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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남덕유산에는 눈이와서 아름다운 설경이 이어진다.
설경속에 남덕유로 올라 남강을 이어 가느냐? 아니면 비오는날 남강으로 가느냐 고민을 하다가
남덕유에서 남강 발원지 찾는 문제로 비오는날 남덕유산으로 오르기로 하고....
전국적으로 비가 오는 12월 26일날 남덕유로 향한다.
비오는날의 남덕유는 온통 안개로 가득하고 전날까지 그많던 상고대며 설화는 모두 사라졌다.
남강을 찾아서 남덕유 정상 모습
남강 186km의 발원지가 어딘지 궁금해진다.
자료에는 남강의 발원지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 천왕샘과 남덕유산(봉황산) 은재골 참샘 두곳으로 올라와 있다
강유역 면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발원지가 남덕유산이다.
그리고 고문헌에도 남강의 발원지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봉황산( 현,남덕유)이라 표기하고 있고
동시대의 필사본 지도 "동여도"에도 봉황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언제쯤부터 지리의 천왕샘과 남덕유의 참샘이 남강의 발원지라 불리웠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흐르는 물은 모두 경남의 식수원이며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513km)에 합수 되기까지
낙동강 제1지류로써 유역면적 3467㎢.길이 186.3km에 달하며 서쪽 끝자락에서 함양군 서상면에서 시작해서
동부 지역 창녕지역까지 내륙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끝모두 경남에 두고 있다.
남덕유산 아래 참샘 안내판
남강 발원지 참샘과 남강 발원지 지리 천왕샘 안내판을 보면
둘다 2005년도 10월에 한국 수자원 공사에서 만들었는데 날짜가 모두 동일하다.
지리 천왕샘
역사적으로 남강 유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많은 해택을 받은 도시가 진주였기 때문에
진주하면 남강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남강하면 떠오르는 인물 아마도 조선시대때 임진왜란과 진주성싸움의 논개 부인의 충절이 아니가 생각해 본다
진주 아니면 보기 힘든 진주 남강의 유등축제는 인진왜란때 1592년 10월 진주성 싸움에서 김시민 장군이 3천 8백의 군사로
왜군 2만을 크게 무찌른 진주대접때 성밖의 의병과 지원군과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려는 군사 전술로 쓰였다.
통신수단으로 쓰이던 유등은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던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뒤
나라위해 목숨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死民의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해마다 유등축제로 이어져 내려온다.
진주속의 남강은 전체 186.3km중 40km이지만 진주 사람들에게 남강은 떼놓을수 없을것이며
남덕유에서 발원한 남강은 지리 천왕샘에서 발원한 함양에서 임천강을 만나 남강으로 흐르며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길 덕천강(46km)과 만나 진주시 진양호로 들어 가지만 결국은 모두가 남강의
물줄기인 샘이다.
이른아침 남덕유 국립공원 사무실의 직원분께 참샘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니
거기는 출금지역이라 갈 수 없다고 한마디 한다.
내가 찾고자 하는 남강 발원지는 참샘이 아니기에 애써 찾으러갈 필요도 없고
눈길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질퍽거리는 등산로 따라 3km 1시간 정도 지나서 남덕유에 오른다.
안개 자욱한 남덕유에 올라 홀로오신 산객분께 인증 담아 본다.
-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묻는다
"남강 발원지 꼭지점부터 시작해서 내려 갈려는데 계곡따라 가야 할것 같습니다."
-따라가도 되나요-
"오시면 안됩니다.사고 날 수도 있으니...
-그런데 왜 그쪽으로 가십니까-
"저는 디져도 상관 없어요 ㅎㅎ"
이렇게 몇마디 잠시 나누고 스처가듯 대간길로 몇발짝 움직인다.
어느곳으로 내려가느냐 이생각을 하다가 대간길 삼거리까지 내려와서
다시 정상 방향으로 올라 무작정 절골방향 계곡따라 거침없이 내려선다.
진행방향
남덕유에서 흘러내린 빗줄기가 처음 남강으로 흘러가는 절골방향
경사가 심하고 온통 덩쿨나무가 앞을 막는다.여름이라면 고생 좀해야 할듯한곳
바로위에는 남덕유 정상 방향
내려가는곳
계곡산행이라지만 눈이 너무 많아 발원지 물줄기 찾기가 쉽지 않아 걱정이 앞선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려가니 바위 너덜지대속으로 물소리가 졸졸 들린다.
눈을 파 보지만 바위 너덜속으로 흐르는 물을 찾는건 어려움이 있어 좀더 내려가본다.
해발 1,376m 지점
바위 너널지대에 남강 발원지라 해도 될 물이 많이 흘러내린다.
아마도 남강 발원지는 좀더 상류에 있겠지만 그곳은 수량이 얼마안될것 같고
이곳은 수량이 많고 가물어도 물이 흘러 내릴것으로 보인다.물맛도 좋고
이제 물길따라 하염없이 186km의 대장정길로 가면 되니
너도 흐르고 나도 흐르고
진행 경로
남덕유산 정상아래 빗물 꼭지점따라 계곡으로 진행
경사가 상당히 심해서 눈길에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어려움은 있었지만
물길따라 낙동강이 합수되는 지점까지 걸으면 될일만 남았다.
앞으로 대간을 하거나 종주를 하거나 물 떨어지면 저곳에서 물 보충하면 될듯한데
누가 저곳을 찾아서 물 보충할지
훗날 더운날 저곳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해볼필요는 있을듯하다.
상류에서부터 너덜지대는 이어지며
흐르던 물은 처음 한곳에서만 얼굴을 보여주고는 너덜지대속으로 완전히 몸을 감추고
기나긴 겨울과 함께 적막감마져 흐른다.
덩쿨 지대를 지나 내려온곳
입고 있던 비닐 비옷는 다 떨어져 반토막도 안남았고
비는 그칠줄 모른다.
내려온곳
물은 너덜지대 속으로 하염없이 흐르고
물 소리가 무척 경쾌하게 들린다.
이곳부터 수량은 제법 많다.
물은 다시 너덜지대 속으로 사라지고
어느정도 내려오니 몇몇곳 작은 계곡이 합수되면서 수량은 많아진다.
출입금지 구역인데 온통 고로쇠나무 수액을 체취하는 작은 고무 호수가 어지럽게 보인다.
지역민은 봐주는건지 아니면 산꾼만 통제하는건지 내 알길 없지만
단속이라도 어느정도 형편성있게 했으면 언놈은 봐주고 언놈은 안된다 하니
계곡의 물소리는 힘차고
a형 독감으로 지독한 기침소리가 온계곡을 울린다.
흐르는 물에 잠시 씻고 보니 물이 그렇게 차갑지 않다.
맑은물이 흐르고 흘러 어느땅에서 더러운 물과 썩여 더러워질지
남덕유와 서봉에서 합수되면서 물은 계곡이 되었다.
지난 여름 대간때 그렇게 웅장하게 들리던 이곳의 물소리가 다시금 들리는듯...
등산로는 덕유 교육원으로 가는길과 만나서 좋은길로 가게 된다.
독감으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대구로 향한다.
12월 26일 비오는날 남덕유에서 빗물 꼭지점 부터 내려와 영각사까지 진행하고
12월 섯달그뭄날 다시 찾아간 함양의 영각사
오늘은 이곳부터 함양 안의면까지 30km 이어 가야한다.
대한 불교 조계종 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의 절이며
신라시대때 창건된 사찰로써 한때는 해인사에 버금갈 많큼 큰 수행도량이었다고 한다.
화엄종 맥을 계승하는 사찰이다 보니 화엄전(비로자나불)을 모시며
아담한 팔작 지붕에 부연 석가래 그리고 단청이 아침햇살을 가득 담아 곱고 빛난다.
단청은 임금이 사는 궁과 사찰에서만 할 수있는 빨갛고 파랗고 훌긋 불긋한 색이 특징이다 일반 사가에서는 단청을 할수
없었다.
사찰에 거주하는 龍이 화엄전을 지킨다.
중국에서는 임금을 황룡에 비유하며 황금색은 중국의 임금만 사용하는 고유의 색이다.
조선의 임금은 중국의 제후국이었기에 제후국의 국왕은 모두 붉은색 옷을 사용한다.
하지만 단 한분 고종 황제는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색복장을 사용 하였다.
명,청시대의 황궁인 자금성에는 황색 기와가 빼곡 했으며 황색 기와는 중국의 유서 깊은 사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황색은 황제만 사용하는 색이지만 부처님은 황제와 동급의 지위에 계셨던 분으로써
황금색 불상의 기원은 인도에서 시작 했지만 최소한 중국에서 성인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부처님의 모습이 황금색으
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 계신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였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곳을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황제가 사는곳을 전(殿) 궁(宮) 이라 하는데 이 글자로만 봐도 부처님은 군왕과 같은 예우를 받았음을 알수 있다.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도 황금으로된 집을 소유할 수 없었고 99칸 이상의 건물을 증측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부처님을 모신곳은 예외로 두어 용,황금으로 치장 할 수 있었다.단청 역시 궁이나 부처님 계신곳 이외는 사용이 금물이었다.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었으니 승천하는 용이라 할 수 있고 손에 여의주를 쥐고 있는 용이라면 아직도 승천할수 없는 용
이다.
사찰에서 龍(용)은 이곳 대웅전 뿐만 아니라 누각,법고에도 있고 쌍룡.황룡.청룡이 그려져 있으니
대한 불교 조계종의 대웅전이나 화엄전의 용은 "승천하는 용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용을 상징한다"
영각사 절집 구경하고 나와 본격적인 남강 물줄기에 자리하는 이산 책판 박물관으로 가서
지하 1층에 자리하는 박물관
용비어천가
해동 육룡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며
육룡이란? 조선 태조의 고조인 목조로부터 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에 이르기까지 6대를 높여 이르며
육룡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그의 아들뿐 아니라 그들의 선대를 이르는 말이다.
박물관 내부 모습
멀리 서봉이 보인다.
서봉은 상고대가 있는지
내년에 대간길을 한번 더 간다면 다시 올라볼 덕유산 서봉
남강을 둘러싸고 흐르는 남강 기맥길의 월봉산과 칼날봉
남강 물길을 안고 흐르는 남강 기맥길
남강기맥 137km
백두대간 남덕유산(봉황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낙동강 제1의 지류로써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덕천강 합류하여 다시 진주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틀어
함안천과 합류하며 멀리 경남 의령군 성산면과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사이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는
유역면적 3467.52 km² 강길이 186.3km이다.
기존의 진양기맥(156.8km) 남덕유-한우산까지 107km 우봉지맥길 한우산-남강과 낙동강 합수점까지
30,6km 도상거리 137km 이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의병대장문공태서태지
의병대장 문태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을사조약 체결후 1906년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던 분이시다
1911년 8월 17일 고향을 찾았다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지인의 신고로 서상면 영각사에서 체포되어
1913년 옥중에서 자결 하셨고
태서공의 생가는 바로 근처에 있었지만 정보가 부족하여 지나치게 된다.
남강 물줄기가 처음으로 숨고르기 하는 서상 저수지
서상면에서 방지로 가서 남강하면 떠오르는 인물 주논개님의 묘을 찾아서 인사를 드린다.
의암신안주씨지묘
잘 정돈된 주논개님의 묘
남강하면 진주가 떠오르고 진주하면 적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논개가 생각난다.
성은 주(朱)씨 이며 이름은 논개(1574-1593)는 역사적으로 남강과 필연적으로 묶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개는 주 씨 성으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이 고향이고
임진왜란 1년후에 1593년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성아래 바위(의암)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이후 논개는 신분상의 이유로 의로운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다.
논개 무덤 바로 위에는 남편 병마 절도사 최경회의 묘가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가묘)
주논개님은 이곳 거창군 서상면 방지마을에서 서쪽에 자리한 백두대간 준령 구지봉과 육십령 그사이 장수군 주촌마을
지금의 대곡 저수지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이 김풍헌의 집 민며누리로 팔아 버리자 어머니와 함께 도망을 가게되고
얼마후 장수현감에 붙잡혀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게된다.
누명을 벗었으나 갈곳이 없게된걸 안 장수 현감(최경회)은 자기 부인의 병수발드는(침방관비) 일을 맏게 되고
이후 현감 부인이 지병으로 죽게되자 주논개는 현감의 2번째 첩이 된다.
현감의 첩이 되었으니 기생이라는 전설은 아니다.
주논개님의 남편인 최경회 장군의 가묘
병마절도사로 제수된 최병회는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0만 왜구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자 몇몇 장수 3명과 함께
남강물이 흐르는 진주성 아래 의암에서 투신한다.
이후 주논개는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의 잔치날 음력6월( 7월 7일) 기녀로 꾸며 참석하여
왜장 "게아무라 로구스케"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7월7일 주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하는날 논개의 시신은 장마에 떠내려가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는 이야기와
먼저 남강에 투신한 남편 최경회의 시신은 왜구가 목을 본국으로 가져가 도요토미에게 보내져서 교토에 효시되어
시신을 수습할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라도 화순에 있는 최경회 후손들도 인정하지 않은 이곳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에 자리한 최경회의 무덤
가묘로 보인다.
주논개님 묘 에서 본 방지리 芳地 (방지)꽃같다 뜻의 이름
논개님의 묘가 왜 고향 장수군 주촌에 있지않고 함양군 서상면 백두대간 자락의 방지마을에 있는것인가?
이유는 논개가 진주 남강에서 죽음을 맞아 시신이 고향 장수군으로 가는도중 이곳 서상면까지 오는데만 여러날 걸려
시신이 말도 못하게 부패했는데 거기다 육십령을 넘어야 했던터라 육십령은 도둑때가 많아 하는수 없이
육십령을 넘지 못하고 고향 집 주촌마을 20km전 지금의 서상면 방지마을에 묻혔다는 설
주촌마을에서 신분상의 이유 기생이라하여 시신이 고향으로 오지 못하게 해서 이곳에 묻혀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인증 담고
의암논개 반장 의병 추모비
논개의 시신을 반장해 왔다는 비석이다.
이유야 어쨋거나 주논개의 시신이 진주에서 이곳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에 당도 했을때 시신은 썩고 냄새가 나서
고향을 지척에 두고 이곳에 묻혀을때 왜!이곳에 왔는가 하는 문제가 있지만
그당시 방지마을에서 육십령 고개를 넘는것 보다 방지마을에서 백두대간 준령을 구지봉 바로 넘어 대곡저수리로
가는 고갯마루가 있었다고 한다.
백두대간 육십령 이야기
1.거창군 안의면에서 60리, 장수군에서 60리 라고 해서 붙여진 설
2.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설
3.고개가 가파르고 도적때가 많아 장정 60명이 모여서 넘어야 한다는 설이 잇는곳이다.
이후 묘가 만들어지고 장수군 주촌마을 생가에서 주논개 묘에 벌초하러 다녔다고 전한다.
1980년대 장수군 주촌면 주논개 생가에서 논개의 생가지가 복원되고 함양군에 논개의 묘를 이장 해가려고 하자
함양군에서 묘지 이장은 절대 안되다고 하며1986년도에 8억을 들여 지금의 묘를 정리하게 되었다.
다시 남강 길로 이어간다.
주논개님 묘를 지나서 다시 남강길로 오다보면 작고 아담한 방지산이 보인다.
방지산성
이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 이자 격전지 였으며 육십령 고성, 이곳 서상면 방지산성,황석산성, 함양 지곡리
의 마안산성,함양군 수동면 연화산의 사근산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이성은 방지산 정상부분의 골짜기를 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방지라는 산이름은 산봉우리가 연못에 떠있는 연꽃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위해 쌓았다고 하며 백제인들이 추수기에 수확한 곡식을 약탈할 목적으로
자주 침범하였다고 한다.이같은 유래로 이산성을 곡식을 쌓아둔곳이라하여 合米城(합미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삼국시대 신라,백제 변방의 성터 모습
성터 모습으로만 봐도 그당시 이동 교통로가 대충 그려진다.
힘든 산은 포기하고 남강가로 진행
황석 산성 이야기는 강행기 후반에 다시 쓰기로 하고
방지산성터 안에 자리하는 연못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
지금도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는듯 소나무 낙엽만 없으면 마셔도 될듯한 우물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521m이나 지금은 원형으로 보존된곳은 동쪽 성벽뿐이다.
성터 모습
남강과 방지산성 모습
멀리 백두대간의 깃대봉이 아담하게 자리한다.
우측의 소나무가 가득한곳이 방지산성터가 있는 방지산
함양군 서하면의 서하 파출소 자리에 적 피습 대비 방호벽
이방호벽은 6,25전쟁 중 덕유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방어를 위하여 당시 지서 경찰관들과 마을 주민들이 돌과 흙으로
방호벽과 참호를 축성하여 마을을 지켜냈다
지금은 참호 4개중 3개는 없어지고 1개와 방호벽 일부만 남아있다.
서하면과 멀리 백두대간 까칠이 백운산이 보인다.
월평교에서 본 남강
거연정 가는길에 바위와 소나무
이름을 새겨 놓은 분들이 계시는 사인암 자리
괘관산이 지척이고
하림재 전공 바위
이름은 바위에 새기는게 아니고 이름을 알리는 사람이 됩시다.
바위마다 저마다 이름을 새겨서 알린다.
함양 거연정
고려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중추부사를 지낸 하림재 전시서 선생이 처음 터를 잡은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7대손 진사 전재학이 건립하였다.
거연정
하림재 전공 추모사당
가을에 오면 기막히게 좋을곳이다.
물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고
금방이라도 뭔가 꿈틀대며 나올듯한 기운이 든다.
거연정 주변 모습
하림계곡 선비 문화 탐방
남강 길에서 지금까지 경치가 가장 좋은 구간이다.
함양에는 이런 정자가 100여개나 된다고 한다.
정자는 자연경관을 구경하며 한가로이 쉬거나 휴식을 하는 요즘 같으면 펜션 정도로 생각하면 쉬울듯하다.
선비는 이곳에서 낮잠을 즐기고 하인은 물고기나 잡으며 철엽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연정,군자정,동호정,농월정은 오래된 정자이나
영귀정,람천정 두곳은 최근에 지어진 정자라서 별로 볼품이 없다.
봉전교에서 본 군자정
거연정 주변 모습
함양 군자정
조선시대 일두 정여창 선생이 유영하던곳 조선 성종때 성리학의 학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표 5인방은 정여창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이 있었으며
좌,안동 우,함양이라 했던 이곳 함양의 대표적인 학자시다.
군자정을 알리는 현판액
선비 문화 탐방로
경치로 따진다면 봉화 청량산의 에덴길에 비교할바 못되지만 강물 많큼은 더 깨끗하다.
함양 동호정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뒤
이곳에서 유영하던 곳이다.
임진왜란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 몽진을 도운 분이시데
만고에 말 안듣고 고집쎈 선조임금을 몽진길에 미친척하고 길바닥에 페대기 쳤으면 더 욱더 유명해졌을듯
이곳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하려하게 정자를 지으셨다.
동호정 앞으로 남강에 차일암이라는 넓직한 바위가 있다.
돌다리 건너에서 본 동호정
수백명이 앉아도 될듯한 차일암 바위
동호정 주변 모습
징검다리로 얼음이 얼었고
강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거연정부터 나무테크길이 잘 조성 되어있는 구간이다.
남강물이 너무 깨끗하다.
물속의 돌하나까지 보이고 바위에 달라붙은 돌이끼는 보이지 않는다.
지나온 구간
돌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강가로 임도길이 보여 인도길로 계속진행 한다.
멀리 황석산이 보이고 도로변에 황암사가 보인다.
강가로 이어지는 산책로
황암사는 절이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릴까 생각하다가 다리건너에 보이는 홍살문이 예사롭지 않아
서하교 다리를 건너와서 보니 이곳은 정유재란때 나라를 지키다기 위해서 숙국한 순국 선열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숙연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붉은색 홍살문을 오르기전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한계단 한계단 오른다.
황석산성 순국 사적비와 중건비
황석산성 전투 (500대 2만 7천의 전투)
임진왜란후 조선을 다시 침범한 왜군 14만명중 2만 5천명이 음력 8월 16일 가또.구로다.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 (8월 16-18)의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안의 현감 곽준,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의 7개고을(거창,초계,합천,삼가,산청.안의)의 주민을 모아
관민 남여 혼연일체가 되어 피아간의 포격과 함께 조종으로 공격하는 왜군을 맞서 활과 창,칼로 투석전으로 대항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음력 8월 18일 황석산성을 함락되고 말았다.
이전투에 참여한 주민및 병사 수는 史書(사서)에서는 50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볼때 수천에 달하였
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40년에 황석산 아래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는 사액되어 이싸움에서 순절한 모든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위령재를
지내 왔으나 일제 감정기때 사당은 헐리고 추모 행사마져 중단되었다.
중건비 읽어 보시고
위패를 모신 황암사
황석산 전투에서 전사하신 민관군을 모신 의총
의총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하며 황석산성에서 싸우신 민관군 남여노소분들을 생각해본다
멀리 황석산이 올려다 보이고
천혜의 요새 황석산
일본군의 회유와 협박에도 성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미리 겁먹은 김해 부사 "백사림"은 도별장이라는 장수의 신분도
잊어 먹고 무장으로서 사명도 저버린체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새벽에 몰래 가족들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도망을 친다.
이때 황석산성 동북문 방어가 무너지면서 적군이 밀물같이 쳐들어와 성안은 순식간에 살육의 아수라장이 된다.
성안에서는 갑자기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백병전이 벌어진다.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고 이른 새벽부터 칼날 부딪치는 소리, 바위와 돌이 무너지는 소리,도끼와 몽둥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와 함께 민관군 남여노소의 목이 추풍 낙엽처럼 떨어져 간다.
결국 성내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자 곽준 현감과 조종도 전임 군수는 멀리 북녘하늘을 우러러 재배한뒤 어연한 자세로
최후를 마쳤으며 곽공의 두아들은 순사(殉死)하고 따님과 며느님들은 자결(自決)하고 조종도 전임 함양 군수의 부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이곳 주변 7개고을의 이름있는 선비들을 비롯하여 무명의 헤아릴 수 없는 남녀노소들이 순사 순절
(殉死 殉節)하였다.
그중에는 정절을 지키고자 했던 많은 아낙네들이 암벽 위에서 줄줄이 절벽으로 몸을 던졌고 그아래 바위에 선혈(鮮血)이
물들어 오늘날까지도 "피바위"라 불리는 곳이 있다.
초심을 잃은 "백사림" 이 한사람 때문에 황석산성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순절(殉節)하거나 희생(犧牲)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일제 감정기때 의병대장 문태서공께서도 고향 서상에 왔다가 가까운 지인의 고발(告發)로 영각사에서 잡혀
옥중에서 자결(自決) 하셨고 모두가 초심을 잃은 사람들때문에 의로운 분들이 고생을 하거나 순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슴아픈 황석산 전투 이야기가 머리속으로 그려지며
얼마전에 마친 낙동강 원동구간에 자리하는 임진왜란 작원관 전투 300대 18,700의 전투가 생각난다.
황암사에서 숙연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득안고 나와 한잔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농월정으로 간다.
농월정
정자가 많기로 소문난 함양이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정자가 바로 농월정이다.
현)함양에는 100개의 정자가 존재 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나다.
노는 함양의 정자와 공부하는 안동 고을의 서원
한번 쯤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하림동이라 써있고 곳곳에 알 수 없는 많은 한문이 써있다.
여름철 물고기 잡고 놀기에는 안성 마춤
멀리 황석산이 보이고
움푹파인곳이 황석산성쯤 되겠다.
저곳을 보니 마음이 무척 무겁게 느껴지니 찬바람 때문인가
거연정-영귀정-군자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을 잇는 약 6km의 코스로 선비들이 걸었던 아름다운 숲과 계곡
정자의 풍모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낙동강따라 안동의 선비문화를 엿볼 수 있는 농암종택- 퇴계선생의 도산서원길
그리고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물소리마져 적막한곳이다.
모두가 강따라 지어진 아담한 함양의 정자와 안동의서원의 대표적이라 할수 있지만
안동의 유교 문화권의 길은 사람이 거주를 했던곳이고, 이곳은 거주라기 보다 쉬는 공간으로서 자리 매김을 한곳이라
생각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기게 한장 더 담고
안의면 월림리 황대교 아래 철엽을 즐기기는 주민분들
한분은 큰 망치로 물속에 반쯤 들어난 바위돌을 힘것 내리치고 한분은 기절한 물고기를 주우러 다니신다.
물이 엄청 깨끗하다.
세분중에서 한분은 안보이고 두분만...
한분은 다리 아래서 망치로 돌을 내리치는지 돌과 큰 망치가 부딪히는 소리가 쩌정 쩌렁 울린다.
다리위에서 좀더 구경하고 싶지만 다리아래 세상은 더이상 안보여 물고기를 얼마나 잡았는지
알길도 없고
안의향교
향교는 유교의 옛성현을 받들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제를 양성하고 미풍약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 교육 기관이다.
이곳 안의 향교는 1473년 성종때 건립된후 여러차례 중수되었고 영조때 안의현이 폐지됨에 따라 향교도 얼마동안 폐교되었
다가 2년뒤에 더시 안의현이 복원되면서 그기능이 다시 살아남.
향교는 교육과 제례 두영역으로 나뉜다.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서재는 교육 담당
공자와 유명한 유학자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이 있다.
향교로 들어가 옛성현들의 가르침을 잠시나마 느낄까 했더니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담장또한 너무 높아 까치발로 버둥 거
려 보지만 안은 구경도 못하고 돌아 나온다.
돌팔이가 온줄 알고 미리 문을 굳게닫은 건지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붙들고 물어 보겠지만
날씨가 춥고 섣달 그뭄이라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안의면의 남강변에 자리하는 오리숲 근처 대로변에 자리한 안의면 선정비
오늘은 찾아볼것도 많고 배울것도 많은 구간이라 함양군 안의면까지만 하고 집으로 갈생각이다.
남강과 우축의 오리숲
이누각은 안의면 소재로 남강변에 우뚝 서있다.
조선 태종때 당시 이안(현 안의면) 현감인 전우가 창건하여 선화루로 불렀다가
조선 성종때 안의현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光風樓)로 개칭하였다.
버스 올시간도 조금 남았고 섣달그뭄날 안의면 버스 터미널 인근 시골 장터 구경을 하고 버스가 와서 대구로 향한다.
남강 꼭 가볼곳
1,주논개님 묘 -방지산성
2.황석산 산성- 황암사
3.거연정-함양 광풍루 6km 선비길
이중에서 1,2번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곳이고 3번은 꽃피고 새 우는날 가족과 함께 가보시면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것 같다.
그리고 남강길에 함양군 서상면과 안의면에는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좋은쌀과 인삼을 키우는 곳이 많고
삼국시대때 쌓은 변방을 지키던 성터가 남강길 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