히 요셉의 참담하고 지친 상태를 알았으나 어떤 동심심도 없이 지켜보는 군중도 없고 말리는 사람이 없는 적당한 시간과 공간을 만나자 결국 살의의 마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들은 조롱하는 말로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하고 소리쳤다. 그들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은밀히 품어 왔던 질투와 살인의 욕망이 그들 자신을 지배해 왔음이 드러난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음모를 꾀한 것은 세 가지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요셉을 죽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 시체를 구덩이에 쳐 던져 버리자는 것이었고 셋째는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거짓말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형들은 예전의 형들이 아니었다. 그때 그곳에 열명의 형들이 있었는데 형들이 연약한 동생을 돌로 쳐 죽이든지 둥그렇게 서서 동생을 한 때 때리고 또 때려 돌림 빵을 때려죽이든지 하여 동생의 시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유기하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요셉이 던져진 ‘구덩이’는 죽음의 ‘구덩이’인데 그것은 오히려 생명을 보존하는 ‘구덩이’이었다
바로 그때 맏형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창 37: 21-22) 왜 르우벤이 구해줄 요량이었으면 바로 그 즉석에서 동생을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만일 르우벤이 그렇게 말하면 다른 형제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자기를 따돌릴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르우벤은 장자로서의 어린 동생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과 아버지의 극한 슬픔으로 울부짖는 모습이 떠올라서 나중에 구하려는 의도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 당장 쳐죽는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목숨이기에 잃으면 기회가 없다. 그러나 목숨이 아직 보존되어 있으면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 형들은 직접 쳐 죽여 피 흘리는 죄를 범하지 말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요셉의 생명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봉지 않는 손길이다.
그러나 요셉은 죽음의 위험을 알지 못한 채,
형들을 찾는 일 곧 오랫동안 찾아 해매 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형들에게 신속히 달려갔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환영 대신 그는 형들의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마치 이리떼와 같은 사람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여러 형들의 손에 잡혀 억압 되된 채 입은 채색 옷은 벗겨졌다. 그들의 욕설과 위협은 그의 생명을 빼앗을 것 같은 기세였다. 죽음의 위험에 처한 그의 애걸과 절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 왔던 형들에게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는 이성을 잃은 이리떼와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물어 뜨긴 형국이었다. 그들은 난폭하게 겉옷은 벗겨졌다. 이는 결박되어 죽음당하기 전의 짐승처럼 살기위한 몸부림과 호소 그리고 죽음의 절망과 공포에서 몸부림도, 절규도 철저히 무시되었을 것이다.
발가벗겨진 그를 데리고 깊고 깊은 마른 빈 구덩이로 끌고 가서 그 속에 던져 버렸다. 아마도 마른 빈 구덩이 마른 샘이었을 것으로 아주 깊었을 것이다. 본문에 ‘구덩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온다(20,22,24,28). 일반적으로 구덩이를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음부’ 혹은 ‘지옥’이란 뜻이다. 음부(지옥)는 ‘희망이 차단된 희망이 없는 장소’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구덩이는 일반 물웅덩이가 아니라 사막에서 물을 잘 저장할 수 있고, 저장한 물의 증발을 막을 수 있도록 입구는 좁게 하고 중심은 넓게 판 호리병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저장한 물을 다 쓴 빈 구덩이는 때때로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들어가면 절대로 혼자서는 나올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바로 이와 같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덩이를 ‘음부’(지옥)처럼 희망이 없는 장소, 희망이 차단된 곳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몸은 결박되어 던져졌을까? 자유의 몸으로 던져 졌을까? 성경은 기록이 없으나 분명 스스로 깊은 구덩이에서 나올 수 없도록 신체의 움직임에 제한을 가하도록 조치도 취해졌을 것이다.
넷째, 죽음의 구덩이 속에 던져진 후의 요셉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숙고이다.
1)그 첫째, 그 죽음의 구덩이 속에 떨어지는 순간 죽음의 절망 속에서 절규하고 울고 울다 지쳤을 것이다.
그 죽음의 구덩이는 형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뒤섞였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혈육의 관계라는 것을 의식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덩이 밖에서 어떤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어울려 이제 죽음의 구덩이에서 어린 소년은 참담함과 공포에 휩싸여 울고 울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온전히 지배했을 것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광야 한 복판의 깊은 구덩이였을 테니 말이다. 이제 꼼짝 없이 목마름과 허기로 굶어 죽게 생겼지만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쳤을 것이다. 그리고 응답이 없이 모든 힘이 소진 되었을 것이다. 그 죽음의 구덩이 살기 위한 온갖 시도해도 거절당하고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살기위한 시도는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2) 그 둘째, 그리고 그는 구덩이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내면에는 자신에 대한 내면 성찰과 인간본성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의 통찰이 개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직 요셉은 아직 인간이 직면한 상황들, 어떤 말이나 어떤 환경이 인간에게 다가 올 때 반응하게 될 인간의 본성이나 습성, 인간 내면에 내재한 부패성이나 파괴 본능관한 통찰력이 결여 된 때이었다. 또한 인간은 기회가 주어지면 정욕과 탐욕이 드러나며 철저히 이기적인 자기본성 중심으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아직 초보 수준이었을 때이다.
특히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시기질투가 숙주 삼은 인간을 노예로 부릴 수도 있고 살인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들, 등등의 인간본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혈육의 배신
아름다운 추억의 배신
자신의 삶의 성실성에 대한 배신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에 배신-
믿음의 배신
스스로의 자제와 조절에 대한 인식의 결여
지나친 부모사랑의 거절에 대한 인식의 결여
그는 그동안 형들의 분노를 산 철부지 짓이며,
아무리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지는 행동이나 말이라도 상대를 깊이 통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지는 것은 비극을 초래 할 수 있는 다는 늦은 깨달음과 후회,
지난 날 형들 앞에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들, 그리고 형제들의 눈총과 마음에 대한 의식과 인식에 대한 결여
생각과 말을 표현 했을 때 어떤 반응과 결과가 올 것인가에 결여
꾸지람,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거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
상대방의 마음 다음 행동에 대한 인식의 결여
상황에 대한 파악과 그 상황 속에 명료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들에 통찰의 결여
원칙, 동기, 원인, 의도, 마음과 감정 상태, 긍정적임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한 깊고 확실한 이해와 통찰력의 결여
그리하여 자기의 어떤 행동들이 지금의 처지로 몰고 왔는지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비로소 뼈저리게 각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도 공포, 분노, 회개, 하나님에 대한 간구 등 온갖 감정과 상념이 교차하며 절망의 나락에서 몸부림 쳤을 것이다.
3) 그 셋째, 그 애통의 몸부림 끝은 하나님께 향하였을 것이다.
요셉은 이렇게 구덩이에서 절망과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은 천년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에 그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처럼 한 순간 삶과 죽음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고 그 때 하나님에게 진실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부르짖었다. 아니 하늘을 향하여 절규했다. 아직은 구원의 손길이 현실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실 날 같은 희망 닿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의 구원하심을 탄원했을 것이다.
4) 그 넷째, 그 죽음의 웅덩이 겹에서 식사를 나누는 잔혹성이다.
피가 같은 형제를 죽음에 이르도록 마른 깊은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옆에 “앉아 음식을 먹”은 것은 인간의 잔인성과 부패성을 보여주는 특이한 그림이 연상된다. 이렇게 요셉이 깊은 구덩이 속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도 그 형제들이 그 깊은 구덩이 옆에 모여 앉아서 식사하는 시간은 통념적으로 길었을 것이다. 그 식사 시간이 쉬는 시간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아모스 6장 6절에서는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 하는 자로다”했다. 아마도 이 음식 중에는 요셉이 형들을 위해 가져온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악으로 갚는 저들의 비정함과 잔혹성이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다섯째. 야곱을 성화 기키는 인생 망치 - 끊이지 않는 거짓과 하나님의 소품인 염소의 피 붙은 옷을 보자 요셉을 가슴에 묻은 야곱은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라는 말로 처절하게 매일 매일 애가를 불렀다. -
1) 첫째, 끊이지 않는 거짓과 하나님의 소품인 염소의 피 붙은 옷을 들대는 아들들과 그들이 안아야할 아비지의 비창의 세월이다.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고 손에는 염소 새끼로 만든 별미와 떡을 가지고 가서 에서로 속여 축복을 가로 챈 것처럼 이제 그의 아들들이 수 염소를 잡아서 요셉이 입고 있던 채색 옷을 그 피에 적셔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은 증거로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32).” 하며 들이댄다. 얼마나 잔인한 아들들인가?
그래서 야곱은 그 순간부터 요셉이 죽은 줄로 알게 되었다. 야곱은 언제나 아들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들어도 불편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할 뿐 격노하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았다. 야곱은 요셉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도 자신을 억제해 장성한 아들에게 분노를 격발시키는 일을 조심스럽게 피해갔다. 그는 깊은 부성애로 그들에게 자기의 백발을 존중케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이리하여 이 거짓된 음모는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적어도 야곱의 가정에서 20년 이상을 드러나지 않고 묻힌 음모로 숨게 된다.
2) 둘째, 그 긴긴 세월동안 요셉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장성한 아들을 향해 토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이 매우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껴야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아들들과 딸이 그를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헛된 일이었다. 야곱은 긴 시간의 애곡을 의미하는 행동으로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였다. 세월도 그의 극한 슬픔을 경감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들을 가슴에 묻었기 때문이다. 그는 요셉을 광야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라는 말로 처절하게 매일 매일 그 비창의 애가를 불렀다. 어쩌면 아들의 이상한 행동을 의심하면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더 이상의 자녀들을 잃고 싶지 않아 추궁하지 않으면서 더 큰 슬픔을 자아냈을 것이다. ‘내가 아들을 저 멀리 형제들에게 심부름 보내지 않았더라면 멈추지 아는 야곱의 후회의 독백을 하며 울고 울었을 것이고 자식들은 그것을 날마다 들었을 것이다.
이미 범죄에 가담했던 젊은 자녀들은 그들이 행한 일을 인하여 떫었으나 아버지의 절망과 책망이 무서워 그들의 악행을 서로 누설할까봐 감시하며 깊이 감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악행이 그들의 일생을 괴롭히는 숨은 죄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래 오래 걸지 않았다. 긴긴 세월동안 요셉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토해 냈을 것이다. 수십 년 후에도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에서 보듯이 그들도 떨쳐 낼 수 없는 고통의 참상을 가슴에 안고 살아 왔음을 본다.
3) 셋째, 아직도 야곱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인생 망치이다.
사실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들 요셉의 죽음의 원인 곧 ‘내가 아들을 저 멀리 형제들에게 심부름 보내지 않았더라면? 다른 장성한 아들들의 태도와 보고들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에 대한 의심이 자기의 특별한 편애에서 왔다고 생각했다면? 그래서 아버지인 자기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세월이 지나도 선명하게 시시 때때로 밀려온다면 그 슬픔과 비통함이 얼마나 클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 늙은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도록 애통하는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의 얼굴과 그분의 깊은 의도를 알기 원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정말 험악한 세월이었다. 그러므로 거짓된 아들들의 위로는 결코 야곱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당신의 거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면서도 동시에 아직도 야곱이라는 인물을 훈련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의 성화를 위하여 죽음 직전까지도 훈련하신다.
인생의 운명의 장난인지, 하나님의 정의로운 의도인지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자기가 형 에서라고 속일 때 사용했던 것이 염소와 그것의 피, 그리고 형 에서의 옷이었는데, 그가 지금 아들들에게 속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소품도 역시 수 염소와 그것의 피, 그리고 아들 요셉의 옷이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역시 그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아마도 그들 중 몇 사람들은 요셉을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 놓고 음식을 먹는 것은 참 마음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들은 막상 타는 질투심에서 그를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지만 그 일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때에 마침 한 떼의 장사꾼들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무리는 향료와 다른 상품들을 가지고 요단 저편에서부터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큰 상인들이었다. 여기 아브라함과 그의 후처 그두라 사이에서 난 네째 아들 미디안의 후손들(25:1,2) 곧 미디안 사람과 이스마엘인들이 한 무리가 되어 과 함께 언급된 것은 아마도 무역상의 일로 여러 나라를 순례해야 하는 대상으로서 피차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행하였고 똑 같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한 조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유다는 요셉의 생명이라도 구하려는 심정에서 섬광처럼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것은 요셉을 노예로 팔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설득은 논리적이고 그들의 마음의 의표를 찌르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의 그 첫째는 아무리 미웁다 해도 다름 아닌 동생을 죽여야 하겠느냐는 혈육의 정에 호소하였다. 그 두 번째는 여러 방법 중 구태여 살인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라는 죄책의 극소화를 들어 설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남의 손을 빌어 처리함으로써 수고를 덜 뿐만 아니라 뜻밖의 소득도 얻지 않겠느냐 라는 합리적인 대안 제시이었다. 모두가 이 지혜의 제안에 모두가 청종하고 찬성하고 말았다. 이것이 요셉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드디어 요셉은 죽음의 공포 아래 있던 그에게 갑자기 위에서 밧줄이 내려와 형들이 자기들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설마 죽이랴? 하는 생명의 환희감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다른 한편으로 위로 끌어올려져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지 더 큰 의심과 불안이 엄습해 왔었을 것이다. .
밖으로 나오자 우선 목숨이라도 건졌다는 안도감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속으로 당연히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 응답되었음에 너무나 감사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들을 보자 어떤 형이든 동정을 끌어내는 애걸과 눈물의 호소,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형들 중 누군가의 동정을 애걸했을 것이다.
그렇다! 요셉이 눈물을 흘리며 애걸할 때 잔인하게 이를 묵살하고 당을 지어 악을 도모했다. 요셉은 급매 당하는 것이기에 20세겔의 헐값에 팔리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을 때, 르우벤은 거기에 없었다. 형제들이 떠난 후에 맏형 르우벤이 웅덩이로 돌아와 보니 요셉이 보이지 않았다. 르우벤은 너무나 슬퍼서 자기 옷을 찢었으나 결국 그도 다른 형제들의 죄악을 덮고 침묵해버렸다.
맺는 말 – 한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기기묘묘한 섭리
꿈의 배신은 죽음의 구덩이 이었으나 그 죽음의 구덩이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렇지만 요셉에게 있어서 구덩이는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형들은 그를 구덩이에 던짐으로 그의 꿈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오히려 그 구덩이는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요셉에게 이 구덩이 체험이 없었다면 그의 꿈은 절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다. 사실 요셉의 꿈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이고, 요셉은 도구였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덩이의 시련을 요셉에게 보내서 그를 준비시킨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꿈을 찢고 짓밟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짓밟고 찢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사람의 방해로 좌절되지 않고 방해를 받을수록 더욱 크게 성장하고, 부흥하게 된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좌절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 꿈을 더욱 크게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계획까지 선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구덩이는 장차 만인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요셉의 하나님 존재인식과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배움이다.
지금까지 요셉에게 중요한 배경이 되고, 버팀목이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었다. 그런데 그가 던져진 구덩이 안에는 그 아버지가 없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깨우쳐 준 곳이 구덩이다. 한 마디로 그 구덩이에서 인생에 있어서 ①의지해야 할 대상, ②바라보아야 할 대상, ③붙잡아야 할 대상, ④추구해야 할 가치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그 구덩이 체험을 통해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인생에게 내가 어느 곳, 어느 위에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죽음의 구덩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우리도 이런 절망의 구덩이, 슬픔의 구덩이, 실패의 구덩이, 불안과 염려의 구덩이, 고통의 구덩이에 갇힐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10대, 어떤 사람은 20대, 어떤 사람은 30대, 40대, 50대, 60대 70 등등 .통계적으로 젊은 시절보다 나이가 들면 이런 구덩이가 더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인생의 희망이 차단당하는 절망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는 내 힘으로 헤어날 수 없는 파국에 내몰려 스스로 생을 포기할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덩이는 내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곳은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한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2)는 다윗의 고백 말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처럼 이것이 곧 부활의 정신이고, 부활의 신앙이다. 이런 부활정신, 부활신앙으로 인생의 어떤 구덩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 하나님 왕국의 총리대신이 되기 위한 준비와 인도 그리고 훈련으로 이끄 시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묵상해야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큰 그림을 보자면,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그 때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미리 혹은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지난 후에야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는다.
야곱은 정말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사지로 보낸다. 죽음의 냄새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이나 낌새를 채지 못한다. 금쪽같은 아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형들 곧 성난 이리 떼에게로 보냈다. 그 결과 요셉이 제일 처음 형들에게 맞아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옷이 피가 묻혀서 아버지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르우벤의 마음 속에 들어가셔서 타협안을 제시하게 하셨다. 그래서 생명이 보존되었고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다.
하나님께서는 절묘한 시점에 이스마엘 사람들을 보내시고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가셔서 제 2 차 타협안을 제시하게 하셨다. 그래서 요셉의 생명을 보호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 치의 실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요셉의 꿈에 보이게 하신 분은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스마엘 사람들은 그저 이스마엘 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때 그 순간 그곳으로 지나가게 하신 천사의 무리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다시금 역이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한 번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것 속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그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나 환경들을 동원키고 조합시켜서 그것들을 훈련의 도구로 삼으시던지 연단의 교재로 삼으시던지 하여 연단하고 훈련하신다. 그러므로 로마서 8 장 28 절의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였다.
하나님이 요셉을 사랑하셨다. 요셉의 주변에 있는 악한 형들, 요셉의 두 형들 르우벤과 유다, 요셉 옆으로 지나가는 이스마엘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여 선을 이루어 가고 계셨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마침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이스마엘 상인들을 보고서 그들에게 팔아버리는 인간 잔혹사를 연출하는데 요셉은 그것을 겪는 소년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의 환경적인 삶의 인도는 그를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고 거기서도 우여곡절을 겪게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을 조합시켜 요셉을 총리대신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지 않는가 말이다.
그의 총리대신의 역할이 비록 지상의 대국 애굽의 총리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한 목적과 역할은 하나님 나라 총리대신 되는 것과 그 직분의 아름다운 수행 곧 한 가족의 가문에 불과 했던 이스라엘이 주변의 위기를 느낀 이민족의 견제 없이 특화지역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것은 하늘의 총리 요셉의 미래를 보는 통찰에서 비롯된 그의 통치의 소산인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표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들이었다. 애굽으로 가는 길은 여럿이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요셉과 견주어 내가 나를 본 인생 전반기의 목자로서의 미숙함에 대한 성찰
시대를 꿰뚫는데 미숙했다.
순수하기만 했지 인간의 어둔면 밝으면 등의 인간 총체적인 본성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했다.
인간을 바로 통찰하지 못해 인간관계에 미숙했다.
그래서 믿지 말아야할 사람들을 믿고 의존해서 하나님 일을 그르쳤다.
참아야 할 때, 침묵해야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알아 어도 참지 못하여 사람을 잃었고 신뢰도 잃었다.
돈 앞에 사람을 믿지 말아야하는데 그것에 실패했다.
사람도, 다가오는 상황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하는데 그것에 실패해 소극적이 되고 기회를 놓쳤다.
보다 본질적인 말씀연구와 묵상 그리고 거룩한 영성의 보다 일은 나이에 몰입과 집중하지 못했다.
너무나 많이 원치 않는 것에, 불필요한 것들에 휘말려 생과 힘을 허비했다.
참 목자 상으로 살아가는 자기 경영에 여전히 미숙했다.
남을 칭찬하고 높여주고 그들에게 생명력을 부어주는 삶에 미숙했다.
여전히 말과 행동이 질투와 분노에 좌우되는 경우가 참 많았다.
남과 남의 목회와 비교하며 열등감에 바지고 그들을 깎아내리기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너무나 많이 남의 눈치와 체면에 구애 받고 보이지 않는 것에 구속당하며 살았다.
참으로 알지 못해서 너무 많이 돌았다.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때, 용기를 가져야할 때, 승부수를 두어야할 때를 잘 구분하지 못해서 치열한 싸움조차 못한 심정적 패자이었다.
최상의 건강관리, 생활 습관에 미숙했다.
어떤 최악의 상황도, 어떤 사람들로 오는 압박에도 견디고 오히려 압도하는 것에 미숙했다.
위로부터 오는 거룩의 능력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애썼던 시간이 더 많았다.
이제 좀 깨달아 갖추려 했더니 벌써 인생 후반도 한 자락 잘려나가기 직전이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거룩의 관점에서 본 요셉의 어린 시절의 거룩신앙과 죽음의 체득, 그리고 노예로 팔림의 원인과 그가 받은 보이지 않는 선물들에 대한 탐구(창 37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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