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예배와 삶의 변화 (로마서 12:1-8)
* 2017년 정유년은 정유라의 체포와 함께 시작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어진 박 대통령 탄핵소추 2차 변론에서 서석구 변호사(1981년 공안당국이 조작한 ‘부림사건’의 재판을 맡았던 담당 판사)의 망언이 정초부터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촛불민심이 국민의 민의가 아닌데도 국회가 이를 탄핵사유에 넣었다”면서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주도한 세력은 민주노총”이고 “촛불민심은 국민의 민심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 더 가관인 것은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예수는 십자가를 졌다. 언론은 부실한 자료를 토대로 다수결의 함정을 이끌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여론의 모함으로 사형장에 가는 소크라테스와 같다”는 궤변이었다. 서 변호사가 재판을 앞두고 기도하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런 모습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킬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지난해 연말부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단순히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이 땅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은 물론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의 향상이다. 연초에 기자들을 초대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태연히 늘어 놓는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그녀의 권력 유지를 도왔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좋지만 인성이 결여됐거나 인성이 결여됐는데 머리까지 나쁜지 기가 막힐 뿐이다.
* 그 나라 시민의 수준은 그들이 뽑은 지도자의 수준이라는데 그 말이 우리나라에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2016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는 촛불정국에서는 시민이 지도자-이 말보다는 권력자라는 말이 더 나을 것-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개, 돼지 취급을 당하며 조작과 통치 대상의 대상으로 치부되던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그 위력이 산을 옮길 만큼 거대하다.
* 11차로 이어지는 촛불집회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마치 민심은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은 시원지에서 출발할 때는 아주 미약해 보이지만 이곳저곳에서 모인 물줄기들이 합쳐 내를 이루고 하천을 이루다 거대한 강과 합쳐지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된다. 중간에 둑이나 댐을 쌓아 물의 흐름을 잠시 막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가두지는 못한다. 둑이나 댐의 높이 이상까지 차오르게 되면 흘러넘치거나 둑과 댐 자체를 부술 수도 있다.
* 둑이나 댐에 작은 구멍이라도 나면 그 구멍을 통해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구멍을 점점 더 크게 만들어 결국 둑이나 댐을 무너뜨리고 만다. 평상시와 달리 폭우가 쏟아지게 되면 물은 평소처럼 온화하거나 잔잔하지 않고 질풍노도처럼 엄청나게 두려운 존재로 돌변하기도 한다. 2016년과 2017년은 그런 질풍노도의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군주민수(君主民水)’라는 사자성어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자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그 의미를 집중 조명할 것이다.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여러 방식의 조명을 통해 그 성과와 교훈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 교인들 역시 이 역사적 사건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고 눈과 귀를 기울이시기 바란다.
* 개혁과 혁명의 기운이 온 나라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드는 시기에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할 일은 예수를 따르며 예수의 길벗이 되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 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 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올바른 신앙이란 자신이 믿는 것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조금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올해는 가급적 성서 본문을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그렇다고 강해식 설교를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특정 본문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면서 그 흐름 속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는 메시지를 현 상황에 접목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이번 주부터는 몇 주 동안에 걸쳐 로마서 12장부터 15장(16장은 인사말)까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구원에 대한 이론, 즉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포함된 12장 이후(~16장)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장부터 11장까지도 살펴보고 싶지만 내용이 방대하고 교리적인 부분이 많아 기회가 되는 대로 부분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보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12장 이후를 중점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 12장 1절과 2절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방식이 설명된다. 바울은 1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라고 설명한다. 제사는 모든 종교의 기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지만 그 출발점 역시 구약의 제사였다. 그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제사장과 대제사장이고 기독교식 예배에서는 목사와 신부가 그에 해당한다.
* 구약 제사의 기원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는 대로 농부였던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쳤고, 목자였던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가인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기록된다.
* <신의 위대한 질문> 2장도 이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어 수요기독교강좌 시간에 함께 논의를 했지만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인용해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라고 증언하지만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드린 제사에 이어 모세의 출애굽 이후 본격적으로 제사의 방식을 정리해 오랜 세월 율법으로 지켜왔다. 레위기 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 소나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한다. 또한 레위기 23:10-12을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릴 경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함께 드리라고 명령한다.
* 그 장구한 역사의 제사를 파격적으로 재정립한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모든 종교의 제사에는 제물이 사용된다. 기독교의 예배에는 제물이 아니라 예물이 사용된다. 바울은 이를 산 제물(개역에서는 산제사)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제물보다는 예물이 더 바람직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그 제물/예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예배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성별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기도도 마찬가지지만 기도만 하는 시간과 예배를 드리는 시간의 차이는 말씀의 선포와 수용이다. 참된 예배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성별된 시간이어야 한다. 단순히 지식을 얻는 시간이 아니라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하고 결단과 삶의 변화가 이어져야 한다.
* 2017년 새해에는 우리 하늘씨앗교회의 예배가 더욱 성별되고 거룩하게 드려지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변화가 일어나는 합당한 예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단순히 예배 시간에 늦지 말고, 예배에 빠지지 말고, 기도나 사회, 찬양 등을 진정으로 준비하고 예배 시간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라는 기본적인 요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실 것이다. 그런 형식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부분이다.
* 적어도 1주일에 1시간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로 인해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으며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작은 변화나마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레위기에서 그토록 자세하게 제사의 방식을 설명하신 하나님은 호세아 6:6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라고 말씀하신다.
* 이사야서 1장 2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삶의 변화 없이 진정으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를 거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그러면서 제사의 회복을 위해 다음과 같은 변화를 요구하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는 비록 구약의 제사에 대한 언급이지만 기독교의 예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 2절은 예배 회복을 위해 필요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 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라. 적어도 예배를 통해 이 세 가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결단과 변화가 일어나야 제대로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결단과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포되는 말씀이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하다.
* 먼저 이 세대, 즉 잘못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는 바울의 시대만이 아니라 이후의 모든 세대에 해당된다. 잘못된 세상을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거룩한 저항’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는 피아노 조율에 비유할 수 있다. 피아노를 오래 치다보면 음색이 고르지 않고 바른 음이 나지 않게 된다. 그때는 조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조율은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500년 전의 종교개혁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이 상실한 기독교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당시 개신교 개혁자들도 분명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단 가톨릭이 면죄부 판매 등 뚜렷한 잘못을 저지르자 교황도 인간이고 같은 인간끼리 죄를 사할 권한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95개 반박문으로 저항하기는 했는데 과연 그 주장이 과연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될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모든 권한을 가진 가톨릭의 권위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들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성경에서 나왔다. 성경은 경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경(經)이라는 한자는 세로로 된 줄, 즉 날줄을 의미한다. 베를 짤 때 이 세로 줄이 고정되어 있어야 가로줄인 씨줄을 엮으며 옷감을 짤 수 있다.
* 그래서 날줄이 옷감을 짤 때 고정된 상태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성경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신앙의 기준 역할을 하는 책이다. 원문에 대한 번역이나 해석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원문보다 더 오래된 본문이 발견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본문의 내용 자체는 500년, 1000년, 2000년 전이 지나도 동일하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의 변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기독교인의 올바른 자세는 세상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거나 고백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준으로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날줄로서의 성서를 붙잡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른 씨줄을 엮어 그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짜는 것이 우리의 몫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리고 우리 몫의 옷감을 제대로 짜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한다.
*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는 세례 요한과 예수가 요구한 회개(메타노이아)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겉모습보다 속 모습, 즉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바뀌려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상대방 눈의 티끌은 보면서도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눈의 들보를 없애고 상대방 눈의 티끌을 없애려는 사람도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예수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무늬만 기독교인일 뿐 참된 기독교인일 수 없다.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성서라는 분명한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류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성서이다. 그렇다고 성서를 주술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연말에 하는 말씀 뽑기라든가 무작위로 성서를 펼쳐 나오는 구절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속단하는 행위 등이 그에 속한다.
* 성서는 기독교인에게 가장 유용한 나침반이지만 모든 길을 일러주는 네비게이션은 아니다. 나침반을 읽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우리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해야 한다. 식사 메뉴나 읽을 책을 정하는 일까지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있는 경우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과 같이 우리와 주변 사람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해당한다.
* 기도는 물론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의 상담이나 특별한 체험 등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뜻임을 명확히 밝히는 말씀들이 종종 있다. 그런 말씀들에 의지하면서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 올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다.
-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살전4:3)
-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6-18)
-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벧전3:17)
*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성서를 통해 주로 드러나지만 우리의 이웃이나 낯선 이의 목소리를 통해, 때로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촛불집회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의 뜻을 구하기 전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른바 진인사대천명의 정신이다. 물론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격언이 있다. ‘Do your best, and God will do the rest.’(최선을 다하라,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상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믿는다. 우리 각자의 변화도, 교회를 비롯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조직의 변화도,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임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이다.
* 비슷한 맥락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은 이 나라 민주시민들의 뜻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100년 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일조했던 소련공산당의 브레인 레프 트로츠키는 “진정한 혁명 정당의 첫 번째 특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촛불혁명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과 지향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일 것이다.
* 2017년을 맞아 새로운 운영위도 구성이 되고 지난 해 추진했던 일들을 계속 이어나감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이 이뤄질 것이다. 하늘씨앗 여러분 각자도 올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뤄야 할 일은 각자 노력하시되 교회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바란다. 삶의 변화를 통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 바란다.
*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란다. 내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다. 1000일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직도 2014년 4월 16일에서 머물러 있는 유가족들과 미수습자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감하면서 그 아픔을 덜어주고 그런 비극이 다시는 이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믿는다.
첫댓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나를
성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고 묵상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 아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요. 항상 그렇게 살려교 노력하시는 송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