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강 壬午년(서기 1822년, 단기 4155년, 순조 22년)
부친 근암공(최옥) 내외분이 늦도록 자식이 없어 인근 구미산에서 백일 정성을 드리는 중에 어느 노승의 꿈속 계시를 받고 내금강산 비로봉 도솔암으로 옮겨 천일기도에 들어가 청의 동자를 태몽으로 받아 윤신포태 하시다. 다시 외금강 관음봉 용호석상으로 기도처를 옮겨 정성기도중에 십삭이 되매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하고 오색채운과 향기가 방안에 자욱하며 금강산이 진동할 제 천사님 탄강하시다.
때는 임오년 음력 4월 15일(기미) 정오. 경주 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25세손이다. 금강산이 세 번이나 진동하고 3일간이나 울리다. 이 때 천명계시로 5만년 종교선생될 천사님의 이름과 자호를 내려주시다.
(이름은 부석 · 성룡, 관명 상룡, 자는 제우, 별호 수운, 당호 출룡자) |
<수운천사 출룡자 순덕군 선생님 존영> |
부) |
「운무가 자욱하며 내금강 외금강이 두세 번 진동할 때 홀연히 산기 있어 아들애기 탄생하니」(용담유사/몽중노소문답가)
「우리 동방 나라에 도(道) 기운이 길이 있어 나로부터 25세(世)후에 반드시 세상을 개조할 큰 성인이 나올 것이라」(고운선생 유언, 신라외사전) ※연월일은 음력임 |
3세 甲申년(서기 1824) 9월 15일 근암공 내외분이 천사님을 업고 금강산을 출발하여 10월 28일 고향 경주 가정리(현재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 도착하시다. |
부) |
일반 동학 교단에서는 이 날의 귀향일을 천사님의 탄강일로 오해한 채, 천사님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 천사의 제자들은 동학역사 바로세우기를 하여야 한다. |
4세 乙酉년(서기 1825) 유학자이신 부친 근암공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천자문 등을 읽으시고 언어가 분명하여 온공하시니 근암공이 「내 집의 흥망이 이 아이에게 매었다」고 기뻐하시다. |
5세 丙戌년(서기 1826) 오륙세에 얼굴은 관옥이요, 풍채는 당의 문장가 두목지(杜牧之) 같으시다. |
8세 己丑년(서기 1829)에 입학하시어 사서오경을 비롯한 허다한 만권의 시서를 무불통지하여 「열자를 가르치면 백자를 알았다」 하시니 세상사람들이 「생이지지 방불하다」며 성인의 자질됨을 격찬하다. |
10세 辛卯(서기 1831) 이 때를 지내면서 총명은 진나라 사광(師曠)이오, 지혜와 도량이 비범하고 재기가 뛰어나시고 기골이 장대하시다. |
14세 乙未년(서기 1835) 천사님께서 팔도구경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시어 효박한 세상인심을 한탄하시다. 무(武)를 익히시다. |
15세 丙申년(서기 1836) 부친 근암공이 용담정을 새로 단장하여 천사님의 공부처로 정하여 주시다. 이 때부터 학동을 가르치시니 주위로부터 도각(道覺)선생이라고 칭송받으시다. |
16세 丁酉년(서기 1837) 경주군 부내면 충효리 서씨 문중에 장가드시다. 이 해에 부친 근암공께서 돌아가시고, 화재까지 당하여 세상의 무상함을 비관하시다. |
20세 辛丑년(서기 1841) 이 때 직후에 부친 3년상(초토)을 마치고 출가하시다. 십여년을 구도의 길에 오르시다. |
|
<용담정의 옛모습> | |
34세 乙卯년(서기 1855) 용담정에 계실 때, 금강산에 계시다는 나옹대사께서 화현하시어 두 차례 천서(天書)를 내려주시고, 한차례 천어(天語)를 내려주시니, 이로써 오만년 유불선 합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명산대찰을 다니시며 다시 수도에 전념하시다. |
35세 丙辰년(서기 1856) 여름에 양산에 있는 통도사 내원암에 가시어 49일 기도발원중 이틀을 남기시고 하산하시어 숙부상을 치르시다. |
36세 丁巳년(서기 1857) 다시 통도사 적멸궁에 들어가시어 49일 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내려오시다. |
37세 戊午년(서기 1858) 기도에 전념하시느라 세업으로 받은 가산을 처분하시다. 기절한 노파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보이시다. |
38세 己未년(서기 1859) 10월에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할 천명 계시를 받고자 「불출산외(不出山外)」의 네 글자 맹서를 하고 마지막 생사를 건 간구의 기도에 들어가시다. |
39세 庚申년(서기 1860) 새 봄을 맞아 「도기장존사불입, 세간중인부동귀」라는 「입춘시」를 지어 다시 마음을 다짐하고, 하루 세때씩 청수 봉헌하며 기도를 계속하시다. 음력 4월 5일 구미산하 용담정에서는 인류사에 일대사건인 하늘님과의 계시문답이 시작되어 며칠 간 계속 되다.
먼저 궁을영부의 선약을 받으시고, 그 다음으로 21자 주문을 받으시니 바야흐로 5만년 새 세상을 밝힐 무극의 대도인 동학의 출현이요, 후천 천도의 원년으로써 이름하여 「경신득도」인 것이다. 이 해에 「교훈가」「안심가」「용담가」등을 집필하시다. |
40세 辛酉년(서기 1861) 6월부터 본격적인 포덕에 들어가시다. 이를「신유포덕」이라 한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니 일시 남원의 은적암으로 거처를 옮기시다. 「몽중노소문답가」「도수사」등을 집필하시다. 이 때 충무공 사당을 배알하시다. |
41세 壬戌년(서기 1862) 1 월에 「논학문」이 완성되다. 「동학」이라 칭하시고 그 이론을 체계화하시다. 「권학가」「도덕가」등을 집필하시다. 3 월에 경주로 돌아오시어 박대여의 집에 일시 정착하시다. 16명의 접주를 임명하시다. 비로소 동학의 교단조직이 이루어지다. 9월에 윤선달의 무고로 경주영(慶州營)에 잠시 수감되시다. |
42세 癸亥년(서기 1863) 8월에 최시형에게 도통(선천겁운)전수를 밝히시고, 북접법헌(北接法軒)과 해월당(海月堂)이라고 호를 주시다. 10월에 제자들 앞에서 유불선 3교의 대원으로서 동학을 내외에 선포하시다. 「흥비가」집필하시다. 이 즈음 서상학의 무고로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가 30여명의 교졸들을 거느리고 용담정에서 천사님을 체포하니 순순히 응하시어 서울로 압송되시다. |
43세 甲子년(서기 1864) 1월 철종의 승하로 과천에서 다시 대구로 압송되어 대구영(大邱營)에 환수(還囚)되시다. 대구감사 서헌순의 지휘아래 21차례나 혹독한 심문 받으시다.
3월 2일, 고종을 대신하여 조대비가 효수 경중을 엄명하다. 3월 10일 대구 관덕정 참형장에서 참수되기 직전에 뇌성병력과 광풍이 휘몰아치며 형장이 풍비박산이 되다. 이때 하늘님의 조화력으로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고비원주(高飛遠走)로 사지환생(死地還生)하시어 금강산으로 은거하시다. 이후 비로봉 도솔암에서 백일기도 및 천일기도에 들어가시다. 이때부터 수운 최제우의 자호를 감추시고, 이최 출룡자의 자호로 변성명하여 사자(死者) 행세하시다. |
부) |
일부 동학교단에서는 갑자년 대구 장대에서의 참형사건을 순도(殉道)라고 미화하고 있으나, 이 날 수운 천사님께서는 수형되지 않으시고 살아 나오시어 그 후 55년 동안 은둔고행에 들어가심. |
61세 만 60세 회갑 되시는 해이다. 회갑일을 앞두시고 2~3월경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하산하시다.(용운가 1-74) 강원도 동해안 간성, 양양을 거쳐 삼척에 가시다. 이때부터 당호는 이최출룡자(李崔出龍子) 이외에 불명(佛名)으로 담용(潭龍)처사, 혹은 월암선생이라 칭하시다.(1-85) |
연대미상 : 정선을 지나 태백산에 입산하시다(1-86). 정암사 등 태백산 여러 사찰에서 기도하시다. 솔잎과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연명하시고, 산삼 사삼 복령초 등 채약도 하시다. 호랑을 만나시다. 태백산 정상에서 기도할 시에 「경신년(1920)에 삼합대도 창건을 발원」하시다.(용운가 1-108) |
부) |
이 시기 이후로는 친필「용운가」에 기초하여 서술한다. 다만「용운가」가 연월일을 명시하지 않으신 채, 행적순서대로 그냥 기록된 자료인지라, 정확한 연대를 상고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하 인용구는 「용운가」의 권-면을 표기한 것임. |
연대미상 : 소백산 부석사에 가시다. 순흥, 영천을 경유하시어 청주, 공주에 가시다. |
연대미상 :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개를 넘어 논산 은진 관촉사에 가시다. 이 때 「관촉사 미륵님 화관을 벗기시는 기도불사」에 참석하시어 김도성의 안내로 장상궁을 만나시다. 대원군을 모시고 온 장상궁과 모자지의를 맺으시다. |
연대미상 : 계룡산에 가시다. 먼저 신원사에 가시어 기도중에 천명계시를 받으시다. 즉 「출룡자야, 너의 성취할 땅은 동쪽 삼십리 밖에 있다」하시며 그 산은 계룡산 줄기에 있는 금룡산이라 하시다.(2-21)
또 연천봉 연천암에 가시어 주지스님과 대화중에 「별호는 불천에서 내리신 수운이요, 당호는 53불 천인도사께서 내리신 출세공 출룡자라 칭한다」고 답하시다. 이 곳에서 청의동자 7인이 내린 봉서를 받으시다.
신도안에서 이태조의 천도 주춧돌을 보시고 「허망하고 우습도다」고 하시다(2-28). 동학사를 거쳐 다시 관촉사에 가시어 미륵님으로부터 「네 일은 경신년 9월 15일에 자연 나타난다」는 계시를 받으시다. |
연대미상 : 전주 봉서사에 가시어 진묵도사 영각에서 기도하시다. 「진묵도사, 나옹도사, 지공도사, 원효도사, 의상도사, 율목도사, 도천도사, 탈성도사께서 출룡자를 돕겠다」는 계시받으시다.(2-41)
이후 하동 칠불사 아짜방(49일기도)에 가시다. 호랑이를 데리고 칠불사 일주문에 가니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 자빠지다. 「부처님 제자들이 저 산군호랑이를 보고 기절하다니 ......」한탄하시다.(4-6)
칠불사 호령대사가 일체요미를 태워주시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다녀 경주 유적지를 돌아보시다. |
연대미상 : 경주 용담정 본가에 가시다. 구미산 천제 불공터(근암공내외분이 처음 기도한 곳)를 둘러보시고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고 하시다.(4-49) 동래 범어사에 가시어 광인 행세를 하시다. 배를 타고 남해에 가시고, 거제군수를 만나시고, 전남 광양을 거쳐 백운산에 가시다. 보운사 금봉대사를 만나시다.(6-64) |
연대미상 : 광양, 순천을 거쳐 천조암에 들어가 보조국사의 유적을 더듬어 보고 문제의 향나무를 흔들어 보시다.(7-55) 송광사, 보성 대원사,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국사의 제자 백황도사를 친근하시다. 이어 제주도에 가시다. 뱃삯으로 한냥 닷돈 오푼을 주고 덤으로 한냥을 주셨다. 「보고나니 득도로세. 듣고나니 동덕이라」고 제주를 칭찬하시다.(8-49)
제주에서 15개월(주로 이도에 계심) 지내시다가 진도로 나오시다. 진도를 「궁궁을을 구궁지도가 여기로세」라고 하시다.(9-1).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 가시어 천만 뜻밖에 낭덕(나옹)도사, 도선국사 양위 선생님을 친근하시다. 월출산을 반(半)금강산, 소금강이라 하시고, 도갑사에 사십이수(手) 관세음보살님이 계신 곳이라고 하시다. 화순, 무등산, 광주에 가시다. |
부) |
현재 도갑사에는 관세음보살 32응신도(사본)가 봉괘되어 있음 |
광주 관음사 관음토굴에서 49일 기도하시다.(10-16). 곡성쪽으로 가시다가 어느 동학 교인의 아들을 만나니, 그 아버지가 유언하시기를 「아무 때라도 선생님이 이리로 출세할 것이니 부디부디 명심불망하라」하셨다며 천사님을 붙들자, 오히려 동명이인이라며 뿌리치고 나오시다.(10-25)
귀암사에서 49일 기도하시다. 순창, 장성에 가시다. 이어서 내장산 내장사에 가시어 주장대사와 대화중에 그가 갑자 년(1864년)에서 2갑이 지났다는(서기 1884년) 이야기를 하니, 허허 웃으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다(10-53). 이것으로 보아 이때가 갑자년에서 갑술(1874), 갑신(1884)의 이갑이 지난 직후가 아닌가 추측된다. |
63세 甲申년(서기 1884) 이후의 천사님 노정이다. 조정에서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내장사에서 나오시어 정읍에 가시다. 정읍 사또(김병수)를 만나, 사또의 부탁으로 내장사 원덕암에서 기도 올리다(10-61). 장성, 나주, 영산강으로 가시다.
나주목사 박귀동을 만나 근 1년 머무시다. 박귀동에게 「병술년(1886)이 당도하니 무섭도다(11-4)고 하시다. 오래지 않아 박귀동이 괴질로 죽다. |
부) |
최해월당 주문을 일시 바꾸다. 「봉사상제 일편심 조화정 만사지」 |
65세 丙戌년(서기 1886) 박사또의 장사를 치르시고 무안, 목포에 들르시다. 법청사에 들어가시며 「거리마다 송장일세」하시며 한탄하시다(11-6). 영광 불갑사에 가시다. 읍내에서 죽어 가는 산모를 살리시다.
영광 법성포 구심에서 어느 노모와 부인의 상주노릇을 하며 삼사 년을 지내시다. 무장을 지나 선운사에, 변산 내소사, 실상사, 개암사에 가시다. 실상사 주장대사가 「수운선생이 갱생하셨다」고 하더라.(11-37) |
부) |
4월에 최해월당이 제자들에게 「금년에는 악질이 크게 유행하리니 도인들은 일층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특히 청결을 주로 하라」고 지시함. |
70세 辛卯년(서기 1891) 이 때를 전후하여 전북 부안읍에 가시다. 또 적포 채석장, 만경 뜰에 가신 후 금산사에 가시어 「팔도강산에 이렇게 엄숙하고 거룩하신 부처님은 처음 보았다」고 하시다(12-14).
전주, 옥구, 함열, 임피를 지나 충청도로 들어가려고 배를 타는데 누가 뒤에서 부르거늘, 배에서 내리어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데, 가던 배는 회오리 바람에 뒤집히는 참변을 목격하다.(12-22). 임천, 한산, 서천을 거쳐 대조사에 들어가 미륵님 전에 배례하고 나오시다가 봉욕을 당하시다. 홍산, 성주산, 무량사에 가시다. 무량사 법당에서 기도중에 「술해자 삼년에 선출되고, 축인묘에 금병출한다」는 계시 받으시다(12-38). |
72세 癸巳년(서기 1893) 2월 서울 광화문에서 수천 명이 동학교조 수운천사 신원을 위해 3일3야 복합상소 올리다. |
73세 甲午년(서기 1894) 전국에서 동학혁명 발발하다. |
연대미상 : 보령, 홍주목 오소산, 당진, 아산, 평택, 안성, 용주사를 거쳐 한양근교에 이르시다. 관악산 염불암에 근 6~7년 왕래하시다. 또 장상궁 본가에서 근 3~4년 왕래하시다. |
연대미상 :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다시 금강산에 입산하시다.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도솔암, 해금강에 가시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시어 「넓기가 80리 분명하다. 어허 세상 천지 보던 중에 제일일세」하고 감탄하시다. 이 때 큰비가 내리다.(17-29). 또 백두산 천지는 99룡이 노는 용초못이라고 하시다.(17-31). 묘향산과 구월산에 가시다. |
부) |
1898년 6월 2일, 최해월당께서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교수형 당함. |
연대미상 : 충주에 내려오시다. 상주, 공수원 장터, 부암동, 김천에 가시다. 김천에서 선약을 탄복시켜 병인을 낳게 하시다.(21-22).
왜관을 거쳐 일행과 함께 합천 가야산에 백일기도 들어가시다. 인동, 대구 계명에 가시다. 대구 계명에서 어느 부인이 선몽에 출룡자를 만나라고 하였다면서 자기 딸 치병을 원하는지라, 처음에 거절타가 선약으로 치료해 주시고 오히려 봉욕을 당하시다.
고령, 성주에 가시다. 어느 사람과 함께 가실 때 「천황주, 칠통주, 팔통주, 천수 주력」을 구송하시다.(21-64). 사람 흉내내는 여우귀신을 주력으로 물리치시다. |
81세 壬寅년(서기 1902) 춘 정월에 전주에 가니 마침 전주장날인데, 전주감사 조한국이 동학군 몇 사람을 국문 하는지라, 마음이 실적하여 여산으로 가시다.(22-16).
논산 관촉사, 공주, 부여 백마강, 고란사를 다녀 마침내 뜻깊은 청양에 당도하시다. 「몇해 아니 되어 악도한 세상사를 보리라」고 말씀하시다.(22-34). |
84세 乙巳년(서기 1905) 일제에 의해 강제 조약이 체결되다. |
86세 丁未년(서기 1907) 6월에 고종황제가 천사님과 최해월당에게 신원대사 내리시다. |
87세 戊申년(서기 1908) 박성방과 함께 대천 성주산 장군봉에서 2년 동안 은거 기도하시다. |
89세 庚戌년(서기 1910) 일제에게 경술국치 당하다. |
91세 壬子년(서기 1912) 3월 3일 청양군 청양면 적누리 칠룡산 안골에 삼칸 초옥의 「도성암」을 지으시어, 여섯 불상을 봉안하시고, 「운수중간루 사해월인(雲水中間樓四海月印)」이라고 현판하시다(22-48).
이로써 갑자년 사지에서 환생하시어 고비원주한 이래 전국방방곡곡의 주유와 감찰을 마감하시고 비로소 정착하시다. 이 때 노성호가 수고하였으며 이후로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천사님을 찾아와 새 역사가 전개되다. 이곳 칠룡산에서 9년 고행하시다. |
98세 己未년(서기 1919)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다. |
99세 庚申년(서기 1920) 7월에 청양에서 가까운 예산군 광시면에 사는 박성호 형제가 천사님께 제자 되기를 간청하다. 9월 15일, 박성호, 박성현, 이공필, 안교승, 이종하 등 5인이 천사님을 「수운 천사주」로 모시고, 도성암을 떠나 예산(광시면 서초정리)으로 출발하시니, 수운 천사님께서 경신년 득도에 이어 60년만에 재위출세(再爲出世)하시다. 이 때 처음으로 박성호에게 범호(犯虎)의 도호를 내리시다. |
100세 (천황씨 강생 100년) 辛酉년(서기 1921) 정월 설날에 칼춤사건으로 예산 광시면 주재소에 제자 4~5인과 함께 구류 당하시다. 2월 예산에 「출운당」건축하시고, 후천의 「천황씨」로 자거하시다. 이후부터 「천황씨」라는 존호와 「천황씨 강생」이라는 년호를 3년 동안 사용하시다. 정첩을 발급하시다. 어느 날 시천교의 대표 구암 김연국을 서울 그의 교당에서 만나시다. 6월에 금계산에서 36일 기도를 드리고 예법(禮法)을 마련하시다. 8월에 온양경찰서에 박성호와 함께 29일 구류 당하시다. |
|
|
<제자들에게 발급한 천황씨 첩지> |
101세 壬戌년(서기 1922) 호첩을 발급하시다. 이 때 교명을 천황교로 내정하시다. 정월에 천도교 대표 의암 손병희를 치료해 주라는 천명계시에 따라 서울 봉황대에서 의암을 진찰하시며 「우습고도 허망하다」고 애통해 하시다. |
102세 癸亥년(서기 1923) 정월에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순회포덕하시니 그 수가 수천에 달하다. 4월 15일, 서울(경성부) 계동에서 경향 각지에서 모인 2백여 명의 제자들과 같이 현도식을 봉행하시다. 10월 15일 경성부 임정에서 역사적인 수운교 개교식을 거행하시고 교의 본부로 삼다. 이로써 1863년(계해)에 동학을 선포하신 지 꼭 60년만에 동학을 중창하시어 후천 오만년 새 세상을 열어갈 주체적인 동학교단인 수운교를 창립하시다. |
103세 (수운강생 103년) 甲子년(서기 1924) 도위(道位)를 발급하시다. 논산 관촉사를 방문하시어 미륵전에 치성 드리시다. 4월 15일 기념식을 봉행하시다. |
104세 乙丑년(서기 1925) 3월부터 황해도 해주를 시작으로 서북지방에 포덕하시다. |
105세 丙寅년(서기 1926) 4월 15일 기념식을 봉행하시고, 5월 3일 평안도 포덕에 오르시다. 이에는 박범호, 안항호 등이 배행하다. 주로 유불선 합일 대도와 성경신, 포덕광제를 설법하시다. |
106세 丁卯년(서기 1927) 3월 27일 통유문을 발표하시다. 4월 15일 기념식 봉행하시다. |
107세 戊辰년(서기 1928) 3월 15일 금병산하 현 위치에 도솔천궁 상량하시다. 그 외 4대문과 종각을 착공하시다. 10월 15일 기념식 거행하신 후 천단 건축에 관해 협의하시다. |
108세 己巳년(서기 1929) 4월 15일 도솔천궁을 비롯한 4대문, 봉령각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어 낙성식을 겸한 탄신기념식 봉행하시다. 이 날 전국에서 3~4만 명의 신도들이 운집하였으며 대성황을 이루다. 훈유문을 발표하시다. 가을부터 친필 자서전 「용운가」를 순 한글로 집필 시작하시다(4년만에 완성하심). |
109세 庚午년(서기 1930) 봄, 이근화에게 「삼천대천세계도」제작을 명하시다.(후에 이를 법회당에 안치) |
부) |
만성당(萬聖堂 : 만국의 성인ㆍ도통군자 30만을 모실 곳) 건립기지를 지면(1500평) 정리하여 장차 건축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하였으며, 종각도 완공하다. 제주에 첫 분관설치(초대감사 박대호), 후에 대정지부라 고쳤다가 오늘의 안덕지부로 됨. |
110세 辛未년(서기 1931) 4월 15일, 10월 15일 기념식 봉행하시다. |
부) |
9월 29일 안씨 사모님 환원하시다. 제주에 한동지부 설립(초대지부장 고덕화) |
111세 壬申년(서기 1932) 7월 박성호, 장해진, 김찬호등 임원을 대동하여 서울에서 삼불상을 모셔와 장실에 임시 봉안하다. 이로부터 유불선 합일 이념에 따라 부처님을 모시고 「불천묘경」의 예참으로 의식을 봉행하시다. |
부) |
전국에 분관 및 선교소가 무려 60여개소(신도 약 10만여명)에 달하다. 이때 「훈사」를 내신 것 같다. 교제(敎制)를 제정하여 수운교 본관을 「본부」(本部)로 고침. 제주에 삼양ㆍ한림지부 설치함. |
112세 癸酉년(서기 1933) 1월 15일 훈화문을 내시다. 「自此以後(자차이후)는 生長(생장)의 期(기)를 脫(탈)하여 成實(성실)의 秋(추)에 至(지)하다」고 선언하시다. 또 10월 15일 훈유문을 통해 「내년 봄부터 오동나무 3그루, 소나무 10그루씩 심으라」고 지시하시다. |
부) |
2월 조병휘 「동도전서」 강서집필하다. 5월에 금강탑, 미타탑, 무량수탑 등 목조 6층의 3탑을 조성하여 천단에 안치함. 제주에 조천지부 설치함. |
113세 甲戌년(서기 1934) 4월 16일 첫 「합동위령제」를 봉행하시다. 8월에 이기서로 하여금 「삼불상」을 조성케하여 천단에 봉안하시다. 10월 15일 「불천묘법전수」를 친필하시어 「무주고혼의 해원과 세계의 왕생극락을 위한 해원」을 선포하시다. 장엄염불법을 가르치시다. |
부) |
성교인(誠敎人)의 5대조까지 선망 부모영위를 등재한 영세물체의 영우총보(靈友叢譜)를 편철하여 현재 도솔천에 봉안중이다. 9월에 봉령각 앞 광장에 선성당(先聖堂) 건립기지를 지정하여 푯말을 세움. |
114세 乙亥년(서기 1935) 4월 15일, 10월 15일 기념식 봉행하시다. |
부) |
9월 일본 오사까에서 주조한 범종을 구입하여 종각에 현종하여 매일 삼시로 타종하기 시작함.(1942. 12. 이 범종은 일제에 공출당함) |
115세 丙子년(서기 1936) 4월 15일 법회당을 준공하시다. 5월 17일 저녁 불시에 두목 36인에게 게문(偈文)전수를 하시고 당호를 주시다. 이남곡화사에게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탱화」를 그리도록 명하시다. |
부) |
봄에 금강산 유점사의 노승 이남곡화사가 천사님을 찾아뵙고 곧바로 「천수천안 관재보살 탱화」를 완성하다. 4월 15일 천사님의 엄명에 따라 법회당을 준공하고 천단의 삼불상을 이운하여 봉안하다. 6월에 일제의 강압으로 「미타교」로 교명 변경됨. |
116세 丁丑년(서기 1937) 3월 27일 일제의 강압에 따라 일본 교또(京都)를 다녀오시다(제자 12인이 배행하였음). 5월 15일 아미타불 입불식 거행하시고, 11월 제주도에 행차하시어 5개 지부에서 봉불식 거행하시다. |
|
<1937. 5. 입불식 광경> |
부) |
5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수운교 폐지 당하고, 교명을 「흥룡사(興龍寺)」로 개칭 당함. 5월 15일 일본에서 모셔온(4월) 아미타불 입불식을 거행하니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룸. 이는 백제시대에 일본에 건너간 불교가 다시 조국에 돌아온 것과 같고, 또 아기부처님이 1천여년간 성장한 다음 조국에 돌아와 결실을 맺으려는 것과 같은 이치임. 11월 제주 5개 지부 봉불식(삼양ㆍ조천ㆍ한동ㆍ안덕ㆍ한림지부) 봉행함. |
117세 戊寅년(서기 1938) 9월초 안명석, 서병석 양인의 수운교 의식 복원과 관련하여 대전 경찰서에 5일간 소환 당하여 심문 받고 나오시다. 어느 날 제자들에게 「삼대원의 성취를 위하여 성경신으로 사인여천하며, 오관오계를 성심으로 실천하고, 일심동령으로 기도공부하여 상재 성공하라」는 설법을 하시다.
그 후 이남곡화사가 서거했다는 부고를 들으시고 「나도 이제 가야지」라 하시고, 열호자 안중록에게 용호당을 가리키시며 「이제 그 이름을 출룡당으로 해라」고 하셨지만,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9월 18일 가을 아침, 목욕재계하시고 의복을 갈아입으시고 평소와 같이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조용히 열반하시니, 이 때 춘추 어언 117세이시다. 일제의 강압으로 화장하여 금병산에 모시다. 평소에 사람의 천수(天壽)가 120살이라 하시며, 제자들에게 삶의 전형을 보여주시고 가시다.
「대나무 울타리가 성기니 가을 달이 나가며 비치도다」 <「동경대전」 영소> |
※출전 『수운교 진리』(수운교 출판부, 1999년 발행) |
|
첫댓글 아주 좋은 글입니다. 용운가에 장상궁이 나오는데, 이 분은 의친왕의 생모이며 민비의 박해를 받고 돌아 사십니다.
용운가에 '담배밭에 조도령' 꽤꼴룡꽤꼴룡- 많이 나오는 글귀입니다. 컴퓨터 검색창에서 담배밭에 조도령을 검색하면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