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카오 정국 불안, 김대건.최양업 마닐라로 가서 8개월 피난살이
-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식민정부로 부터 언제 추방될지 모를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림은 19세기 마카오 전경.
1) 풍토병에 시달린 선교사와 신학생들
1837년 11월 27일 조선 신학생 가운데 맏형인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선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박해자 다음으로 선교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질병 특히 풍토병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가운데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병사했고,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도 조선 선교지에서 뇌염, 이질 등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선종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파견된 조선 선교사 21명 중 6명이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3명가운데 1명꼴로 병사한 것이다.
김대건도 마카오에 도착한 후 양팔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붓고 소화를 제대로 못 해 고생했다. 얼마나 통증이 심했는지 조선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가 “걱정이다”고 보고서에 쓸 정도였다.
그의 병세는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 생활 때까지 지속됐다. 이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에 6개월여간 함상 생활을 한 이후 그가 아프다는 기록이 없다.
부제 때 조선 입국 후 한양에서 보름간 앓아누운 것 외에는. 아마도 김대건은 함상 생활 동안 군의관으로부터 제대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에는 의학 지식이 깊은 선교사들이 없었다. 더구나 마카오 포르투갈 총독부의 횡포와 감시가 심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들이 병원조차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조차 포르투갈 총독부의 많은 제약으로 마닐라로 가서 요양할 정도였다. 최방제의 죽음에도 이런 외부적 요인이 한몫했을 것이다.
- 김대건과 최양업은 제1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1839년 마카오를 떠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한다. 제1차 아편전쟁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함이 청 함대를 박살내고 있다.
2) 필리핀으로 피신
최방제를 잃은 마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또 한 차례 시련이 닥친다. 바로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으로 인해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 필리핀에서 약 8개월간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1839년은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일어난 해이다. 이 박해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 정하상, 최경환, 유진길, 남이관 등 조선 교회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순교했다.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도 그해 9월 2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 가운데 70위, 124위 한국 순교 복자 가운데 18위가 기해박해 순교자이다.
조선 교회가 박해의 칼날에 풍비박산된 그해 김대건과 최양업도 시련을 겪었다. 청 조정의 아편 밀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영국 상인들은 광동성과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인들과 아편을 밀거래했다. 참다못한 청 황제 도광제가 1839년 3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아편 거래 단속을 하게 했다. 임칙서는 광동성에 부임하자마자 외국인 상관을 봉쇄하고 아편을 몰수해 폐기했다. 이 여파로 광동성과 마카오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요가 일어났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 지도부는 대표부에 거주하고 있던 칼르리와 데플레슈 신부와 김대건ㆍ최양업 조선 신학생 둘, 코친차이나(남부 베트남) 신학생 셋을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시켰다.
이들은 1839년 4월 6일 마닐라로 가는 스페인 배에 탔다. 신부들은 1인당 50피아스터(한화 약 70만 원), 신학생들은 1인당 25피아스터(한화 약 35만 원)의 뱃삯을 치렀다. 배는 다음 날인 7일 저녁에 마카오 항구에서 출항해 11일간의 항해 끝에 19일 아침 마닐라에 도착했다.
3) 왜 마닐라인가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 지도부는 왜 조선과 코친차이나 신학생의 피신지로 필리핀 마닐라를 택했을까? 답은 필리핀이 스페인 선교 보호권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1565년부터 1898년까지 필리핀을 식민 통치했다. 스페인 식민 정부는 필리핀에서 통치의 상당 부분을 수도회와 선교사들, 곧 교회에 맡겼다. 대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중앙 정부의 고위직을 겸직했고, 선교사들이 지방 행정관으로 활동했다. 일반 관료들이 필리핀 근무 기간이 짧아 현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성직자와 선교사들은 필리핀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언어와 문화, 지리 지식을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왕은 교회를 도구화하고 나아가 필리핀 식민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더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고, 선교사들의 세속 권한을 강화했다. 교회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됐고, 본토인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정책은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반교회 운동의 원인이 된다.
필리핀을 통치하던 스페인 식민 정부는 마카오 포르투갈 총독부와 달리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는 1837년 8월 마닐라로 가서 요양하고 있을 때 이미 조선 신학생들을 보다 안정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신학교 장소로 마닐라 인근 롤롬보이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을 물색해 놓았다. 그가 이처럼 발 빠르게 행동한 까닭은 마닐라로 오기 전 성 프란치스코회 이탈리아 선교사 2명이 포르투갈 총독에 의해 마카오에서 추방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여파가 자신들에게도 미칠 것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만약 그럴 경우 안토니오 신부에게 대표부 일을 맡기고, 부대표 바랑탱 신부와 새 선교사들은 광동성으로 옮기며, 새로 도착할 선교사들은 광동성으로 합류하거나 싱가포르에서 머물도록 한다는 대비책을 짰다. 이 대비책에는 조선 신학생들은 마닐라로 보내 롤롬보이에서 수학하도록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르그레즈와 신부가 1837년 8월 19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참조)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마카오에서 추방될 경우 은신 장소로 마닐라가 제일 적절할 것”이라면서 “최상책에 대한 결정을 내려라”고 요구했다.(1837년 8월 21일 자 편지) 그는 같은 날 마카오 극동대표부 부대표 바랑탱 신부에게도 편지를 써 “내가 마닐라로 결정한 이유는, 싱가포르의 우리 집이 너무 작아 만일 다른 선교사들이 온다면 칼르리 신부가 쿠르베지 주교와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르그레즈와 신부는 바랑탱 신부에게 “만약 칼르리 신부가 조선 신학생들과 함께 당신을 따라 광동으로 가겠다고 하면 당신이 불편하지 않으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마카오 극동대표부가 추방될 위기 속에서도 항상 조선 신학생들의 안위와 교육에 염두를 두고 가장 최선책을 모색했다. 그는 칼르리 신부가 1841년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회한 후 조선신학교 교장직을 맡아 직접 김대건과 최양업을 교육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7월 25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