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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간도(2026.07.03)
<잃어버린 섬 이야기>
제목 : 갇힌 섬, 삼간도
주종섭
한반도 남녘 남해안의 중앙지점에 자리잡은 여수반도가 만들어낸 광양만 서남부에 삼간도 섬들이 있다. 여수반도 북으로 율촌면 장도, 송도, 소늑도, 중늑도, 대늑도 남쪽 해상을 지키고 신풍리 애양원과 화치리 연성 그리고 중흥리 당산 딴목섬과 용성 수항도를 건너보고 있다. 소라면 세동(덕양리)까지 밀려드는 바닷물이 삼간도 바다를 휘몰아 감싸고 흘렀다.
1925년 식민지 일제의 강제점령 때 바다를 가로막아 삼일면 화치리 연성과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을 잇는 십리나 되는 방조제가 만들어졌다. 십리방천이다. 십리방천 방조제안에 만들어진 들판을 남해촌이라 불렀다. 남해촌 들판보다 앞서 화치리 첨산 남쪽과 월하리 갈밭 사이를 관통해 중방 인근까지 흐르던 좁고 긴 만입 해안을 매립해 화치들판을 만들었다. 바닷물을 가로막아 농토를 확보하는 간척사업이었다.
그리고, 광양만은 1967년 호남정유 착공, 1974년 여천공업단지 계획이 세워지고 이후 1981년 광양제철공단, 1992년 율촌산업단지, 1997년 광양항 1단계 콘테이너부두가 세워졌다. 바다를 막고 매립해 공장용지를 확보하고, 항만의 활용을 위해 바다 바닥의 흙을 준설해 모으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지도는 삼간도 섬들과 인근 바다의 1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지내온 이력이다. 아래 지도 세 장이 그 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1918년, 2000년, 2026년 지도이다. 이 글은 삼간도 인근 지리적 변화와 우리 사회공동체가 겪었던 이야기를 기록한다.
<지도1> 1918년 여수 광양만 서남부 삼간도 일대
<지도2> 2000년 광양만 서남부 삼간도 일대
<지도3> 2026년 광양만 서남부 삼간도 일대
○ 해 저문 삼간도에 황혼이 지면
해 저문 (삼간도)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선창가에 슬피우는 아낙네야
바다가 생명같은 나의 일평생
썩은 갯펄 죽은바다 우리 어민 어떡해
아-아- 억울해서 눈물 흘리는
(삼간도) 아낙네
섬이지만 뱃길이 멈춰선 곳, 주변을 울타리처럼 방조제로 둘러쳐지고 매립되고 있는 섬이 있다.
삼간도는 광양항 3단계 준설토 투기장으로 칸막이 제방 공사가 마무리돼 제방안 매립공사가 진행중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555-1번지 일대 70,000㎡ 삼간도(參干島), 중흥동 산 212번지 26,182㎡ 이간도(貳干島. 밭섬), 중흥동 산213번지 2,936㎡ 일간도(壹干島. 끝섬) 세 개의 섬을 합쳐 삼간도 또는 살갱이라고 불렀다.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던 삼간도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조금 떨어진 장도와 송도의 전투는 삼간도 앞바다와 소라면 세동(덕양)까지 전장의 기억을 남겼다. 세동에 있는 역의암은 임진왜란 중 이 곳이 전장터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최후전쟁터 노량해전의 바다 가운데 삼간도 섬들이 있었다.
삼간도에 살았던 어른들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성생원(成生院:신풍) 반도로 상륙하려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왜군들을 삼간도 세 개의 섬에 매복해 있던 우리 수군들이 용감히 싸워 격퇴시켜 순천 왜성으로 도망가게 했다고 한다. 이같은 전설과 세 개 섬이 방패 역할을 해 삼간(參干)이라 불렀고 소리나는 대로 발음하다보니 살갱이가 되었다고 했다. 여천시사에 의하면 학계에서는 ‘살’은 산(山)이나 실(谷)을 뜻하는 것으로 산(山)이 살로 실이 살로 변한 것이며, ‘갱이’는 강(江)이나 강변을 말하는 방언으로 ‘강(江)+이’가 ‘갱이’로 된 것이다. 따라서 살갱이는 강변에 있는 산이나 골에서 연유된 말이며, 삼간도는 산이나 골이 세 개이므로 삼(參)갱이는 간(干)으로 한자로 쓴 것이다고 한다.
소양강처녀 가사를 바꾸어 부른 ‘해저문 삼간도에. . . . .’는 1996년 11월 서남공업단지관리공단과 한국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에서 250여명의 삼간도 주민들이 3일간 농성을 하면서 불렀던 ‘광양만 아낙네’다. 1980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었던 민주화운동에서 투쟁가로 불렀던 노래중에는 당시 익숙했던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바꾸어 부르는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가 있었다. 노래가사에 담긴 삼간도 사람들의 슬픈 외침은 오랫동안 자연이었고 수백년간 조상대대로 지켜온 삶의 터진이었던 갯펄의 죽음으로 막막해진 삶을 담고 있다.
당시 주민들은 여천공단의 해양오염과 각종 매립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첫째, 22년전 어업권 말소에 따른 피해 전액 보상 및 어업권 복구(원인자는 여천공단) 둘째, 여천공단 가동이후부터 지금까지 삼간도 근해에서 전반적으로 발생한 생태계 변화에 따른 어업 피해 및 어패류 수확감소 전액보상 셋째, 여천공단 부지 매립과 우순도 목 매립에 따른 양식장 황폐화 전액 보상 넷째, 여천공단 폐쇄 다섯째, 자연상태의 광양만으로 만들어줄 것을 내걸었다.
1996년 11월 4일 삼간도 주민 250여명(62가구, 350여명)은 아침 8시 선착장에 집결, 마을 큰 선착장에서 폐사된 바지락 껍질 20kg들이 2,000여 망을 배로 옮겨 오전 10시 애양원에서 차량으로 이동해 중흥동 서남공업단지관리공단에서 오전 11시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바지락폐사 등 피해에 대한 경과보고에 이은 성명서 발표, 요구사항 낭독으로 오전 집회를 마무리했다. 점심식사를 집회현장에서 하고 오후 2시부터 투쟁가요 부르기, 주민토론회를 열고 오후 5시 집회를 마무리하고 현장에서 취침에 들어갔다. 11월 5일 서남공업단지관리공단 집회장에서 오전 8시부터 아침 식사를 하고 이틀째 농성을 진행했다. 농악놀이, 경과보고, 성명서 발표, 주민토론을 마치고 농성장에서 이들째 취침에 들어갔다.
농성 3일째인 11월 6일 오전 9시 참가자 전원이 쌍봉동 학동 한국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입구로 이동해 오전 11시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던중 오전 9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주민대표들과 여천시장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주민들은 모든 어패류가 죽어서 할 일이 없으므로 공단 일용잡부라도 일할 수 있도록 생계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율촌 제2공단 승인이 언제될지도 의문인데다 여천공단 확장단지에 삼간도가 포함되지 않아 이후로는 살길이 막막하다며 이주대책을 촉구했다.
주민들의 요구에 대해 여천시장은 “삼간도 주민들의 피해는 바다 오염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다.”라며 “율촌 제2공단이 승인되면 공단 주변마을 가운데 삼간도가 가장 먼저 이주할 것으로 생각됐으나 율촌 제2공단 지정승인이 늦어지고 있는 만큼 공단 주변마을 이주대책에 삼간도를 포함 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한국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앞에서 주민들은 농성을 하면서 투쟁구호와 투쟁가를 부르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오후 4시 부터는 여천시장의 주선으로 주민대표(3인), 수자원공사, 여수시장, 시의원, 수협조합장 등 7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간도 어패류 집단폐사에 따른 실무대책 위원회’ 구성을 합의했다. 실무대책협의회는 주민대표(3명), 시관계공무원(3명), 수협(2명), 수자원공사(1명), 서남공업단지관리공단(1명) 등 10명으로 구성했다.
이 자리에서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고정석 사무소장은 “삼간도는 율촌 제2공단 승인이 나면 전라남도에서 직접보상, 이주시킬 계획이며 여천공단확장 단지 조성으로 인한 미편입 지역에 대한 간접피해 보상을 하기 위해 용역중이므로 주민의 요구 조건을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했다.
당일 영산강환경관리청, 수자원공사, 여천시장, 여수해양경찰서로부터 진정서 등 민원을 제출하고 주민들은 농성을 해제하고 귀가했다.
주민들은 그동안에 제출한 탄원서, 요구서, 민원서류에 담은 내용을 이때 발표한 성명서에 담았다.
성명서에서 주민들은 광양만 남서부에 위치한 삶의 터전인 삼간도는 여천공업단지로부터 2km정도 떨어진 마을로 바지락 주업으로 하며 부업으로 고막, 굴, 고기 등을 잡는 오직 바다와 갯펄을 삶의 터전 삼아 조상대대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광양만이 여천공단, 광양제철공단, 율촌공단, 광양항 콘테이너부두 등이 자리잡으면서 바다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했다. 공단과 시설물들은 바다를 매립해 세운 것으로 바닷물의 흐름 즉 조류의 흐름이 원할하지 못하고 유속이 느려져 광양만 바다가 황폐화 됐다고 했다. 이렇게 바다의 흐름이 막히고 있는 가운데 여천공단, 광양제철공단의 산업폐수가 1일 10만톤 넘게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광양만을 죽음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고 분노했다.
실제 삼간도 앞바다 바지락 양식장 100ha 중 60ha가 갯펄이 쌓여 썩어들어가는 상태이고 매년 폐사율이 증가하여 급기야 바지락 80%가 폐사되었으며 정상적인 상태에서 6개월이면 성장하던 조개들이 2년이 넘도록 성장하지 않아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2~3년 후면 여천공단 확장단지가 마을 앞 80미터까지 매립하게 되는데 간접 피해지역으로 묶여서 생존권 자체를 말살하고 있다며 주민들의 생계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촉구했다.
1996년 8월 13일 여천시 공단주변 마을인 묘도, 삼간도 주민 5백 여 명이 오전 11시 묘도초등학교에 집결 ‘묘도·삼간도 주민생존권 쟁취 및 이주촉구 결의대회’를 열고 여천공단의 오염 피해와 관련, 주민 이주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중 300명은 오전 11시 40분부터 묘도 선착장에서 어선 80여척을 나눠 타고 묘도 창촌->묘도 온동->묘도 도독->묘도 광양포->삼간도->묘도 창촌으로 이어지는 10여km 거리의 해상시위를 2시간 이상 벌였다.
해상시위 투쟁 때도 주민들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묘도, 삼간도 주민들은 오직 바다만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수 백년 전부터 이곳을 지켜 왔으나 현재 광양만의 상황은 여천공단, 광양제철, 율촌 제1공단, 광양컨테이너 부두건설, 각종 중금속 오염으로 죽음의 바다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즉각적인 주민 이주, 오염으로 인한 농수산물의 시장거래 중지에 따른 생계대책 수립, 음용수의 중금속 오염에 따른 음용수 식수대책 수립 등을 요구 했다.
○ 어업권 박탈에 따른 생계피해와 전과자 피해
“가오리 코에 돛 단다”는 말이있다. 여수지역에서 사용되는 이 말은 ‘순풍에 돛 단다’는 말이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이 쉽게 잘 풀린다는 의미이다. 삼간도야 말로 가오리 코에 돛을 단 듯 해상과 어로 활동이 자유롭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여천공단 조성과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리게 된다.
1967년 3월 6일 여수어업협동조합과 삼간도 사이에 체결된 어업권이 1974년 4월 28일자로 소멸 되었다. 당시 건설부 고시 제92호에 의해 삼간도가 포함된 여천군 삼일면 일대가 산업기지 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어업권을 박탈당했다. 공업화의 물결,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의 목표가 주민들에게는 생존권 박탈이 되었다. 삼간도 사람들은 신규면허 건의를 2번 했고, 어업권의 조속기간 허가신청 2 차례, 면담 등을 통해 어업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삼간도 사람들에게 1974년 여천공단이 조성되면서 일방적으로 어업권이 말소되고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생업의 1차수단인 고기를 잡고 조개를 채취하는 것이 불법이라 하여 수 많은 벌금과 전과자를 양성하는 모순과 함께 이 땅의 국민으로써 정당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개발과 경제성장이 가져온 또 다른 피해를 삼간도 주민들은 당해야 했다.
마을별로 자연스럽게 전통적으로 행사해 왔던 공동체의 권리가 어느때부터 수산업법 등에 의해 법률적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삼간도 주민들이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어업권 권리의 박탈은 주민들에게 생계터전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업권 분쟁은 삼간도 뿐만 아니라 해안지역의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실제 삼간도 주민 강상숙(姜尙淑)씨와 여수어업협동조합간 1967년 3월 6일 맺은 삼간도의 어업권행사 계약서와 어장도에 어업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어업권은 공동어업권 행사규정에 따라 확보된 것이다. 내용인즉 전남 제3종 공동어업면허 제21호의 어장구역에 행사번호 제29호로 지정된 곳에 강상숙씨는 1망 1통을 행사한다. 행사기간은 계약일로부터 만3년이고, 행사료는 매년 부과 징수한다. 강상숙씨는 어업으로 생산하는 어획물 및 제품을 여수어업협동조합에 위탁 판매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어장도에는 어업의 종류를 1종 공동어업으로 표기하고 수면의 조업위치를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중흥리 삼간도 지선으로 삼고 기점①은 삼간도 모둥이 끝 기점②는 삼간도 농바위 끝 기점③은 삼간도 젓등 끝을 삼아 어업 수면의 구역을 연결했다.
○ 대풍 ‘주디’, 공단폐수방류로 바지락 떼죽음
1989년 7월 27일 0시를 시작으로 11호 태풍 주디는 일본 규슈를 거친 뒤 서북으로 회전 부산과 남해안 일대와 호남을 관통해 서해안으로 빠져나가고 남부지역을 강타하였다. 당시 300mm가 넘는 폭우로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남겼다.
이때 삼간도를 비롯한 광양만 어장의 피해가 컸다. 광양만의 삼간도 바지락이 떼죽음을 당했다.
삼간도 주민들은 7월 28일 “태풍 주디가 이 지역을 통과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자 여천공단 공장에서는 ‘처리하기 귀찮은’ 폐수를 무단 방류했다.”고 했다. 방류된 검붉은 폐수는 조류를 타고 여수, 여천, 광양, 동광양, 승주군 등 6개 시군 3천 1백 15가구의 패류 양식장 6천89ha(81개소)를 뒤덮었다. 폐수가 휩쓴 양식장의 바지락,새고막,참고막,굴,새조개,피조개 등 모든 패류가 전멸했다. 피해액은 99억 7천 6백 여 만원이었다.
당시 여천시 공해대책위원회 김용현 위원장(57)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호남정유 바로 앞에 있는 적량동의 해변에 붉고 칙칙한 폐수가 넓은 띠를 이뤄 흐르고 있었으며 다음날부터 이 일대 패류가 썩기 시작, 두 달에 걸쳐 광양만 일대 패류가 모두 폐사했다.”고 피해상황을 말했다.
삼간도 주민들은 1989년 8월 24일부터 27일까지 여천시청 앞 잔디구장에 모여 피해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4일간에 걸친 집단 농성을 진행했다. 52가구 2백 여 명의 주민들은 여천시청앞에 몰려가 ’섬주변 50여ha의 양식장에 양식중인 바지락이 떼죽음을 당한 것은 여천공단내 공장들의 폐수방류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 했다. 주민들은 50여억원 피해보상, 이주대책, 중고생 학생학비감면, 농·수협 대출이자감면 및 상환연기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나 공단과 여천시는 폭우로 인해 염도가 낮아진 것이 바지락 집단 폐사의 원인이라고 했다. 바지락 집단폐사 원인을 둘러싸고 양측의 주장이 상반됐다. 1989년 7월말 집중폭우 직후 몰사한 광양만 바지락 양식장의 피해 원인을 놓고 해당 어민과 여천시청이 뜨거운 논쟁을 벌어졌다. 전문기관의 조사 결과가 밝혀지지 않아 어느쪽이라고 성급한 단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광양만 일대에 들어선 각종 공장들의 폐수방출, 광양제철소 건설에 따른 대규모 매립으로 인한 조류소통의 둔화 등 지형적 변화, 인근의 가축 사육과 다른 폐기물의 방출 등 다각적인 원인으로 제시됐었다.
주민들과 공단, 여천시장이 바지락 집단폐사의 원인을 두고 다른 소리가 나올 때 애양원에 사는 이성실(李成實, 49)는 ”축사주변에는 바다로 흐르는 물에 포함된 사료 등을 먹으려는 고기들이 떼지어 몰려와 투망을 던지면 숭어 농어 등이 많이 잡혔는데 축산폐수를 오염원인으로 꼽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어장이 황폐화돼 몇 년간은 전혀 어업을 하지 못할 실정인데 89년도 피해만을 보상해 주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한 달 전 7월 22일 이만의 여천시장 등 시관계자들의 삼간도를 방문했을때 공단내 L. K. 공장 등에서 뻘건 폐수가 바다로 방류되는 현장이 확인되는 등 그 동안 큰 비가 온 후에 어김없이 어패류의 피해가 따랐다며 여천공단에서 폐수를 무단방류해서 바지락이 죽었다고 했었다.
한 주민은 ”ha당 1천 7백 만 원 씩 든 종패값 외에 개펄의 자생력을 다지기 위해 ha당 2천-3천㎥씩 뿌린 모래비용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며 ”여천공단이 들어서기 이전인 1960년대에는 피조개 새고막 등 안되는 것이 없었던 마을 양식장이 폐허가 된것은 공단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고 말했었다.
주민들의 주장은 삼간도 주변양식장 50여ha에 폐사 현상이 나타난 것은 지난달(1989년 7월) 하순 무렵부터 죽어가기 시작했고 그 이전 5월 호우때도 부분적인 폐사 현상이 나타났으나 지난 폭우 직후 성패(成貝)가 돼가던 바지락이 죽기 시작하더니 8월 초순에 몰사했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번 폐사로 자연산 어패류를 비롯, 양식장 바지락 피해가 ha당 1억씩, 모두 51억 7천 만원에 이른다.“며 여천공단 등에 보상을 요구했다.
8월25일 농성중에 경찰과 충돌, 주민 경찰관 등 10 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험악한 상황이었다. 경찰들은 주민들만이 아닌 불순 세력이 개입했을 지도 모른다는 상투적인 언사도 서슴치 않았다. 모두가 삼간도 주민들로만 구성된 시위였다. 주민대표 17명은 27일 오후에 이만의 여천시장과 면담을 했다. 면담에서 전문기관에 피해 원인 조사를 의뢰, 결과에 따라 비상책을 강구하고 나머지 요구사항도 관계기관과 협의,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등을 합의하고 4일 만에 농성을 풀고 귀가 했다.
◯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
실제 국립수산진흥원 여수수산연구소가 1989년 6월 광양만 해수를 분석한 결과 오염의 심각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광양만해수의 화학적산소요구량(COD)은 평균 2.3ppm, 부유물질은 17.5mg/ℓ로 적조유발농도를 초과한 것으로 분석됐다. 또 삼간도 등 패류가 자주 죽는 지역은 COD가 11.26~28,28ppm, 유화물함량(SS)이 0.14~0.48mg/ℓ로 갯뻘이 썩는 흑변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으로 이같은 오염수치는 완도해역 COD가 1.2ppm, 순천연안 1.7ppm(88년 기준)에 비해 훨씬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태풍 11호 주디 피해 1년이 지난후 삼간도를 비롯한 광양만의 오염과 어패류 피해 현상은 더 심각해 지고 있었다. 실제 광양만 양식장을 되살릴 길이 막연했다.
천혜의 패류양식장 광양만이 죽어가고 있었다. 각종 패류가 떼죽음 당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는가 하면 새로운 양식이 불가능해서 어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여천공단과 광양제철소에서 흘러나온 산업폐수 등으로 1989년 7.8월에 여천시 삼일동 삼간도 등 광양만의 13개 어촌계 양식장 1,051.4ha는 바지락,새고막,참고막,굴,새조개,피조개 등 패류가 전멸된 채 어장 복구가 힘들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목줄을 걸고 있는 광양만일대 2천1백여 가구 어민들은 생활이 어려워져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패류가 전멸당해 1억 원의 피해를 입은 한 어부는 ”85년 공무원 퇴직금 3천만원을 들여 바지락과 고막 양식장을 조성해 재작년까지 소득이 괜찮아 네 식구 어렵지 않게 생활했으나 공단폐수로 양식장 조개가 떼죽음을 당하고 복구가 안되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면서 ”집사람은 생활고를 못견뎌 가출했고 대학 3학년 아들의 학업을 중단시켰다.“고 한숨지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1991년 4월 15일)에 ’시민과 함께 광양만 현장을 가다‘ 특집기사에서 ”공단이 앗아간 조개양식장“ 추적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1989년 태풍예보 때 처리 곤란한 폐수 방류, 삼간도 등 바지락 부촌 순식간에 폐허로 중금속 쌓여 개펄 언제나 양식가능할지.....” 절망의 상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삼간도는 59가구 3백 50여명, 집마다 전화 가스레인지 냉장고 컬러TV 완비, 피아노 17대, 바지락 피조개 새고막 등 패류 2백90여ha 양식, 1988년도 가구당 소득 5천 6백 여만원, 이는 한때 부촌으로 소문나 인근 어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삼간도 이야기를 소개했다.
해마다 4월이면 1일 3천여kg씩 산출되는 바지락을 사러 온 외지인들로 북적 대던 삼간도 포구는 요즘 적막하기만 했다고 기록했다. 삼간도 섬 해변에 서 있는 60여 척의 배들은 해풍에 시달려 칠이 벗겨지고 기관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1시간마다 이 섬과 전남 여천군 율촌면 애양리를 잇는 통통배를 타고 뭍으로 오가는 주민들도 생기를 잃었다고 했다.
번창하던 삼간도가 졸지에 한촌으로 전락한 것은 지난 1989년 7월 여천공단 등에서 폐수를 무단 방류해 어패류가 집단 폐사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안 할랍니다.“- 주민등록증 반납
1997년 3월 26일 오후 삼간도 주민 2백여명은 한국수자원공사 여천사무소에서 여천공단 확장공사 관련해서 더 이상 살아가기가 힘드니 삼간도를 공단 확장부지에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은 공단 확장공사로 인근 어장을 잃어 생계가 막막하다며 삼간도의 공단부지 편입과 이주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주민들은 삼간도를 제외한 공단 확장공사는 생활터전을 잠식해 삼간도를 고립무원 유배지로 만들고, 매립공사로 광양만이 썩어가고 있다며 주민들을 우롱하고 생계터전을 망가뜨린 수자원공사를 해체하라고 외쳤다. 일부 주민들은 텐트를 치고 밤샘 농성을 진행했다.
삼간도 주민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는 바지락을 비롯한 어패류 집단폐사와 바다매립으로 생계터전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6년 5월부터 2001년까지 7천억원의 예산을 들여 화치동 일대와 인근 바다를 매립해 2백 44만 5천여평의 공단부지를 새로 조성하는 공사 시작했다.
7일이 지난 1997년 4월 2일부터 4일까지 삼간도 주민들은 3일간 200여 명이 바지락 폐사로 생계가 막막하다며 한국수자원공사 여천사무소 앞에서 또다시 집단농성을 들어갔다.
주민들은 ”우리는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다다랐다. 수자원 공사는 주민들의 대안 제시 요구에 조업권이 없는 지역이라 자신들에게 책임질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주민들은 격양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비참했다.
주민들은 “나 태어난 삼간도에 어민이 되어 노젓고 고기잡길 어언 삼십 년”하고 늙은 어부의 노래를 불렀다. 처량하게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리고 삼간도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한데 모아 여천시청에 반납했다. 주민들은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안 할랍니다.”며 울부짖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망신고서까지 제출하자고 외쳤다.
당시 삼간도 주민 이주대책위원회 기획업무를 담당했던 박인근(35세)씨는 그날을 회상하며 “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초 6월경에 주민등록증 반납투쟁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울분에 찬 주민들의 요구가 빗발 쳤습니다.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투쟁을 벌린 최초의 주민들이 삼간도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민이 자신들이 주권의 주인인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투쟁은 서러운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민등록증 반납투쟁을 진행한 뒤 1997년 9월 25일부터 삼간도 주민 360여명은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마을 앞 1백여 ha의 연안 양식장에 서식하고 있는 바지락 80% 가량이 폐사했다며 폐사원인규명, 삼간도의 조속한 공단지역고시와 이주대책을 요구했다. 주민들은 수자원공사의 여천공단 확장 공사의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하고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먼저 해결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공사현장에서 시위를 계속하는 등 강경투쟁을 진행할 것이다고 했다.
숙식을 하면서 진행해온 농성 8일째는 주민대표 10명은 수자원공사의 주민 생존권 외면과 무성의에 반발 삭발투쟁까지 진행했다.
주민들은 수자원공사가 삼간도앞 화치동 연안을 매립, 여천확장단지 확장공사를 하는 바람에 조류 흐름이 막혀 양식장 바지락이 집단폐사했다며 삼간도 주민 이주대책 수립 등을 요구했다.
주민들은 여천공단 확장공사로 삼간도 앞 섬보다 더 넓은 1백여ha의 바지락이 뻘밭에서 말라죽어 하얀 조개껍질만 널러 있다며 피해 실태를 이야기 하고 수자원공사를 규탄했다. 당시 화치동지역 여천공단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오·탁수방지막 아래로 흙탕물이 그대로 밀려들어 바지락이 집단 폐사했다고 했다.
삼간도 주민들은 주어진 자연환경에만 의지해 풍요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규모 투자와 함께 피나는 노력으로 바지락 양식장을 만들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개펄에 모래를 실어날라 밟아도 쉽게 들어가지 않는 개펄로 변모시켰다. ha당 4백 50여 만원을 들여 750루베 모래를 뿌렸다. 모래 밭에서 잘 자라는 바지락은 물을 빨아들었다 내뿜기 때문에 개펄을 밀어내 한번 조성한 양식장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9년 바지락이 집단폐사 한뒤부터는 양식장에는 30~40cm의 뻘이 쌓여 점점 황폐화 되었다. 실제로 어떤 주민은 “모래 10배를 실어와 개펄에 뿌려 양식장을 만들었고, 종패값만 2천3백여만원이 들었는데 보상을 받아보았자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했다.
바지락 양식장이 황폐화되자 삼간도 주민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져 날품팔이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 배를 타고 애양원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공사장의 출퇴근 시간을 맞출 수 없어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섬에 있던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어느땐 도시로 나가 일하던 젊은이 2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슬픔을 겪기도 했다. 이때 10여 명의 대학생들도 대부분 학비를 조달할 수 없어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했다.
살길이 막막해 졌다.
○ 사람들이 떠난, 갇힌 섬 삼간도
KBS 환경스페셜은 삼간도를 이렇게 소개했다. “개발이 삼켜버린 땅 삼간도, 자연의 몰락이 가져온 인간의 몰락, 삼간도는 오늘도 바다를 꿈꾼다.”
삼간도는 좁은 땅이었지만 어패류가 풍성한 갯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간도 사람들에게 고기잡는 일과 바지락 캐는 일이 삶의 모두였다. 갯뻘이 드러나는 시간이면 섬마을은 깨어났다. 30여만평의 드넓은 삼간도 갯벌 고기도 많고 바지락도 잘되는 부자 섬마을, 1년 365일 갯벌에서 사는 사람들은 갯벌이 주는 행복을 누렸다. 씨알이 굵고 맛이 좋아 거의다 일본으로 수출되었던 바지락이었다. 물의 흐름, 갯벌과 모래성분이 섞여 있는 최적의 조건을 삼간도 바다는 만들어주었다.
삼간도 앞에 있던 번데기처럼 생긴 3천 여 평의 번데기 모래등은 최고의 바지락 생산지였다.
그러나 어느때부터 번데기 모래등도 바지락의 집단폐사 무덤이 되었다. 여천공단 폐수가 바다로 유입되고 광양만을 매립하면서 유속이 느려졌다. 광양만의 갯벌 70%가 매립되었고 바지락도 집단폐사를 반복했다.
2002년 11월 9일, 여수지방해양수산청 공고 제2002-44호 항만공사 실시계획인 ’광양항 3단계 준설토 투기장 가호안 축조공사‘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7개년 계획으로 총사업비 2,480억원의 공사비를 투자, 8,510천㎡(용량 74,510㎡) 규모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삼간도 주민들의 이주는 2005년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주에 따른 보상과 택지마련 등 대책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2008년 6월 30일 무더위속에 농성을 진행했다. 이들은 3년이 지났는데도 이주를 시켜주지 않고 있다며 항의하고 생계터전을 잃고 살고 있다며 2005년 이후의 생활비를 요구했다. 이주 보상비 추가 요구 투쟁을 진행했다. 여수지방해양수산청이 광양양 3단계 준설토 투기장 가호안 축조공사를 위해 2005년 7월까지 이주택지를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2003년에 보상금을 지급해 줬으나 아직까지 이주택지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막대한 재산피해를 본 만큼, 주민들에게 추가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시위를 벌였다. 2003년 초 토지와 주택, 어선과 어업권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고, 주민들은 2003년 2~3월 사이에 어선과 바지락을 채취할 수 있는 맨손어업권, 어선을 이용한 어업허가 등을 모두 반납했다. 2005년 7월까지 ‘웅천1단계 택지개발지구’로 이주를 시켜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3년치 어업보상금을 받았으나 이주를 약속했던 시점을 3년이나 넘겼는데도 이주택지가 공급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별도의 생활비가 지급도 되지 않자, 주민들은 시위를 했다.
이후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 삼간도 주민들은 모두 이주를 했다. 보상 또한 2008년도에 마무리 됐다. 삼간도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살 수 없어서 떠나야 했다.
2009년 11월 삼간도 주민 118세대 384명의 은 고향을 떠나 웅천택지 1단계 지구 등으로 이주했다.
삼간도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은 통속적으로 살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삼간도(본섬), 이간도(밭섬), 일간도(끝섬)와 그 주변 해역이 간직했던 삶터의 흔적은 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제방에 갇혀 매립을 기다리고 있다.
삼간도 해역의 삼간도와 이간도 그리고 일간도는 서로 연결되었다. 썰물때는 삼간도 본섬에서 이간도까지 약 100여미터의 모랫길이 연결되었다. 이간도에서 일간도로 썰물때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삼간도 본섬 큰 선창에서 애양원까지 700여미터 거리였고 썰물때는 걸어서도 넘어갈 수 있었다. 삼간도에서 애양원은 나룻배로 다녔다. 그리고 이곳 갯뻘에 수도관을 묻어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생기미 우물이 좋아서 그 이전에도 식수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다.
삼간도 동남끝에서 번데기 모래등으로 가는 모래길이 연결되었다. 모래길은 90미터정도 이어졌고 모래길이 드러날 때 이곳에서 주민들은 소풍처럼 놀이도 하고 운동도 했다. 그곳에서 모래길 끝에 3천 여 평 이상의 갯뻘과 모래가 혼합된 천혜의 바지락 밭인 번데기 모래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간도는 밭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북으로 자리잡은 이간도는 서북과 남동쪽 즉 삼간도와 대면한 곳이 넓고 북쪽은 좁은 삼각형이다. 섬 전체가 암벽으로 둘러 쌓였는데 동남쪽 즉 삼간도와 마주한 곳이 넓고 북쪽은 좁은 삼각형이었다. 섬 전체가 암벽으로 둘러쌓였고 동남쪽은 바다로 뻗어나와 섬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벼랑 끝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섬의 중앙부는 1,000평 밭이 개간되어 유자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 유실수가 있었다.
이간도 남쪽 삼간도가 바라보이는 곳에 유두석, 허만기, 문성근, 조병호, 조인목 등 5가구가 살다가 안보취약 독립가옥 철거정책에 따라 이들도 삼간도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이간도는 무인도가 되었다.
끝섬, 또는 일간도는 막내섬이었다. 남북으로 자리잡은 섬은 타원형이며 남쪽은 낮고 북쪽은 높았다. 일간도 산등성이는 평지에 높은 담장을 쌓아올린 것 같이 외길이며 동서 양쪽에서 깍아내린 절벽같고 북쪽 끝은 뽀쪽하게 바다로 돌출해 있었다.
남쪽의 이간도와 140보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간조시에는 모래와 자갈 그리고 조개껍질로 이룩된 방죽이 드러나 보행할 수 있고 만조시에는 보통 허리춤 밖에 차지 않았다.
생기미 우물은 삼간도 마을의 남동쪽 중흥동 산 1555-6번지 해변쪽 중턱에 있었다. 삼림이 울창해 수량도 풍부하고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흘렀다. 상수도가 설치되기 전에는 유일한 급수원이었다. 아들을 못 낳은 부인이 이 물을 마시면 바로 보태를 가져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웃마을에서 배로 물을 실어가며 언제 켜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낙네들이 아침일찍 샘에 갈 때까지 촛불이 타고 있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했다. 생기미 우물 덕분에 삼간도 주민의 집집에는 아들 없는 집이 없었다.
삼간도 행정 관할 편입과 학교 분교의 소속변경은 면사무소 거리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지 않은 때에는 소속 면사무소에서 증빙서류를 발급하는 불편이 있었다. 행정구역 편입 1차 논쟁은 5.16 직후에 있었다. 율촌면 구산리 출신 서양식 면장이 울촌면장때 진외가가 삼간도여서 이곳 사람들과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노인들이 다음과 같은 불편사항을 말했다. 삼간도 주민들이 일을 보기위해 면사무소가 있는 삼일면 중흥리까지 가는 경로가 복잡했다. 삼간도 집에서 나와 배를 타고 애양원까지 나간 다음, 선창에서 신풍검문소까지 걸어 가서, 버스를 타고 석창까지 이동해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삼일면 중흥리 면사무소까지 가서 일을 봐야했다. 이러한 불편 때문에 율촌면에 편입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삼일면장의 불편한 심기 등으로 변경되지 않았다.
편입 2차 논쟁은 1981년 여름 여천지구출장소 제3대시장 박일출의 삼간도 방문(헬리콥터이용) 마을 주민들과의 대화 이후 언급되었으나, 주민총회를 통해 삼일면에 그대로 소속하고 중흥리에서 분리 삼간도리로 승격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주민들은 생활권과 행정권의 충돌에서 피해를 당했다.
여수산단의 형성과 확장이전에는 삼일면 방향으로 이동할 때 배를 타고 화치로 이동하거나 중흥리 당산 마을 앞 딴목섬 인근에 배를 두고 이동하기도 했다.
삼간도 분교는 1965년 3월 1일 중흥초등학교 삼간도 분실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마을회관에서 공부를 했다. 다음해(1966년) 3월 2일 중흥초등학교 삼간도 분교로 인가되었고, 1967년 5월 17일 거리관계상 율촌초등학교 삼간도 분교로 편입되었다가 1984년 신축했다. 그리고 1988년 3월 1일 여천시 승격에 따라 화치초등학교 삼간도 분교로 편입되었다.
1948년 10.19 여순사건때는 인근 신풍리 지역에서 최소 10여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삼간도 주민들의 친인척들도 포함되었다. 신풍지역과 혼인 관계 등으로 친인척이 형성되어 있었다. 가까운 화치에서 젊은 사람들이 삼간도로 피신 와서 숨어 지내기도 했었다.
천혜의 자연이 만들어준 삶의 공간, 사람들의 생명도 지켰던 섬이 삼간도 였다.
개발이 삼켜버린 땅 삼간도, 자연의 몰락이 가져온 인간의 몰락, 삼간도는 오늘도 바다를 꿈꾸고 있다. 삼간도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지도4>애양원과 삼간도 일대
◯ 삼간도 사람들의 생존권 투쟁과 이주역사
1964.5.12. - 제1종 공동어업권 취득
1967.3. 6. - 제1종 및 제3종 어업권 행사계약
1974.4.28. - 여천공단 조성을 위한 건설부 고시로 어업권 소멸
1974.5.23. - 어업권신청 불승인 통보(전남도지사)
1976.5.28. - 어업권 연장신청
1976.6. 4. - 어업권 신청서 반려(여천군수)
1989.7.27. - 태풍(제11호) 주디 강습, 삼간도 근해 바지락 폐사
1989.8.29. - 어업권 소멸회신(여천시장)
1989.8.24. - 제1차 투쟁 4일간, 집단농성 돌입 (시청잔디구장, 250명 참가)피해보상 및
이주대책요구, 오후3시, 경찰 강제 진압 4명 연행, 8명 부상
- 시청잔디구장 재집결 (25일, 시청잔디구장, 연인원 1,000명) ~ 8월27일까지 진행
생계대책마련, 학비면제, 피해보상, 이주대책, 이자감면, 장기저리자금지원,
각종대출금 상환연기 등 요구
1989.8.27. - 농성해제 귀가(오후 6시 30분)
1989.9.11. - 제2차 투쟁 5일간 (중흥동 여천공단협회, 연인원 1,500명), 공단협회 전망대 주위
노천 취침
1989.9.15. - 오후 4시 농성해제
1989.9.29. - 제3차 투쟁 6일간 서울투쟁, 2일간 (평민당 중앙당사 농성, 34명)
~ 8월 30일까지 진행
1989.10.1. - 서울 가두시위 및 명동성당 농성(34명)
1989.10.2. - 대학로 홍보 및 평민당사 농성(연인원 102명) ~ 10월4일까지 진행
1989.10.5. - 서울 상경투쟁 종료
1995.7.23. - 시프린스호 좌초사고(소리도 인근해상)
1995.11.30.- 시프린스·사파이어호 사고관련 어민피해, 호남정유 항의농성(100여명)~12월2일까지
1996.7.21. - 여천공단인근 주민집단시위(1천여명) 중흥집결_.석창사거리행진
”죽음의 땅, 죽음의 바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현수막
1996.7.22. -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여천공단주변마을 환경영향평가 결과발표
”여천공단 주변마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발표
1996.8.13. - 제4차 투쟁, 삼일지역 합동 생존권보장 및 이주대책촉구 궐기대회 참가
(묘도초등학교, 500명),
묘도 창촌->온동->도독->광양포->삼간도->묘도 창촌
10km, 2시간, 80여척(300명 승선) 해상시위
1996.8.21. - 제5차 투쟁, 삼일지역 합동(600여명/삼간도 45명) 서울투쟁, 생존권 및 이주대책
촉구, 국무총리면담신청 불발
1996.8.22. - 삼일지역 주민대책회의, 공해피해대책요구, 공단조업중단 및 해상출입로 차단시위
등 검토 발표
1996.11.1. - 삼간도 주민총회, 생존권 보장요구 투쟁준비 등 결의
1996.11.4. - 제6차 투쟁, 3일간, 생존권 및 이주대책 촉구, 집단농성(서남산업단지관리공단,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연인원 750명), 11월 ~ 5일까지 농성
1996.11.6. -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이동 농성, 시장면담, 수자원공사 면담, 저녁 농성해제
1997.3.26. - 제7차 투쟁, 산업단지확장공사 항의투쟁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1997.4. 2. - 제8차 투쟁, 3일간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농성), 주민등록증 반납투쟁(4월 4일)
1997.9.25. - 제9차 투쟁, 8일간 (수자원공사 여천출장소 농성), 연인원 2,000명, 주민대표 삭발,
바지락 폐사에 따른 생계기반 상실, 이주대책촉구
1998.8. 2. - 제일모직 폐수 남수천 방류 유염 피해, 삼간도 등 어민피해 20억 발생
1998.8.11. - 삼간도 주민 대표단 제일모직 항의 방문
2002.11.9. - 여수지방해양수산청 광양만 3단계 준설토 투기장 가호안 축조공사 계획발표
2005. - 주민 이주 돌입 (~2007년까지), 7월까지 이주택지 공급하기로 약속
2008.6.30. - 제10차 투쟁, 이주대책 약속 이행 촉구, 생계비 지원 요구
2008.12. - 보상마무리
2009.11 - 1단계 주민이주(웅천택지구역 등)
삼간도와 묘도 주민들의 광양만 해상시위 (1996.8.13.) ⓒ정민수
삼간도와 삼일지역주민 서울 상경투쟁(1996.8.21.) ⓒ정민수
<지도-5 삼간도 주민들의 삶터>
○ 정리하면서
삼간도는 이제 배로 갈 수 없는 갇힌 섬이 되었다. 언제가는 주변이 매립되고 섬의 형상이 사라질 수 도 있다. 율촌면 장도는 전남동부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로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삼간도 주민들도 섬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공원으로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글의 정리를 위해 증언해주신 삼간도 주민(조병종, 주유섭, 류갑선, 박인근, 김영원, 허원량 등)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진을 제공해주신 묘도 온동 정민수 통장,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발행한 ’여수의 사라진 마을 조사보고서‘, ’여수국가산단 조성과 이주민사‘,’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 제1집‘, 여천시 문화원 발행 ’여천시지 1,2권‘ 여수시문화원 발행 ’여수시 마을 유래지 제2권, 여수시 발행 ‘여수국가산업단지 주변마을 주민이주백서’ 등 자료집의 자료와 kbs 환경스페셜을 비롯한 언론 보도문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