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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신앙 강좌 3
주제 - 생명의 힘이신 성령 (3)
일시: 2012년 1월 31일(화)
강사: 배광하 (치리아꼬) 신부
시작 기도
성령이 아니면/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복음은 죽은 글자요/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선교는 선전이 되며/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그리스도인의 행위는/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이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아멘.
1. 그리스도 신앙의 위대성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4) - ‘숨을 거두셨다.’의 직역은 ‘숨, 또는 영’을 넘겨주셨다.’인데, 이는 성부께 목숨을 돌려 드리면서 평화로이 그분께 돌아가심을 뜻한다.(주석 성경, 신약) -
또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요한 19,34) 영은 바람이고 물은 생명의 물이며 피는 목숨을 바친 사랑의 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요한은 성령의 내림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간주하였을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곧 물은 세례성사를, 피는 성체성사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여기에서 예수님 곧 새 아담의 열린 옆구리에서 나오는 새 하와, 곧 교회의 탄생을 보기도 한다. -주석 성경, 신약-)
1) 다 이루었다.
바람(숨), 물, 피(불)는 모두 같은 성령의 표상입니다. 그 모든 표상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힘, 성령을 보내 주시는 메시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의 편지에서도 바람과 물과 피에서 같은 의미로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물과 피를 통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물만 거쳐서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를 거쳐서 오셨습니다. …… 증언자는 셋이 있으니 곧 바람과 물과 피이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더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증언은 바로 당신의 아드님에 대해서 하신 것입니다. ……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당신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1요한 5,6-9) / 「200주년 신약성서」를 바탕으로 한 시역.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당신 아들 안에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바람과 물과 피(불)이며 이들은 하나로 모아져서 결국 모두가 생명의 힘인 성령을 가리킨다는 의미입니다. 영은 진흙 덩이에 생명을 주어 살아있는 것이 되게 한 “바람”(창세 2,7 참조)입니다. 물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하신 바로 그 생명의 물입니다. 그리고 피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하신 말씀으로 미리 알려 주신 절대적 사랑의 불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으신 그 사명을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 물, 피(불)는 그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써 한결같이 성령을 표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람, 물, 불의 대역사, 그 거대한 흐름과 힘은 생명 중의 생명이며 하느님 사랑의 불꽃인 성령 안에 모아져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성령이라는 열매로 인간에게 전해졌습니다. 십자가는 생명나무가 되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창세 3,22)에 대한 인류의 아련한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2) 나로선 못 오를 바위
옛 신앙인은 꿈속에 그리는 땅이 저 위에 아득히 높이 솟아 있고, 자신의 몸은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현실을 보며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제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제 기도를 귀여겨들어 주소서.
땅 끝에서
기진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 위로
저를 이끌어 주소서.”(시편 61,2-3)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을 통한 그 은총을 체험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이 이 시인의 심경을 그대로 빼어 닮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을 깨닫고 성령을 통해 그 은총을 체험한 뒤에는 자신의 몸이 한 순간에 까마득히 멀고 높아만 보이던 그 산 위에 올려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7,24; 8,2.15.26) 그리고 바오로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깊은 구렁에 빠진 인간이 자신의 두 귀를 잡고 거기서 빼낼 수 없는 것만큼이나,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유, 생명, 기쁨은 주어진다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얻어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그 앞에서는 죄인과 성인이 따로 없다는 것, 가장 위대한 성인도 자신의 공로나 노력으로 그것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 아무리 철저하게 고장난 인간이라도 그 앞에서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만을 보시고 모든 사람에게 무죄 선고를 내려 주셨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이 기쁜 소식을 분명히 들을 권리가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기쁜 소식을 목청껏 외쳐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완전히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 대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지불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지불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 거저 얻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철저히 공짜인 것입니다. 우리 삶에 햇빛과 바람과 물만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값으로는 치를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싼 대가와 철저한 공짜 사이에 무엇인가를 끼워 넣으려 드는 시도를 우리는 일단 접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땅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접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엇인가 기특한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놀라운 특성입니다.
3) 바라보라, 살리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시며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르신 값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냥 쳐다만 보는 것,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이것뿐입니다. 바라보고 관조하는 것, 쳐다보는 것, 우리가 눈이라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 일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진(眞)과 선(善)을 강조하고 그만큼 미(美)를 소홀히 합니다. 우리의 상식 세계에서 진은 지선이 주관하는 학문의 대상이고 선은 양심이 주관하는 윤리의 대상이며 미는 감각이 주관하는 감성의 대상입니다. 진과 선은 의지를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힘을 써야 얻어지는 것이지만, 미는 감각 기관이 고장만 나지 않았으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저쪽에서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진정 구원되려면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선을 행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우리의 의지를 동원한 노력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선미 가운데 유일하게 의지적 노력과는 관계가 먼 미의 세계 속에 그 구원이 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각을 들어 올려 다만 쳐다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의무와 과제, 산더미처럼 쌓인 중요한 일들에 파묻혀 거기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천천히 닫혀 버립니다. 때문에 <어린왕자>의 ‘생떽쥐베리’(1900-1944)는 그런 우리를 보며, “수천 송이의 장미꽃들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그 가운데 어떤 한 송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실상의 소경에 비유합니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망가지는 것은 미에 대한 감각만이 아닙니다. 진을 찾는 지성도 선을 쫓는 양심도 똑같이 틀어지고 엇나갑니다. 진선미는 삼발이처럼 하나를 이루고 있
기 때문에 그 가운데 한 쪽이 고장 나면 나머지는 따라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감각이 참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된 만큼, 지성은 진리를 벗어나고 양심은 선을 추구할 힘을 잃어 우리의 행위는 외형만 남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사이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됩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숨지시던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백인대장에 대하여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 예수님을 마주보고 서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15, 39)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 2)
2.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증언합니다. 오순절에 사도들과 많은 신도에게는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고 혀 같은 불길이 보였습니다. (사도 2, 2-3 참조) 겁쟁이, 배신자였던 그들을 놀랍게 변화시킨 것은 그들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듣는 것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락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한 성령은 듣고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때문에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 본산인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뒤에는 오늘 우리의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을 비둘기 형상으로 유리화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초대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 친 혈육처럼 친교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모든 어려움도 성령의 판단으로 극복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 15, 28) 그리하여 복음전파의 힘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기적과 표징을 보이며 날로 신자 수가 증가하며 구원 받을 이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사도 2, 43-47 참조)
3. 개신교회에서 바라본 천주교회
2007년 10월 개신교 신학자들의 모임인 <목회 사회학 연구소>에서는 2006년 그들의 포럼자료를 엮어 <그들은 왜 가톨릭교회로 갔을까?>라는 자료집을 출간하게 됩니다. 2005년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종교란에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는 종교는 가톨릭뿐이고 개신교 신자 수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는 보고에 충격을 받아 발행한 자료집입니다. 특별히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종교를 바꾸고 가톨릭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개신교 신학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있는 자료입니다. 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 (특별히 한국천주교회)의 장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꼽았습니다.
1) 신비적 이미지의 전통적 전례
2) 쉼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매력 (묵상의 종교)
3) 약자들의 피난처
4) 외부요인에 대한 융통성
5) 보편교회로서의 결속력
6) 성직자, 수도자의 청렴성, 교회 재정의 투명성
7) 정의, 인권, 봉사의 교회
마침 기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요한 3, 5-6)
<영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