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잡고 있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衡 1415-1477)의 묘소이다.
문수산을 주산으로 하는 이곳 좌우에는 처녀의 두 젖가슴 모양의 쌍유혈(雙乳穴)명당이 있다.

두 젖모양의 명당 쌍유혈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른 쪽 유혈 명당에 저헌 이석형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묘역이 장풍이 잘 되어 왼쪽의 정몽주의 묘역보다 혈(穴)자리가 더 커서 명당으로 평가된다.

문수산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잉(孕)이 도톰하고 실하게 봉긋이 자리하고 있다.
저헌 이석형의 묘역은 아주 단촐하다. 봉분 앞에 있는 상석과 향로석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묘비는서쪽 방향의 측면으로 세워져 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이 한 쌍 서 있을 뿐이다.

이석형의 묘에 합부된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이다.이석형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서이다.
연일정씨가 이석형과 혼인한 후에도 남편 이석형은 벼슬살이 하느라고 한양에 가 있었다.
부인 정씨는 그냥 향촌인 이곳 문수산 아래 살고 있었다. 지관을 들여 문수산 일대를 둘러 본 결과
가운데 2개 날등 중에서 오른 쪽이 아주 명당이라는 언질을 받아 장차 이석형의 묘자리로 점 찍어 놓았다.
나라에서 정몽주의 묘를 이장 할 곳을 바로 문수산으로 정하고 다음날 지관이 묘 터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일정씨는 밤중에 산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는 물웅덩이에서 밤새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오른쪽 날등에 부었다.
다음날 조정에서 보낸 지관이 먼 앞산에서 문수산을 바라보고 가운데 두 날등이 다 괜찮은데 오른쪽 날등이 아주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지관은 오른쪽 날등이 축축하게 물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한다.
"아! 아깝다. 이 좋은 자리에 물이 나니 묘자리로는 안되겠다."
왼쪽 날등으로 결정하고 돌아가 정몽주 묘는 왼쪽 날등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석형이 죽은 후 오른쪽 날등에다 묘를 썼다. 이석형의 후손은 아주 번창하였다.
그 후손 중에는 대단한 인물이 속출한다.
① 8정승(八政丞: 인조6년 李廷龜, 효종원년 李時白, 영조28년 李天輔, 영조34년 李후, 정조6년 李福源,
정조12년 李性源, 정조23년 李時秀, 순조27년 李存秀),
② 삼대 대제학(三代 大提學)을 비록하여 대제학 6인(선조34년 李廷龜, 인조9년 李明漢, 효종10년 李一相
삼대 대제학, 영조37년 李鼎輔, 영조48년 李福源, 순조1년 李晩秀 2대대제학),
③ 조선조 대표적인 문장가 월상계택(月象鷄澤: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鷄谷 張維, 澤堂 李植)의
월사 이정구를 비롯하여 문장가록(文章家錄)에 오른 4인(李石亨, 李廷龜, 李明漢, 李天輔),
④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성공으로 이끈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부자(三父子: 부 李貴 1등 延平府院君,
장자 李時白 2등 延陽府院君, 3자 李時昉 2등 延城君),
⑤ 육조(六曹) 판서(判書 : 正二品) 37인,
⑥ 2대 3부원군(府院君), 9대 11인의 봉군(封君:1대 李貴 延平府院君, 2대 李時白 延陽府院君, 李時聃 延豊府院君,
李時昉 延城君, 3대 李炘 延昌君, 4대 李相胃 延城君, 5대 李泳 延恩君,
6대 李明熙 延原君, 7대 李瑜 延陵君, 8대 李度陽 延川君, 9대 李押 延豊君) 등을 배출한다.
이 집안에서는 한 사람의 역신이나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고, 청백리(淸白吏)와 충효절열(忠孝節烈)이 줄을 이어 나왔다.

저헌은 호와 이름자가 모두 특이하다. 호의 경우 저(樗)라는 글자는 ‘가죽나무’, 즉 쓸모없는 것을 지칭한다.
저헌이 이 글자로 호를 삼은 것은 역시 정자 이름인 계일(戒溢)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낮추고 넘침을 경계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재갱득첨유림(樗材更得忝儒林)’.
‘보잘것없는 자질로 다시 유림의 모임에 참여했네’라는 식으로 저라는 글자를 써서 겸양한 시가 여러 편 있다.
‘석형(石亨)’이란 이름자도 독특하다. 부친인 의정공(議政公) 이회림(李懷林)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삼각산에서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다.태어나기 전날 밤 궁중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을 꾸었다.
백룡이 큰 돌을 깨고 나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니 아들이 태어났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석형(石亨)으로 이름을 지었다 한다.

저헌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 구내인 연건동에 있는 집에서 1415년(태종15) 10월 10일에 태어났다.
10세 때 모친상을 당했고,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27세 봄에 생원, 진사, 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뽑혀 이때부터 ‘삼장원(三壯元)’은 그를 부르는 별칭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보면 ‘세조가 늘 이석형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궁녀들에게 명해 삼장원사를 부르게 하고
술을 내렸다(每引內殿 命宮女唱 三壯元詞 以侑酒)’라는 내용이 보인다.
조선의 3대 명문 집안으로 사계 김장생의 광산김씨, 약봉 서성의 달성서씨, 월사 이정구의 연안이씨를 꼽는다.
저헌 이석형이 바로 월사 이정구의 고조부로 연안이씨를 명문가로 중흥시킨 중시조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설곡 정보가 정몽주의 손자이므로 이석형은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 사위가 된다.
성삼문, 박팽년등의 사육신이 처형당한 사건에 처가가 연루된다. 그도 사육신의 절의를 존중하였다.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조의 총애로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종1품의 품계인 판중추부사에 까지 오르며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혼-이순장-이계-이정구-이명한-이단상-이희조로 이어지는 걸출한 관동파 인물을 배출한다.
관동은 당시 성균관주변의 반촌을 말한다. 저헌 이석형의 거처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연안이씨 관동파의 정신적고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고 전한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계기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왕실의 골육상쟁 계유정란을 그는 무사히 넘긴다.
이석형은 훈구파였다. 그와 사육신인 성삼문사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그가 1441년 (세종 23년) 문과에서 장원을 하고 세종 29년에 중시에도 합격했다.
세종이 팔준도(八駿圖)를 직접 만들고 그림위에 쓸 전(箋,표제문)을쓰도록 명받자 다음의 글을 두련으로 썼다.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이 천년운세에 감흥하고
天祐作之君 聖人應千年之運
땅의 쓰임이 말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신물이 있는 힘을 다바치네
地用莫如馬 神物效一時之能
성삼문은 이글의 뛰어남을 알고 '이번 과장에서는 이석형의 글이 가장 우수하구나'라고 생각,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대가 시골 촌놈으로 이 글을 지은 모양인데 말과 사람을 댓귀로 하는 건 좀 우습다"라고 빈정댄 것이다.
석형은 이말이 진정한 충고라고 생각해 답안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글을 썼다.
이때 성삼문은 자신의 답안지에 윗시를 옮겨써 일등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한다.(대동기문)
그의 순탄한 관운은 승승장구 문종때 집현전직제학, 세조때 형조참판,대사헌, 경기도관찰사를 거쳤다.
성종때 판중추부사,연성부원군까지 올랐다.
그의 가문이 조선시대 3대명가(광산김씨,달성서씨,연안이씨)가 되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