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李氏 宗中史(광주이씨 종중사)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유래(由來)는 신라17대 내물왕(재위기간 356 ~ 401년)시절 내사령(內史令)인 휘 자성(自成)으로 비롯되는데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하였다고 한다. 칠원은 지금의 경남 함안을 말한다.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경기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회안에서 복역한지 몇 대(代)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대로 현재(賢才)가 있었다한다. 고려말에 이르러 실권을 장악한 대인(大人)들이 그들을 광주(廣州)의 향리(鄕吏)로 이속(移屬)시켰는데, 향리는 과거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그를 계기로 광주에 세거하던 휘 당(唐)께서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생원공에게는 인령(仁齡), 원령(元齡, 후에 집<集>으로 개명), 희령(希齡), 자령(自齡), 천령(天齡)의 오형제를 두었는데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940년 고려태조 23년에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여 광주이씨가 크게 번성케 되었다
광주이씨는 고려태조에 의하여 회안(淮安 : 京畿 廣州)으로 강제 이주된 후 선조 자성(先祖 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왔다.
광복 이후 정묘대동보를 만들 때 까지 후손은 5개 계파로 나뉘어 족보를 합보(合譜)하지 못하고, 둔촌 후손들은 광주이씨 대종회를 구성하고 둔촌의 아우되는 십운과공(十韻科公) 후손의 종회와 두 형제의 아버님이신 생원공 휘 당(生員公 諱 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 휘 집(遁村 諱 集)과 십운과공 휘 자령(十韻科公 諱 自齡)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각기 대종회와 십운과공 종회로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율정공 휘 관의(栗亭公 諱 寬義) 후손은 1987년 정묘대동보 전 까지는 석탄, 암탄 형제 종회와 함께 한희(漢希)를 1세로 하여 족보(族譜)를 만들고 종사를 이어오다가, 정묘대동보에서 둔촌(遁村)의 4촌이며 율정공의 증조이신 생원공 휘 록생(生員公 諱 祿生)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석탄공 휘 양중(石灘公 諱 養中)의 후손은 정묘대동보 이후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로 석탄공 휘 양중을 1대조(一代祖)로 하고 상대를 소자출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의 후손도 암탄공종회(巖灘公宗會)를 만들어 정묘대동보 이후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을 1대조(一代祖)로 하여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광주이씨는 상대소목(上代昭穆)의 실전(失傳)으로 대종회와 십운과공종회, 석탄공종회, 암탄공종회, 율정공종회가 각기 일대조를 달리하여 족보를 만들어 왔으며 그에 따라 광주이씨는 대종회와 4개 종회로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5개 문 중 대표자 모임을 매년5회 정기모임을 갖고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