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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짙고 진한 것은 세상에 미칠 자 없다
-조선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
국찬석(오주석 연구소 소장)
■ 겸재 정선 연보
1세 1676년(숙종 2) 1월 3일생
14세 1689년 부친 정시익 타계
36세 1711년(숙종 37) <신묘년 풍악도첩>(국립중앙박물관)
37세 1712년 <해악전신첩>
38세 1713년(숙종 39) 김창집 천거로 위수 벼슬을 얻음
44세 1719년(숙종 45) <기해년화첩>(호림미술관)
46세 1721년(경종 1) 하양현감 부임 -> 신임사화로 노론축출
51세 1726년(영조 2) 하양현감 임기 마침
54세 1729년(영조 5) <의금부계회도>
56세 1731년(영조 7) <서교전의도>(국립중앙박물관)
57세 1732년(영조 8) 이병연을 위해 <단발령도> 그림
58세 1733년(영조 9) 청하현감 부임 <교남명승첩>
59세 1734년(영조 10) <금강전도>(호암미술관)
60세 1735년(영조 11) 모친 별세 -> 서울상경하여 3년상
62세 1737년(영조 13) <사군첩>
63세 1738년(영조 14) 조영석을 위해 <절강추도도> 그림
64세 1739년(영조 15) <육상묘도>(개인) <청풍계도>(간송미술관)
65세 1740년(영조 16) <삼승정도>(개인) 양천현령으로 부임
66세 1741년(영조 17)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67세 1742년(영조 18) <연강임술첩>(개인)
70세 1745년(영조 21) 양천현령 임기 마침
71세 1746년(영조 22) <계상정거도> <풍계유택도> <무봉산중도> <인곡정사도>(개인)
72세 1747년(영조 23) <해악전신첩>(간송미술관)
74세 1749년(영조 25) <사공도시화첩>(국립중앙박물관)
76세 1751년(영조 27) <인왕제색도>(호암미술관) 이병연 타계
77세 1752년(영조 28) <우중귀려도>(평양 조선미술박물관)
79세 1754년(영조 30) 사도시 첨정(종4품)에 제수
80세 1755년(영조 31) 첨지중추부사(종3품 당상관)에 제수
81세 1756년(영조 32)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제수
82세 1757년(영조 33) <청송당도>(국립중앙박물관)
84세 1759년(영조 35) 3월 24일 타계
물음표 하나 ?
정선의 신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화원설 또는 직업화가설, 명문가 출신의 사대부화가설이다.
먼저 화원설 또는 직업화가설의 근거는 이렇다.
김조순의 <풍고집>이다.
“정선은 선대부터 오랫동안 이웃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나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서 나의 고조부인 김창집에게 먹고 살 수 있는 작은 벼슬이라도 구해달라고 요청하므로 정선에게 도화서에 들어가도록 권하여 처음으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
정술조의 상소문이다.
“사도시 첨정 정선은 천한 재주로 이름을 얻고 잡된 길로 몸이 발탁되어 이제까지의 이력만으로도 이미 지나침이 많거늘 이제 이처럼 새로 제수하시니 더욱 이는 전거에 없습니다. 청컨대 정선을 쫓아버리십시오.”
또한 조유수는 정선을 화공으로, 황윤석은 그를 화원에 있던 사람으로, 홍의영은 그를 화사로 지칭하였던 사실이 있다.
이에 대하여 최완수, 유홍준, 이태호는 화원이 아니라고 하며, 김원용, 이동주, 최순우, 유준영, 안휘준, 변영섭 등은 화원이라고 본다. 최완수는 겸재의 선대가 4대를 연이어 가며 당대 최고의 명문 거족과 혼인을 맺어 가는 것을 보면 비록 큰 벼슬은 못했을 뿐이고 몰락한 가정의 가난으로 인하여 화도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태호는 <광주정씨세보>를 조사하여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갈 중인 출신이 아니라 양반출신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유홍준은 “평생도화서 화원으로 일한 흔적이 없다. 겸재가 김창집에게 부탁하여 첫 벼슬을 얻은 것은 세자익위사의 위수 벼슬인데, 그 명분은 할아버지 정윤이 관리로서 나라에 공이 있었음에 근거했으니 애시당초 화원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반면에 안휘준은 “정선이 전혀 화원이 아니었는데도 이들이 그를 한결같이 화원으로 지칭하였을 리는 없다”고 보며 또한 “전형적인 사대부로서의 명분을 앞세우기에는 정선의 형편이 너무 절박했고 나이도 어렸”기에 “화원이 되는 것이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정선이 가족들의 굶주림과 궁핍을 면하게 하고 자신의 벼슬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 였다는 것이다. 김원용, 최순우는 정선이 화원이 된 것은 김창집이 관계로 복귀한 1694년(갑술환국), 즉 정선의 나이 18세 된 이후일 것으로 보고 있다.
물음표 둘 ??
진경산수화의 연원에 대한 설이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의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당시 동아시아의 시대적 흐름이라는 견해다.
먼저 조선 성리학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최완수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퇴계 이황에 이르러서이지만, 퇴계 다음 세대인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조선 성리학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 체계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한 학파를 형성하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서인이며, 서인의 율곡학파는 문화 전반에서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어 16세기 말 선조시대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문학, 간이당 최립의 독특한 한국한문학 형식, 석봉 한호의 조선 고유 서체 등이 그것이다. 그림에서도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고자 화원 화가인 이신흠에게 진경 사생을 부탁하였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다시 창강 조속이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산천을 시화로 사생했다지만 문헌에만 기록되고 현존하는 것이 없어 가늠할 수 없다. 창강 조속의 자제인 매창 조지운이 그 화법을 계승하여 직간접으로 겸재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겸재가 삼연 김창흡의 지도아래 재능을 발휘하여 진경산수화를 탄생시키고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동아시아의 시대적 흐름이라는 견해다. 한정희의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에 따르면 실학이라는 사상적 배경, 경제적 여유에 따른 여행의 활성화, 그리고 기행문학의 발달, 산수판화집의 유포와 전래가 한,중,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진경산수화를 탄생시킨 배경이라는 것이다.
안휘준은 <한국미술사연구>에서 실경산수화 전통의 계승, 남종산수화풍의 수용, 여행 붐, 지도 제작의 활성화, 자아의식의 팽배, 중국의 실경산수화, 판화, 화보의 전래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겸재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조선이 낳은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 몇 가지 관점으로 정선의 작품을 살펴보자.
이태호의 <옛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에 제시한 화법적 특징이다.
첫째, 부감시로 실경을 잡은 방식에는 심원법을 활용하였다.
1734년 작품으로 알려진 <금강전도>를 포함한 금강산 그림 대부분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실제로 금강산 어디에서도 <금강전도>와 같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처럼 날아올라 부감시로 상상하여 재구성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실경의 특징적 형상을 닮으면서 변형시키는 다시점 표현방식을 들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본 실경을 평시의 평원법으로 포착하고, 대상을 올려다보는 앙시 고원법을 한 화면에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 사례로는 1751년 작품 <인왕제색도>를 꼽을 수 있다. 전체적인 인왕상 포치는 북악 기슭에서 멀리 본 모습이다. 그런데 주봉은 시점을 이동시켜 인왕산의 중턱 옥류동 곧 그림 속 근경 저택에서 올려본 형태이다. 주봉의 오른쪽 성곽 너머에 유두 모양의 바위가 딸린 봉우리는 창의문 밖에서 보는 형태를 끌어온 것이다. 왼편의 사직단 쪽 봉우리는 주봉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좁혀 그렸다.
셋째, 과장법이다.
대표작으로는 1750년대에 그린 <박연폭도>이다. 앙시로 본 고원법 구도를 응용하였다. 우렁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암벽의 이미지를 조화시켜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단순히 실경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일보다 실경에서 받은 감명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의 양식이 탄생하는 과정으로의 작품이다.
첫째, 『신묘년 풍악도첩』에 실린 <금강내산총도>이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을 적어놓고 길을 뚜렷이 그려놓은 것을 보면, 이것은 완연히 지도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겸재는 앞시대의 미미한 사경산수의 전통, 그리고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겸재는 이제까지 익혔던 남종화법의 다양한 필법을 구사하면서 산세와 집과 인물과 나무, 바위 표현에서 종래의 사경산수나 지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를 만년작인 <금강전도>(1734)와 『정묘년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과 비교해보면 알 것이다.
둘째, 표암 강세황이 평한 “겸재 중년의 최득의작”이라고 한 <하경산수>이다.
그림의 소재와 정신으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정형산수로 관념성이 대단히 강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에는 겸재가 중년에 예술적으로 추구하고 고뇌하던 모든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 전통, 신사조, 개성을 추구하고자 한 고민의 흔적이다. 산수화로 말하자면 절파풍의 전통, 중국의 화보를 통해 들어온 남종문인화법의 신사조, 여기에 그가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진경산수에로의 길이다. <하경산수>를 보면 화면 상단의 암봉과 먼 산은 절파풍이고, 하단의 초가집과 안개표현은 남종문인화풍인데, 버드나무,전나무의 수지법과 냇가 암석의 표현엔 겸재가 진경산수에서 사용한 조선 산천의 분위기가 살아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떤 괴리감 없이 혼연히 조화하고 있다.
다음은 주역의 원리를 반영한 그림의 제작이다.
<금강전도>(1734)는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필묵의 농담 대비가 뛰어난 작품이다. 이제까지 금강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에서 사의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는 <도설경해>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역에 밝았던 사상의 근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외형상의 음양대비가 아니라 내용과 정신에서의 음양대비를 그림으로 구현했다. 토산과 골산의 대비(금강전도), 적묵법을 이용한 흑백의 대비(인왕제색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또한 영조의 명으로 그려진 <장주묘암도>를 보면 정선이 얼마나 주역에 정통했는지 알 수 있다. <장주묘암도>란 송나라 주자가 장주지사를 지내던 시절 활터에 <주역>의 원리에 입각하여 후원을 꾸미며 묘암을 지은 일이 있었던 바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즉, 주자의 <묘암도기>를 그림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이는 <주역>을 이해하지 못하 사람이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인 것이다. 또한, 겸재 만년에 대련으로 그린 쌍폭의 <음양산수도>를 보면 그의 <주역> 이해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음양산수도>는 ‘폭포’와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목에서 암시하듯 사실적 의미를 관념적으로 해체시킨 겸재만의 예술 세계를 나타낸다.
이상을 정리한 정선 회화의 특징을 살펴보자.
정선은 주로 산수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인물, 화조, 초충 등도 그렸음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작품들과 기록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가 사천 이병연의 초상화를 그렸던 사실은 작품은 전해지지 않지만 기록으로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의 <선객도해도>는 그가 인물화에도 능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밖에도 그는 산수화를 배경으로 하여 고사인물을 그리기도 하고 산수 속에 인물점경을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그는 인물화에 있어서도 능숙한 솜씨를 지녔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그의 화조화를 살펴보면 그의 제자였던 심사정의 화조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과전전계>를 보면 그의 뛰어난 솜씨를 알 수 있다.
정선을 우리 나라 회화사상 초기의 안견과 병칭되어 대가로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산수화이며 그 중에서도 진경산수화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선은 진경산수화 뿐만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화도 훌륭하게 소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조영석의 <겸재정동추애사>를 보면 정선은 옛그림들을 많이 보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였으며, 중국 남종화의 대가들을 연구하였고, 여행을 많이 하였다고 했다. 정선의 남종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인곡유거도>와 <육상묘도>이다.
정선이 미친 영향
정선은 조선 후기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진경산수화풍은 손자인 정황을 비롯하여 정충엽, 강희언, 김연겸, 김유성, 최북,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김석신, 이재관, 조정규 등 중인출신 화가들에게 다소간을 막론하고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을 정선파 또는 겸재파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그의 제자였던 심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 18세기 대표 문인화가였던 강세황, 이윤영, 정수영 등이 그들 나름의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던 것도 정선의 진경산수 화풍의 파급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고 믿어진다.
끝으로 송호 유언술이 박대원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화첩』에 부친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무릇 그림이란 이렇게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겸재의 그림을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문득 그 빼어나고 기이함을 보면서 절규하듯 말하기를 ‘핍진하도다’, ‘신운이 감돈다’라고 하니 이는 그림을 아는 소리다. 그러나 겸재는 모르는 말이다. 박대원은 홀로 필법의 기교를 뛰어넘어 신회가 통하듯 겸재의 마음을 얻고 팔뚝 아래에 두며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니, 박대원은 이른바 그림을 아는 자는 아니지만 그림 보는 법은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필자 강조)
위의 내용은 아래의 참고문헌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출처를 모두 밝히지 못한 것은 게을러서 그러하오니 아래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참고문헌>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안휘준, 한국 회화의 이해, 시공아트, 2004
안휘준, 한국미술사연구, 사회평론, 2012
안휘준, 한국 그림의 전통, 사회평론, 2012
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가 강의3, 눌와, 2013
이동주,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아트, 1996
이동주, 한국회화소사, 범우사, 1996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최완수 외, 진경시대2, 돌베개, 1998
최완수, 겸재정선3, 현암사, 2009
한정희,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 사회평론,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