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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전국시대를 마감한 나라는 진나라로써, 진나라는 열정적인 군주 영정(시황제)이 즉위한 후 6국을 병합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도량형, 문자, 화폐 등을 통일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하여 군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 그러나 통일 진나라는 가혹한 법(법가 사상)과 과중한 부역 등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불과 3대 15년만에 망하게 되었다.
■ 진시황릉 :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시호 : 시호는 공과 덕이 있는 사람에게 죽은 후 그 행적을 칭송하여 추증하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시호는 진시황제이다. 시호는 임금이 공신이나 중신에게 사시 혹은 추시 하였는데, 중국의 제갈공명, 우리나라의 이순신, 김시민의 시호는 충무이다.
■ 분서갱유(焚書坑儒(焚書阬儒)) : 법가를 제외한 유가, 도가, 묵가의 사상가들을 생매장하거나 책들을 불태웠던 사건
■ 만리장성 :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이며,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다.
■ 아방궁 : 진시황제가 세운 궁전으로 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건설에는 죄수 70만이 동원되었으나 시황제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않아 2세 황제에 의해 나머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셴양 부근에 세워진 수백에 달하는 궁전군(宮殿群)은 2층으로 지은 복도와 담장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길로 종횡으로 이어져 아방궁에서 웨이수이강[渭水]을 건너 직접 셴양이나 난산[南山]의 정상에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아방궁을 포함한 이 궁전군은 BC 207년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탔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 여씨춘추(呂氏春秋) : 중국 진(秦)나라 때의 사론서(史論書)로 일종의 우화집이다.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진나라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가 빈객(賓客) 3,000명을 모아서 편찬하였다. 이것이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성어가 기록됨
■ 군현제 실시 : 중국 및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실시한 지방 행정제도.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였던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시행하던 군현제도로 징발과 징세를 위한 효과적인 제도로 중앙에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지배하였다. 일정한 지역에 귀족이나 왕족, 공신을 제후로 봉하여 지배하게 하는 봉건제와는 다르다.
■ 진승ㆍ오광의 난 : 중국 역사상 처음 발생한 농민반란이다. BC 210년 시황제의 막내아들이 즉위하자 민심은 흉흉했고 천하는 어지러웠다. 다음해 7월 진승과 오광은 만리장성 수비를 위해 징발된 부대를 이끌고 지금의 베이징[北京] 방면으로 진입해갈 때 폭우를 만났다. 진승은 본래 비천한 신분 출신으로서 남에게 고용되어 농사일에 종사한 사람이었다. 큰 비 때문에 정해진 기일까지 현장에 도착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문책으로 죽을 것을 겁내 공모하여 감독자를 살해한 뒤, 대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여러 현을 공략하는 한편, 진승이 왕이 되어 오광으로 가왕(假王)을 삼고 국호를 장초라 하였다. 이에 자극받아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6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유방과 항우에게 진은 멸망하였다.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할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보다 강력한 군대와 질서의 힘이었습니다. 진나라는 4세기 중엽부터 법가의 사상을 받아들여 엄격한 법으로 나라의 질서를 잡아 나갔습니다. 또한 이러한 법가에 힘입어 빠르게 나라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또한 많은 전쟁으로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들이 신나게 전쟁할때 몰래몰래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부터인데 진나라는 남방의 초나라를 압박해 강대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256년엔 동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47년엔 13세의 진시황이 왕위에 오릅니다.10년간 진나라는 초나라와 한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혀 거의 휘하에 집어넣고 이사를 재상으로 임명해 각 나라에 밀정을 보내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 온다고 민심을 혼란케 했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의 위치상 서역과의 무역이 가장 유리했고 또한 황하와 양자강 모두를 끼고있어 농업생산량도 풍족하고 인구도 많았죠. 진나라는 이러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기원전 230년엔 한나라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고 다음해엔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쇠약해진 조나라를 쳤습니다. 조나라는 40만에 가까운 대군을 한단에 집결시켜 싸우지만 참패당하고 멸망합니다. 진나라는 특히 궁수와 기병이 강했는데 조나라의 수성전도 이 궁수부대때문에 모두 참패로 끝난거였죠. 연나라엔 비상이 걸려 당대 최고의 검사인 지금도 중국 무술인들의 우상으로 남아있는 형경으로 하여금 진시황을 암살케 합니다. 강을 건너는 형경을 배웅하던 절친한 친구 고점리의 고문고는 유명하죠. 또한 연나라의 번장군도 조국을 위해 목을 내놓았고 형경은 번장군이 진시황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번장군의 목을 가지고 진시황을 찿아갑니다. 진시황은 크게 만족하며 번장군의 목과 함께 연나라 지도를 받았으나 그 지도안엔 단도가 있었습니다. 형경은 그 단도로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진시황이 요리조리 피하자 계속 쫒아갔습니다. 진시황의 내시인 조고가 "폐하 검을 등에 업고 뽑으십시오." 라고 외쳐 진시황은 8척이나 되는 검을 뽑아 형경을 공격해 위기를 모면했죠. 이 일을 구실로 B.C 225년엔 위나라를 다음 해엔 초나라를 2년 뒤엔 연나라를 멸했습니다. 그리고 221년엔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중원의 최강자인 제나라를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법가에 지나친 의존으로 너무나 가혹한 통치를 했고 또한 다른 문명과의 단절을 위해 만리장성 축조에 들어갔는데무려 4000Km 이르는 어마어마한 성을 쌓기위해 100만 이상의 백성들이 공사장으로 끌려가고 오죽하면 "장성가"란 노래가 유행했을 정도였으니, 내용이 "사내아이라면 낳지를 마라 계집아이라면 귀하게 길러라. 보지 못했는가. 장성아래 징발되어 죽은 사내들의 해골이 겹겹히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을..." 이렇듯 가혹한 통치와 함께 환관 조고와 재상 이사의 권력다툼이 심각해지고 또한 진시황은 유능한 아들 부노를 죽여버리고 무능한 아들 호해를 태자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아방궁이란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을 세웠는데 70만을 동원해 공사를 벌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법률을 비판한다고 유가의 학자들 460여 명을 생매장시켜 버리고 그들의 서적을 모두 불태워 버리니, 이것을 "분서갱유"라 하죠. 그리고 진시황 생전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이 권력의 중심점이 사라지자 그간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의 중심세력이 진승과 오광, 유방과 항우죠. 또한 재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권력다툼이 그 정절에 이릅니다. 안 멸망하는게 이상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