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금강사 연곡면 소금강길 670
금강사는 소금강 무릉계곡에 관음사가 있던 절터라고도 하나 역사적인 정확성은 없고 정각스님이 1964년 창건한 절로서 주위의 기암괴석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맑다.
특히 금강사 맞은편에는 천여 명의 군사가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는 식당암이 있고, 봉우리 3개가 기이하게 솟아있는 삼선봉이 있다
등명낙가사 강동면 괘방산길 16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일명 ‘등명낙가사’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수다사(水多寺)라 하였다.
자장이 이 절에 머무를 때, 꿈속에서 중국 오대산의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고 하여 이튿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뒤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등명사(燈明寺)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등명사라 한 것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볼 때 이 절이 강릉도호부 내에서는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고,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절 근처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는 사방 1㎞의 석성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등명사는 폐허가 되었다.
당시의 왕이 안질(眼疾)이 심해서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동해 정동(正東) 큰 절에서 씻은 쌀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서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왕의 특사가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동해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이 맞아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1956년 경덕(景德)이 옛터에 절을 중창하고 낙가사라 개칭하였으며, 1997년 영산전을 지었다. 1982년에는 청우(淸宇)가 극락전·약사전·삼성각·범종각·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일명 大靈山殿)·요사채 등이 있다. 오백나한전 안에 안치된 오백나한상은 인간문화재 유근형(柳根瀅)이 5년에 걸쳐 만들어서 1977년 10월에 모신 것이다. 500구가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 나한상은 다른 곳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청자불상이다.
또한 이 절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인 등명사지오층석탑이 있다. 창건과 함께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지대석 위에 축조되었는데,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씩 파손되었고 기단석은 연꽃무늬로 수놓여 있다. 특히 2층 기단부에는 돌자물쇠를 채워 놓았던 관계로 탑 안의 보물이 도굴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
원래는 이와 같은 탑이 3개였는데, 하나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그 잔해만이 바닷가에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수중탑(水中塔)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현재 이 절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부터 백일축수도량을 개설하고 있으며, 오백나한전 밑에는 등명약수(燈明藥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법왕사 구정면 금평로 314-246
구정면 칠성산(七星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1930년에 주교(胄敎)가 세운 기적비(紀蹟碑)에 의하면 634년(선덕여왕 3)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에는 9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산조인 범일(梵日)이 출가하여 수도한 수선도량(修禪道場)이라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이 절은 지방 부녀자들의 칠성(七星) 기도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사찰명도 ‘칠성암’이라 하였다. 1896년에는 진사 정은(鄭溵)이 이곳에 독서재(讀書齋)를 지었으며, 1947년에는 주지 청우(聽雨)와 운곡(雲谷)이 10여 칸의 법당을 확장하여 29칸의 대웅전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절 이름을 칠성암에서 법왕사라 개칭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경내에는 칠성암기적비와 운곡선사비가 나란히 서 있다. 또, 절 아래쪽에는 연대미상의 팔도도원장 겸 총섭사이선사비(八道都院長兼總攝舍伊禪師碑)와 계월당(桂月堂)·월봉당(月蜂堂) 두 선사의 부도가 있다.
보현사 구정면 어단리 366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천축국(天竺國)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이 강릉의 동남쪽 남항진(南項津)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文殊寺: 지금의 寒松寺)를 세웠다.
이 때 보현보살은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내가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을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하고 시위를 당기니 보현사 터에 화살이 떨어졌으므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는 보현사의 창건설화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650년(진덕여왕 4)에 자장율사가 보현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신라 말기의 선승 낭원(朗圓)이 913년(신덕왕 2)에 지장선원(地藏禪院)을 열어 전국의 학승(學僧)들을 제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조선 후기 순조 때 중건한 대웅전과 요사채·주지실·종각 등과 1982년에 중건한 나한전(羅漢殿) 등의 당우들이 있으며, 절 앞에는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 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와 석탑, 사자모양을 취한 석물(石物), 절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물 제191호인 낭원대사 오진탑과 2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법당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도광 2년’(1822)의 기록이 있는 후불탱화(後佛幀畵)와 ‘가경4년기미(嘉慶四年己未, 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 1점이 있다. 또 나한전에는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용연사 사천면 중앙서로 961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절 아래 계곡에 용추(龍湫)가 있어서 용연사라 하였으나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7세기 중엽 옥잠(玉岑)이 이 절에서 경전비구니가 대웅전과 요사삼성각삼성각
건물로는 대웅전과 원통보전·삼성각·요사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불이 놓여 있고, 그 뒤로 목각후불탱화관세음보살석탑·귀부(龜趺) 등이 남아 있다. 부도는 1∼1.44m의 크기로서 모두 석종형이고, 부암당(浮巖堂)과 계월당(桂月堂)·원파당(院波堂)·주파당(州波堂)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편 오층석탑은 높이 3.6m로 1967년에 옛 기단
[네이버 지식백과] 용연사 [龍淵寺] (두산백과)
인월사 경포로463번안길 21-12
<방해정>
1976년 6월 17일 강원유형문古刹)인 인월사(印月寺) 터였다. 방해정은 1859년(철종 10), 운정동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중요민속자료 5)의 주인이자 통천군수(通川郡守)였던 이봉구(李鳳九)가 지은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 방해정 [江陵放海亭] (두산백과)
조계종 성원사 연곡면 수터골길 171
현덕사
오대산 줄기인 만월산 중턱에 자리한 현덕사는 1999년 7월 10일 주지이신 현종스님께서 농가를 사들인 후 창건하신 사찰이다. 길가에 서 있는 현덕사 이정표를 보고 왔다가 조그만 규모에 실망하지만, 드넓은 도량에 놀라고 울창한 소나무와 주위 산세에 감탄한다는 현덕사. 한 신도분이 기도하러 왔다가 달빛 가득 쏟아지는 밤에 보았던 하얀 조팝나무 꽃이 그렇게도 좋았다는 달밤이 멋있는 사찰이 현덕사다. 환경 법보 종찰을 지향하는 현덕사 경내에는 금낭화, 할미꽃을 비롯해 각종 야생화와 여러가지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