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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6.25한국전쟁과 1950년대 한국교회의 현실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해방의 기쁨은 찰나의 순간 만큼이나 짧았습니다. 평화와 안식의 시대로 향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한국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쟁의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제국에 의해 큰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았던 재앙은 35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긴 시간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멸망의 기로에 섰을 때 바벨론 포로가 유대로 돌아가는 마음처럼 한국교회는 성전재건을 위한 노력의 시간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국민끼리 전쟁을 해야하는 참상위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놓고 서로가 생명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막장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948년 10월19일, 김지회 중위를 중심으로 광주군 제14연대 장교들과 공산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발생한 “여수 순천반란사건”은 사건발생 4시간만에 여수경찰서와 군청, 주요역사 등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서 사건은 확대되었습니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반란군에 의해 인민재판이 즉결적으로 시행되었고 경찰관들과 가족들 1,200명이 무참하게 처형되었습니다. 1948년 10월21일, 좌익학생들은 손양원 목사의 장남이며 기독교학생회장인 손동인을 예수쟁이 두목이라는 죄목으로 동생인 동신과 함께 무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반란군들의 경찰관에 대한 적개심은 좌익청년들이 경찰서에서 당한 고문과 폭력에 대한 보복성격이 짙은 성격의 일탈이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은 좌익계열의 군인과 학생들의 소요로 시작되어 광주4연대 소속 진압군까지 합류함으로서 2천여명으로 확대되었고 군사적으로 취약한 전남동부지역의 6개군을 일시에 장악하는 면모를 과시하였습니다. 10월20일, 미군사고문단은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백선엽 정보국장을 중심으로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들어갔습니다. 10월21일, 여수, 순천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고 23일에는 순천을 탈환하였습니다.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 송호성준장이 여수반란군의 기습으로 후퇴하였다가 25일, 재탈환에 성공하였으며 27일, 여수순천지역 6개군이 모두 토벌군에 의해 장악됨으로서 반란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계속하던 김지회, 홍순석, 지찬수 등이 11월경 대규모 토벌작전가운데 사살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란군 토벌작전중에 2,000~5,000명에 이르는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다소 감정적인 강경대응으로 인하여 이승만 정부 출범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은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해방직후 일제에 편승하였던 기득권세력을 타파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의 만남은 그야말로 하나의 동일한 목적위에서 중요한 일치점이 있었고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독교인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사회주의는 유물사관으로 인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일수 없고, 종교를 하나의 부르조아적 사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달랐습니다. 자유주의와 함께 미국군정이 기독교적 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남한은 복음전파에 매우 유익한 땅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북한에서 사회주의와 맞서며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지만 수많은 살해현장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극악한 탄압을 계속하고, 입술로는 만인의 평등을 말하지만 철두철미한 계급사회요 주종관계가 바로 공산주의라는 것을 한경직 목사는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반공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하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지칭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야 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오직 기독교만이 높고 낮음이 없는 가장 평등한 종교라고 천명하였습니다.
김일성 정권은 소련군 철수를 빌미로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1948년 12월부터 1949년 6월29일까지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를 완료하였습니다. 모든 물자와 한반도 핵심시설이 북한에 있는 한반도에서 남한은 북한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악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소련이 남겨둔 각종 군사장비와 철저한 전쟁준비속에서 북한은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총진군하며 남침을 기습적으로 강행하였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은 전쟁개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20일, 낙동강전선까지 점령하는 총 공세가 계속되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아래 지리산에도 빨치산부대가 거대한 조직을 가진채 남한의 잔존세력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 6월27일, 전쟁발발 3일만에 UN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고 6월30일, 미국 트루먼대통령은 미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중앙위원회 성명서를 발표하며 북한을 비난하였습니다. 전쟁 개시 2개월 20일만에 맥아더 원수의 지휘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9월28일, 마침내 서울을 수복하고 10월25일,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11월25일에는 압록강과 함흥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UN군의 북한 지역 점령으로 한때 북한 공산당에 의해 고립되었던 국민가운데 450만명이 자유대한을 찾아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11월26일, 압록강 북쪽에서 공산주의 국가로서 존립기반을 구축하던 중국공산당은 일제콤플렉스를 느낀 탓인지 30만명의 군사를 북한지역에 참전시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전쟁종전 1개월도 남아 있지 않은 형국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까지 남과 북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공방전을 계속하며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혈전을 거듭하였습니다. 6.25전쟁에서 승자는 누구일까요?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였던 일제시대를 마감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생명까지 담보해야 했던 한반도는 피냄새로 진동할 만큼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북한 점령기간동안 또다시 배도의 길을 걸어간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산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북한 공산당 교육성 대표 이만규는 서울 중앙감리교회에서 공산당을 찬양하고 선전하였으며, 각 교회마다 민주동맹을 결성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김욱, 감리교 김창준 목사는 YMCA종로회관에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여 김일성 환영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장로교 최문식 목사는 북한을 지지하는 기독교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북한공산당의 기습공격으로 미쳐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숨어있던 목회자들을 밀고한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UN의 전쟁개입으로 서울 탈환이 임박해지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북한공산당은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교의 송창근, 남궁혁, 성결교의 김유연, 구세군의 김삼석 사관 등 한국 기독교 대표자들을 강제입북시킨 후 이들의 생사여부와 행방을 알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일제시대는 물론 6.25한국전쟁중에도 성결교단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교단이 해체된후 복원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폐허가 된 성결교단은 존폐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휴전협정 체결후 북한에 남아있던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완전 청산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와 함께 한순간 북한에 이용당하였던 목회자들까지 모두 순교의 제물이 되거나 살해됨으로서 북한에는 그 어떤 기독교세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28일, 손양원 목사는 미리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양을 버리고 갈수는 없는 일이라고 고백하며 150명의 우익인사들과 함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한가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너무나 쉽게 자행하였습니다. 한국선교 50년이 되기도 전에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기독교는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법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복구하면 무너지고 또다시 복구하면 다시 무너지는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것이 살아남아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져 있었습니다.
(1) 전후 복구사업과 교회의 재건운동
6.25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에 돌이킬수 없는 상처를 남긴채 휴전되었습니다. 땅은 황폐하였고, 이어진 기근은 대참사를 부르며 전국민을 좌절과 절망속으로 빠뜨렸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장로교 152교회, 감리교 84교회, 성결교 27교회, 구세군 4교회 등 267개의 교회가 완파되는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등 300여명의 교회지도자를 잃어야 했습니다. 전체교인 가운데 2명을 제외한 73명이 학살당한 전북 옥구 원당교회, 43명의 모든 교인이 생매장 당한 전남 진리교회, 66명이 학살당한 충남 논산 성동병촌교회 등 기독교인 대상 학살을 게임하듯이 즐겼던 공산당의 만행은 그야말로 죄악중 극악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일치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전쟁때에는 이념 때문에 또다시 분리되었습니다. 한권의 성경을 놓고도 첨예하게 대립되는 생각의 차이는 각자 옳은 소견대로 살았던 불신앙의 유산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카톨릭에 대한 대학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원도 묵호성당 레일어 신부, 춘천성당 콜리어 신부, 영등포성당 이현종 신부 등 성당과 사제와 수녀들과 신도들을 가리지 않는 대학살로 인하여 북한지역에는 단 한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월남한 피난민 450만명을 비롯하여 남한에는 800만명에 달하는 이재민들이 있었습니다. 20만명의 전쟁고아들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고, 28만명의 미망인들이 52만명의 자녀들과 함께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남북한을 합쳐서 30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의 생명이 무고하게 죽어갔습니다. 생존하였으되 회복불능의 장애인이 되거나 고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환자들도 1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심각하였습니다.
1951년 11월12일, 미국 여자클럽총연맹(GFWC)은 450만명의 한국여성을 위해 150만 달러모금운동을 조직하였고, 1951년 5월4일, 한국구호회(ARK) 회장 더글라스 페어뱅스는 1천만 난민구호품으로 1천5만달러의 구호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CKD는 116만달러 규모의 구호품을 지원하였습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1951년 9월,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위원회를 조직하고 의류, 곡식, 부식물, 현금 등 구호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수족절단자를 위한 의수족 사업, 피난민 보호소 보조, 모자원, 고아원, 영아원, 양로원, 급식소, 피해복구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전후사업복구에도 지원을 계속하여 1959년, 2300만파운드의 식료품, 82만7천파운드의 의류, 비누, 의료품을 공급하여 고아원, 모자원, 나환자, 요양소, 결핵요양원, 의수족사업회 등 776회 기관과 89개 교육기관을 통해 보급하였습니다. 한편, 세계적인 문맹퇴치운동기구인 “계명협회”의 라우박(Laubach)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던 한국어 사업을 1954년부터 전개하여 한글독본, 예수의 이야기, 예수의 말씀 등 경건서적과 소책자를 출판보급하였습니다. 계명협회는 장로교 성경구락부와 감리교 웨슬리구락부와 전국주일학교의 36,600명의 회원과 연계하여 청년전도, 복음전도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1954년 7월, 감리교 웨슬리구락부는 제프리(F.B.Jeffery) 선교사의 사역으로 수원과 인천지방 15개 구락부가 7~15세를 대상으로 하는 초등교육(미션스쿨)을 시작하였습니다. 1958년 6월, 218개 미션스쿨에 11,697명의 학생이 재학중이었고 연인원 30,474명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구락부 자원봉사 교사도 1,056명에 달하였고 이 가운데 10,384명이 기독교복음을 믿고 신자가 되는 놀라운 성과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의무교육으로 전환한 후에는 1961년, 중등교육을 시작하여 3천여명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전파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기독교방송국의 설립이었습니다. 1954년 12월15일, 민간방송 최초로 개국한 "HLKY"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연합이 이루어 낸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서울과 UN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방송과 영어방송을 겸하였으며 북한지역 주민들을 위한 대북기독방송도 시작하였습니다. 1959년, 대구에 HLKT, 부산에 HLKP 방송국이 차례로 설립되어 전국방송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에서 복음주의방송국 HLKX를 설립하였습니다. 인천에 설립된 HLKX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방송을 통하여 아시아권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방송청취자들의 대부분이 불신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을 위한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방송국은 “소망의 시간”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였습니다.
1950년 7월10일, 해리힐과 존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아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UN군부대주변에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설립되었고, 이들은 부대의 이동지를 따라 다니며 생명과 안전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선명회, 아동복리회, 스완슨의 양친회 등이 설립되었고, 홀트아동복지회가 한국 입양아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홀트가는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였고, 1959년까지 홀트복지회는 2천명의 한국아이들을 미국으로 입양하여 건강하게 자라가도록 후원하였습니다. 1953년, 토레이는 의수족사업을 시작하여 2,000명의 상이군인과 민간들의 재활사업을 촉진하였습니다. 1959년, 존 스틴스마(John Steensma)는 수족제작과 보급, 사용법 교육과 장애인취업알선과 장애인기업을 통한 재활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로서 토레이와 존 스틴스마는 장애인들의 사회복귀를 성공적으로 견인한 장애인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세브란스병원과 협력하여 연 700명의 소아마비 환자를 치료하였고, 전국 흉곽진료소를 통하여 5,000명의 환자에게 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교회재건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교회와 주일학교, 교육문화, 사회, 후생, 농촌, 경제, 산업분과위원회별로 세계교회가 한국교회를 지원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본부, 국제선교협의회, 기독교국제연합위원회 등 세계기독교 기구임원들이 내한하여 실상을 확인하고 재건사업에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1949년에 이어 1952년 12월15일, 6.25 한국전쟁중 부산에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가 전도집회를 개최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위기앞에서 기독교인은 회개와 간구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1956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서울에서 특별전도집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하며 희망을 주었습니다. 밥 피얼스(Bob Pierce) 목사는 1949년, 월드비전을 설립하여 한경직 목사와 함께 전도와 구제운동에 나섰습니다. 1955년, 밥 피얼스는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등 대도시를 순회하며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2만명의 결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1952년, 장로교 총회는 전도의 해로 선포하고 4단계전도전략을 실천하였습니다. 1~3월은 개인의 부흥, 4~5월은 개인전도, 6~10월은 연합전도, 11~12월은 교회별전도로 큰 열매를 얻었습니다. 감리교는 1953년, 웨슬리250주년 기념사업으로 특별부흥전도의 해로 하였으며, 성결교는 1952년 3월, 춘계대복음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54년, 선교70주년 기념으로 장로교회는 5개년계획으로 전국 490여지역에 교회설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감리교는 100교회 설립목표로 교회설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50~1955년, 장로교회는 1,200개, 감리교회 500개, 성결교회 250개, 각 교파교회 100개 등 2,050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습니다. 남침례교 선교사 존 아버내티(John Abernathy)가 입국하여 1950년, 동아기독교를 침례교회로 개명하였으며, 1952년, 대전에 예과 3년, 본과 3년 과정의 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1954년, 데일 리체슨(Dale Richeson) 선교사가 내한하여 교회재건 사업을 적극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대전 고아원, 광주 양로원, 부산 모자원과 용산 성서학교를 설립하여 복지와 신학교육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용산 성서학교는 향후 그리스도대학교로 승격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실질적인 신학요람이 되었으며, 1959년, 17개 교회, 교역자 19명, 1,550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대한크리스챤교회는 1954년 신학교 교사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40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됨으로서 75개의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55년, 주일본 선교사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부부와 1957년, 리처드 래쉬(Richard Lash) 선교사가 내한하여 교회재건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1959년, 대한크리스챤교회는 80개 교회, 45명의 교역자, 2,000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나사렛교회는 1943년, 장성옥이 서울 서대문외 영천에 설립한 자생적인 기독교회였습니다. 그후 1947년 6월, 미국 나사렛교회총회는 한국나사렛교회를 승인하고 미국 주재 정남수 목사를 한국 지방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954년, 미국 나사렛교회 총회본부는 도날드 오웬스(Donald Owens) 목사부부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1957년, 엘든 코넷(Eldon Cornett) 선교사 부부를 추가로 파송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서울 영등포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1960년까지 3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26개 나사렛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교단은 1932년 8월, 배부근, 박성산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메리 럼세이(Mary C.Lumsey) 선교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선교사역을 하여 1941년, 포교소 6개소, 포교자 4명, 신도 80명으로 성장하였으나 일제시대 교회는 강제 폐쇄되었습니다. 1947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 체스넛(Arthur B.Chestnut) 선교사가 내한하고, 1952년, 하나님의 성회 동양선교부장 오스굿(Osgood)이 내한하면서 하나님의 성회 한국선교부가 조직되었습니다. 영어회화에 탁월한 능력을 겸비한 조용기는 신학교 졸업이전에 선교사들의 통역사로 일하며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천국, 재림의 오중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성회는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진 민중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서 가장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1953년 3월15일,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오순절회와 통합하여 4월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용산남부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1953년 2월, 생명의말씀사를 통하여 팀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소책자, 전도지, 찬양대성가집, 청년찬송가를 발행하였습니다. 1956년 12월, 인천에 HLKX라디오방송국을 설립하여 단일교단 최초로 방송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959년, 하나님의 성회는 고아원 2개, 서울신학교, 26개 개교회, 34명의 교역자, 8,762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55년, 성서침례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고, 세계선교회와 독립선교회가 1953년, 부산을 거점지역으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교회협의회는 1953년 9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기독교단체로 성장하였고 1960년, 20여개의 교회단체와 선교단체가 가입하였습니다. 기독교서회는 1960년, 200여종 270만부의 찬송가, 성경주석, 설교집, 주일학교교재, 기독교대사전, 기독교사상, 월간 새벗을 출판하여 문서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한성서공회는 6.25한국전쟁기간중에 20만권의 성경을 소실하였지만 새롭게 성경발간 및 배포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새롭게 재건된 주일학교연합회는 주일학교와 가정교육, 청소년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 기독교교육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근대학교가 부재하였던 한국의 학원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발전을 가속화하였습니다. 평양 감리교의 광성중고등학교가 서울에 복교되었고, 개성 호스톤여학교는 대전에서 복교되었습니다. 장로교의 숭실학교, 숭의학교, 보성학교등 중고등학교가 서울에 복교되어 장로교가 운영하는 중고등학교가 6개에 달하였으며, 감리교도 5개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숭실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희대학교, 세브란스의과대학, 대구의 계명대학교 등이 한국의 대학교육을 선도하였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비정규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정규학교 취학의 기회를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1959년, 장로교는 7천개의 성경구락부에서 7만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감리교는 1천여개의 성경구락부에서 12,0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으며 문맹퇴치와 함께 기독교적 사회관을 갖추도록 양육하였습니다. 이러한 야학과 특별학교에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경통신학교였습니다. 스왈른(W.L.Swallen) 선교사가 시작한 성경통신과정은 선명회와 대구 기독교부흥협회의 성경통신과정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가정교육과 스스로 학습형태로 공부하는 평생교육으로 지금도 이러한 방식의 과정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동교회 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2월7일, 아시아최초로 군목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설립된 조선경비대에 군종제도를 도입한 이래 3년만에 이룬 성과였습니다. 정훈장교 정달빈 목사, 황기오, 이민광, 홍은혜 등 30여명이 남산교회에서 군인예배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전북 군산 보병 제12연대에서 장병들이 지역 민간인 목사를 초빙하여 매 주일 영내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6.25전쟁중 미군 제33사단 제10공병대대 한국인 카투사 사병이 성직자가 군내에서 전투장병들에게 신앙으로 무장하게 하고 총경상을 입은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줄 것을 진정하는 진정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감리교 선교사 쇼(William E. Shaw), 로마카톨릭 캐롤(Caroll Geo), 극동사령부 군종부장 베넷(Ivan L.Bennett)이 군종참모를 소집하여 한국군의 군종제도 도입을 결정하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승만대통령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등 기독교교단이 군종제도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장로교 한경직, 감리교 류형기, 카톨릭 캐롤 사제를 대표로 대통령과 면담후 1950년 12월21일, 대통령 비서실 지시 국방신 제29호와 1951년 2월7일, 육본 일반명령 제31호로 육군본부 인사국내 군승과가 설치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자원봉사형태로 봉사하다가 1954년, 군목을 정식 현역장교로 임명하였으며 1955년 8월, 육해공군에 재직중인 군목은 장로교 159명, 감리교 71명, 성결교 47명, 기장 27명, 카톨릭 27명 등 331명이었습니다. 전쟁기간중에 전쟁포로 164,000명에 대한 선교사업을 추진한 기독교는 60,000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습니다. 대구와 부산에서는 해리 힐 목사, 중국인 전쟁포로들에게는 얼 우드베리, 그리고 헤롤드 보켈과 캠벨 선교사와 감리교 쇼를 비롯한 한국인 교역자 20여명이 선교사업을 주력함으로서 전쟁포로들 가운데 16,000명은 송환을 거부하고 국내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성서공회는 15만권의 성경을 포로들에게 제공하였고, 무디성경학교는 50만장의 전단지를 제공하였으며, 세계기독교선명회는 예배에 필요한 오르간, 트럼펫, 아코디언, 플롯, 하모니카 등 악기를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