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항상 남아(男兒)니 대장부(大丈夫)니
말하는데, 남자가 하늘과 땅의 순수하고 강건하며 지극히 바른 기운을 타고나, 마음가짐과 일을 행하는 것이 부녀자와 다른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해관계나 생사에 직면했을 때 과감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장부는 극히 적으니, 어찌 사람이 싫어하는 일 가운데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여자로서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주 없거나 드문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아주 절박하고 위급한 때가 지나고 나면 이해를 따지는 마음이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의리를 바로잡아 뜻을
세우고, 죽음 보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기며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근래 그런 사람을 한 명 얻었으니, 바로
당악(棠岳
해남)의 열부 박씨(朴氏)가 그 사람이다.
박씨의 본관은 면성(綿城
무안)이다. 아버지는 휘(諱) 민채(敏彩)이고, 할아버지는 휘 수경(壽卿)이며, 진원 현감(珍原縣監)
백응(伯凝)의 5대손이다. 숭정(崇禎) 두 번째 경술년(1730, 영조6) 4월 5일에 당악의 장촌(長村)에서 태어났다. 겨우 품을 벗어날
나이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7세에 고을 사람
민정수(閔廷洙)에게 시집갔는데, 시댁에 들어서자마자 부인의 덕을 온전하게 갖췄고 여자가 해야 할 일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보는 사람마다 이미 박씨의 남다름을 알 수 있었다.
임신년(1752, 영조28) 겨울, 박씨가 홍역에 걸려 병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남편 또한 병이 옮아 증세가 매우 위독하였다. 박씨가 병을 무릅쓰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을 한 뒤 한 데서 기도를 올리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소원하였다. 그 당시 눈이 심하게 내려 한 길 높이로 쌓여 있었고, 응달은 여러 달 얼어붙어 있었으며, 거센 바람과 사나운
추위가 예년과 크게 달랐다. 집안사람들이 박씨의 병이 심해질까 걱정하며 한사코 말렸는데도 끝내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남편을 살려 내지
못하자 박씨가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몇 차례였다. 기어코 박씨가 남편과 같이 죽으려고 하자 집안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곁을 지키고
있어 예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누운 채 여러 달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편의 장례 날을 며칠 앞두고 시어머니 오씨(吳氏)가 죽 그릇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이르기를 “죽은 사람을 애통해한들
무엇하겠느냐. 죽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더구나 아비를 잃은 두 살 된 딸아이가 젖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애처롭지 않느냐. 또
아들을 잃은 시부모에게 더해질 슬픔을 생각해 보거라. 네 남편의 장례 날도 이미 정해졌으니 지금이 네
스스로 마음을 극진히 할 때이니라. 그러니 부디 이 죽을 먹고 아무쪼록 조금이나마 마음을 편안히 가지거라.”라고 하였다.
박씨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어머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라고 하더니, 죽 그릇을 받아 죽을 먹었다. 비로소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했으며, 옷을 깨끗이 빨아 놓고 새 버선을 지었다. 몸소 술 빚을 쌀을 씻었는데, 제사에 쓸 술이어서 아주 정성스럽게 찌고 빚었다.
이윽고 여종을 부리며 여러 일을 시키고 살피니, 집안사람들이 박씨를 믿어 지키는 일을 조금 느슨하게 하였다.
얼마 뒤 어린 딸을 끌어다
품에 안아 한동안 젖을 먹이며 쓰다듬더니 바닥에 내려놓으며 “울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이어 어린 계집종을 넌지시 부르더니
“내가 지내던 방에 가보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그 방은 남편이 살아 있던 당시 함께 지내며 따로 밥을 해 먹던 곳이었는데 남편이 죽은 뒤로는
비워 두고 쓰지 않던 곳이었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더니 어린 계집종에게 “내가 기운이 없는데 나물밥이 생각나니, 너는 가서 미나리를 뜯어
오거라.”라고 하였다. 잠시 뒤 어린 계집종이 돌아왔는데 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라 와서 살펴보니 이미 새끼줄로 목을
매 숨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볏단과 작은 칼이 박씨의 시신 아래 있었으니, 볏단은 발을 딛기 위한 것이었고 작은 칼은 자신을 찌르려던 것이었다.
이날은 계유년(1753, 영조29) 3월 4일인데 그달 20일이 남편의 장례 날이었다. 결국 같은 날 고을의 북쪽 관동산(館洞山) 곤향(坤向
서남향)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의리를 좇아 죽던 날 이웃 사람들 모두 급히 달려와 살펴보았다.
이웃에 살던 노파가 이야기하기를 “아침에 아씨께서 이 늙은이에게 ‘이제 불과 열흘만 지나면 서방님께서 땅속에 묻히신다네. 생각건대 이 미망인이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내가 꾹 참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단지 시아버님의 황달병이 더욱 심해질까 염려스럽고, 젖먹이 딸아이가
천연두에 걸려 같이 죽게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라네. 지금 시아버님의 병이 이미 나았고 딸아이 또한 차차 좋아지고 있으니, 나는 죽기로
마음먹었다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아기씨를 쓰다듬으시며 ‘사내아이가 아닌 것이 애석하구나. 살는지 죽을는지, 믿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이구나.’라고 하시더니, 집 앞의 보리를 가리키시며 ‘저 푸르디푸른 보리는 서방님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라네. 소나 양이 함부로 짓밟지 않게
할멈이 돌봐 줬으면 하네. 5월 보리가 여물 때면 이웃 사람들이 박복한 운명을 지닌 이 사람을 생각이나 해 줬으면 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당시 비록 몹시 마음이 북받쳤지만 이 같은 지경에 이르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라고 하더니 흐느껴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노파의 말을 들은 사람은 남자라고 하더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유생 1백여 명이
현감 및 관찰사에게 박씨의 실제 행적을 적은 상서(上書)를 올려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3년이 지나 어사
- 한광회(韓光會) - 가 별단 서계(別單書啓)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명하여 정려(旌閭)를
내렸다.
아아, 여자가 남편을 대할 때나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그 의리는 한결같다. 저렇게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하늘의 해만 보더라도
부끄러워 얼굴에 땀이 흐르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남자이다. 죽음은 진실로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부인이 남편을 쫓아 죽지 않는 경우가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 바야흐로 남편이 죽을 때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함께 죽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수그러들어 어린 자식은 어미를 부르며 품으로 파고들고, 세월이 흐르면 죽은 사람은 세월과 함께 점점 멀어지니, 무릇 눈길이 닿는 데마다 마음이
쏠려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 푼 생기면 죽고자 하는 마음이 일 푼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들 그러한 때에 마음속으로 하고자 한 바가 끝내
사는 것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박씨 같은 경우 시아버지의 병이 조금이라도 낫기를 기다렸고 그 딸아이가 죽지 않을 만큼의 날만
기다렸다. 남편과 영영 이별하던 날, 처음 먹었던 마음을 바꾸지 않고 굳게 결심했으면서도 제사 때 사용할 술을 정성스럽게 빚었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차분하게 서두르지 않았는데, 평상시 편안하게 할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의 행동으로 효도와 자애, 그리고 의로운
절개를 모두 이루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예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정에서 특별히 명해 정려문을 내려 준 것은 당연하다.박씨의 남편 민정수(閔挺洙)는 본관이
여흥(驪興)인 명망 있는 집안으로, 개국 공신이자 부원군인 민제(閔霽)의 막냇동생 후손이다. 대대로 유학을 익혀 남쪽 지방의 이름 있는 집안이
되었다. 아버지는 휘 민진구(閔鎭九)로, 중후하고 삼가면서 고상하여 덕을 닦는 선비로서 명망이 있었다. 어머니 평해 오씨(平海吳氏) 또한
단정하고 순일하면서 마음이 맑고 총명했으며 규범(閨範)은 매우 엄숙하였다. 민정수는 그 둘째 아들로, 용모가 보기 좋고 태도가 반듯했으니, 또한
훌륭한 수재였다. 갑인년(1734, 영조10) 9월 24일에 태어나 임신년(1752) 11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외동딸은 잘 자랐는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