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서 내려다 본 한양도성 밖 동쪽 벌판(東郊)이다.
왼쪽 나즈막한 응봉이 보이고 그 오른쪽 뒤쪽으로 남산이 기세 좋게 지켜주고 있다.
그 앞에는 한천(漢川) 중랑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그 벌판을 감싸고 있는 게 좋아 보인다.
이곳 지세(地勢)를 풍수학자 장영훈의 답사기록을 통해서 살피려고 한다.
"백악으로 들어가는 입수(入首)까지 확인하였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장풍(藏風)을 갖추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럴 경우 허약한 낙산보다는 인왕산 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백악혈(白岳穴 사실은 고려의 남경궁)을 살피려는
발걸음은 인왕산 주능선을 타고 남산에 이르러 계속해서 산줄기를 따라가면 도착하는 그 곳은 하더라 풍수의 발상지
왕십리 무학봉(하왕십리동 998번지와무학현대아파트 사이에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한다.
불뫼에서 시작한 산줄기의 끝이 되기에 종남산(終南山)으로 부르기까지 했던 남산의 꼬리 녘에 있는 무학봉은 혈자리를
확인하는 풍수관산점이 된다.무학봉에서 백악쪽을 관산하면 인왕산 낙산 그리고 남산이라는 산줄기들이 생기를 모아주는
장풍국면이 확인된다."-장영훈의 책 <서울풍수>에서
여주 신륵사 조사당이다.여기에는 덕이 높은 유명한 세 명의 스님 존영을 모시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 만한 길상지로구나.』
무학대사는 흐믓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였다.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이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 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장,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가운데 나옹선사의 진영이고
오른쪽 무학대사의 진영이 보인다.
왼쪽에는 인도의 고승 지공 스님의 진영이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일파는 이를 반대한다.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일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안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 무학대사 무산된 계룡산 신도안(新都內)
천도(遷都) 계획 삼봉 정도전(1337~1398)과 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 건국의 쌍두마차...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사실을 태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 가는구나.』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설(雪)」자와 빙 둘러싼다는 울타리「圍」의「울」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왕십리(往十里)」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유래로 왕십리에 속했던 일부 지역이 도선동으로 분할됐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명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명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만 같고 글씨는 다른 무학봉이 있고
이 이름을 딴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무학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지인 것 같다.
그 밖에도 서울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무악재는 무학 스님의 이름에서 연유한「무학재」가 변한 것이고,
청량리는 청량국사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일설) 무학대사가 도성 안으로 넣고자 했던 곳이 북한산 "인수봉"이 아니라
종로구 홍제동에 있는 인왕산 선바위라는 설도 있다.
국사당 위쪽 선바위에 가면 지금도 그 바위의 유래에 관한 상세한 안내문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