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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반 SP LP 스크랩 황금심 - 한양(漢陽)은 천리원정(千里遠程) 1938년 1월 (情報 有)|♬─……유성기 복각음반
김형희 추천 0 조회 81 17.05.09 07: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황금심 - 한양(漢陽)은 천리원정(千里遠程) 1938년 1월 (情報 有)|♬─……유성기 복각음반
시나브로 | 조회 170 |추천 0 |2012.09.05. 17:53 http://cafe.daum.net/firebird5108/fbCw/1153 

 

 

 

황금심 - 한양(漢陽)은 천리원정(千里遠程) 1938년 1월

 

조명암 작사 이면상 작곡

 

 

 

한양은 천리원정 가는님을 잡지말고 오다가다

만난사람 맘을주지 말았어야

에헤요 데헤요 가는님 붙들고 울어볼까

손수건 흔들며 웃어볼까

 

 


한양은 천리원정 길이멀다 말을마소 정든사람

그리우면 하룻밤에 만난다네

에헤요 데헤요 가는님 붙들고 울어볼까

손수건 흔들며 웃어볼까

 

 


한양은 머나먼길 걸어가면 발병나네 못갈길을

떠나가면 구진비가 나린다오

에헤요 데헤요 가는님 붙들고 울어볼까

손수건 흔들며 웃어볼까

 

 

 

 

 

 

<漢陽은 千里遠程>은 가수 黃琴心님이 38년 1월에 빅터레코드에서 발표한 新民謠입니다.

 

히트곡 <알뜰한 당신;KJ-1123/黃琴心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趙鳴岩作詞/李冕相作曲의 작품으로,빅터에서 발표한 첫 곡인데,같이 나온 <알뜰한 당신>에 가려 그리 많이 소개된 곡은 아닙니다 

 

<音盤情報 : 雲水衲子님>

 

 

ㆍ해방 전후 인기 ‘꾀꼬리의 여왕’

“울고 왔다 울고 가는/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그 누가 알아주나요/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하십니까요.” 1937년 발표되어 7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애잔한 노랫말과 구슬픈 멜로디로 감동을 주는 가수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이다.

‘외로운 가로등’ ‘울산 큰애기’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황금심(1922~2001)은 이난영·장세정 등과 함께 해방 전후 가요계를 풍미했던 1세대 여가수다.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던 황금심의 당시 인기는 오늘날의 인기가수 아이유나 걸그룹에 대한 열광 그 이상이었다.



 

부산 동래에서 7자매 딸부잣집의 막내로 태어난 황금심의 본명은 금동(金童)이었다. 부친이 아들에 대한 열망이 커 태어나기 전부터 사내아이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돼 가족은 서울(당시 경성부) 청진동으로 이주해 여관을 운영했는데, 마침 이곳에 연예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 중 경성보통학교(지금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던 여관집 딸 황금동의 재주를 눈여겨본 이는 가수 이화자(1917∼49)였다. 처음엔 심심풀이로 노래를 가르쳤지만 비상한 재능을 발견하고는 가수로 대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래수업을 시킨다. 기획사 연습생의 원조라 하겠다.

황금동은 1936년 14세의 나이로 오케이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오디션에서 1등을 차지하며 본격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당시 오케이레코드에는 이난영·장세정 같은 인기가수들이 소속돼 있어 음반 제작도 전속계약도 늦어졌다. 이때 이화자를 통해 황금동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사가 박노홍(필명 이부풍·1914~82)이 노래 연습만 하며 불안해하던 그를 빅터레코드로 스카우트한다. 그리고 작곡가 전수린(1907~84)과 함께 ‘알뜰한 당신’을 만들어 황금심이란 예명으로 음반을 냈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꾀꼬리의 여왕’으로 불린다.

인기가 오르고 만인의 연인이 된 황금심의 마음을 얻은 사내는 ‘타향살이’를 부른 당대 최고의 가수 고복수(1911~72)였다. 1941년 두 사람의 결혼은 국내 최초의 연예인 스타커플로도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은 남편 고복수의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는 등 순탄치 않았다. 1972년 고혈압

합병증으로 고복수가 타계한 후 혼자 5남매를 키웠다. 남편 고복수가 “애들은 노래를 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장남 영준씨는 트로트 가수(히트곡 ‘정에 약한 남자’)로 부친의 뒤를 이었다. 말년까지 사업과 음악활동을 계속했던 황금심은 1996년 파킨슨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 2001년 7월30일 심금을 울리던 인생을 마무리했다.

 

 

/경향신문

 

 

 

 

황금심[ 黃琴心 ]

 

1912 부산 동래~2001. 7. 30 서울.

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황금동(黃金童)이다. 1934년 〈외로운 가로등〉으로 데뷔한 이후 1935년 15세 때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모집에서 1등으로 입상하여 〈왜 못 오시나요〉·〈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작사가 이부풍의 소개로 빅타레코드로 옮긴 뒤 1938년 발표한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 등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인기가수가 되었다. 〈알뜰한 당신〉은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노랫말이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김승호·허장강·배삼룡·최남현 등과 함께 '조선악극단'과 '백조악극단' 등을 통해 광복 전후 가장 인기 있던 공연 장르인 악극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말부터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18세 때 결혼한 남편 고복수와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일본 등지로 공연을 다녔는데, 두 사람은 결혼 직후부터 스타 커플로 큰 화제를 뿌렸다. 한국전쟁 중에는 고복수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시련 속에 1952년 취입한 〈삼다도 소식〉이 크게 히트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 고복수의 히트곡 〈타향살이〉를 영화로 만들었다가 개봉 닷새 만에 4·19혁명이 터져 빚에 허덕이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까지 〈울산 아가씨〉·〈뽕 따러 가세〉·〈사람팔자 몰라요〉·〈한양낭군〉·〈장희빈〉·〈양산도 맘보〉 등 4,000여 곡을 발표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는데, 젊은 시절에는 극장무대에서 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을 고집했을 만큼 목소리가 뛰어나서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또한 민요조의 구성진 창법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으나 1997년 사업에 실패하며 파킨슨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하였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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