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지도만큼 기구한 운명을 지닌 곳은 없을 것이다.
한강 하류 난꽃과 영지가 자라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섬 난지도(蘭芝島).
조선 때는 꽃과 풀이 많다고 해서 ‘중초도’(中草島), 오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오리섬’(압도)이라 불렸다.
‘꽃섬’이란 이름도 있었다.
"중초도는 주위가 22리로서 갈대가 많이 나서 선공감(繕工監)에서 이를 베어다 국가의 조달품으로 사용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조선 말까지 중초도라고 불리던 이 섬은 이후 난지도로 불리게 되었다.
샛강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수양버들이 늘어서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초와 지초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어서 난지도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난지도에 기장과 조(粟)가 잘 자라서 수색 쪽의 매봉산 부근 사람들이 늘 샛강을 건너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점차 뱃사람들이 난지도에 들어가 살면서 삼남 지방에서 곡식을 사 오기도 하고,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고 전한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난지도에는 수많은 오리 떼가 찾아왔다.
약 70여 세대의 주민들이 수수와 땅콩, 채소를 가꾸거나 젖소 등의 가축을 기르며 살았었다.
또한 섬의 갈대숲이 아름다워 젊은이들이 산책을 즐기거나 영화의 야외 촬영 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의 대학생들이 여름철 야영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주민들이 샛강을 식수로 사용하고 채소를 씻었으며, 목욕을 하거나 민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는 등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난지도가 두 가지 역할을 하였다.
우선 서쪽에 위치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접전이 벌어졌을 때는 조선군이 마포 서강나루에서 몰래 화살을 싣고 배의 돛을 내려
난지도 갈대숲에 배를 숨겨두었다. 이후 썰물 때 강물을 따라 소리 없이 내려가서 행주산성에 도달하여 화살 등을 공급함으로써
권율이 일본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서울을 점유한 왜군이 서강 등에 군량을 부려 놓은 것을 난지도에 주둔한
조선군이 배로 접근하여 화살에 유황을 묻혀 군량미에 쏘아 태워버렸다고 한다.조선 말에는 현재 고양시 덕은리의 난지도 샛강
어구에 수적(水賊)이 배를 갈대숲에 대고 숨어 있다가 밀물 때 지나가는 상선(商船)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기도 한 곳이다.
이 샛강에 물이 말라 물이 적게 되면 난지도 건너편 마을사람들은 배로 건너지 않고 소달구지를 타거나 지게를 지고
난지도 밭으로 일하러 다녔다고 한다.난지도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549번지 일대를 말한다.
남쪽으로 홍제천, 북쪽으로는 성산천, 또 동쪽으로는 샛강 난지천에 둘러싸인 272만㎡(82만3000평) 의 땅.
위치로 볼 때 난지도는 서울시 마포구 한강 하류에 발달한 범람원으로 북쪽 한강 가에 치우쳐 있으며 행정구역상 상암동에 속해 있다.
상암동의 동명은 수상리와 휴암리에서 각각 한 글자씩 합쳐서 만들어졌다. 상암동은 1914년 4월1일 경성부 연희면의 수상리·구리동·휴암과 고양군 하도면 덕은리 일부(난지도)를 합하여 고양군 연희면 상암리로 하였다. 1949년 8월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시로 편입되고 이튿날 대통령령 제160호로 은평출장소 상임리로 되었다.
1950년 3월15일 서울시조례 제10호로 상암동이 되었으며 1955년 4월18일 서울시조례 제66호로 성산동·상암동·중동을 병합한
성암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따라 서대문구 상암동이 마포구로 편입되면서 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상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는 동이다.

상암동을 이루고 있는 구석말은 귀리(歸里)의 구석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귀이깨라고도 한다.
모로 돌아 한강가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인데 산17번지와 83,84번지 일대이다.
물치는 물이촌(水移村) 수색(水色)·수상리(水上里)·수생리(水生里)라고 한다.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을 말하며 장마때면 한강물이 이곳 앞까지 오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154~163일대이다.
부엉바위골은 휴암동이라 한다.
이곳에 휴암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산28~32번지 일대이다. 원래는 휴암이라 했는데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 부엉바위에서는 부엉이가 울면 밤이 된다는 뜻이고 구석말로 가는 걸음도 멈추었다고 한다.
압도(鴨島)·중초도(中草島) 부엉바위 뒤로 있는 산이 매봉산이다.
밤이되면 매산의 매가 잠들고 낮에는 부엉이가 잠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귀이깨, 모르치, 물치, 구릉지 같은 예쁜 이름들로도 불렸다.

난지도는 땅콩과 수수를 재배하던 밭이 있던 평지였다.
낮은 땅이었기 때문에 홍수 때면 집이 물에 잠기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학생들의 소풍장소나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 받았으며 애정영화의 세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난지도는 기름진 땅으로 주민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준 소중한 터전이었다. 난지도에서 주로 농사일을 했던 사람들은 난지도
샛강 건너편 모루지와 귀리(지금의 상암동)에 정착하고 살았던 250여가구였다.
주로 땅콩과 수수농사를 짓고 소를 놓아 풀을 먹이는 곳이었다. 난지도에서는 재배되는 땅콩은 우리나라 생산량의 30%도 정도였다.
그 당시 많이 쓰였던 수수 빗자루의 70%가 난지도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