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가 떠났다
5월의 날씨가 마치 한여름 같다. 더위를 식힐 겸 동네공원으로 나왔다. 나긋나긋한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공원에는 반려동물 축제로 떠들썩했다.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단장한 애완견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고 앙증맞은 요크셔테리어, 눈꺼풀이 가늘어 연약해 보이는 몰티즈, 코가 눌려 귀여운 시츄, 곰 인형 같은 포메라니안까지 여러 종의 애완견들이 주인을 따라 워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머리를 리본으로 예쁘게 묶은 작은 요크셔테리어한테 유독 눈이 갔다. 어쩌면 그리도 이슬이를 빼닮았을까. 하마터면 달려가 덥석 안아버릴 뻔했다.
이슬이는 우리 집에서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애완견이다. 16년간이나 키워 자식 같았던 이슬이가 한 달 전 우리 곁을 떠났다. 이슬이는 얼마 전부터 폐에 물이 찬다는 폐부종을 앓으며 자주 호흡곤란이 왔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주사 놓고 심장마사지를 해주어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딸애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슬이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딸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남편을 닮아서인지 동물을 좋아하는 딸애가 막상 강아지가 생기니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다. 딸애는 이슬이와 같이 자랐다. 남편과 내가 출근하고 없는 빈집에서 이슬이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냈다. 외동딸인 딸애한테 잉태와 출산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슬이고 꼬물꼬물한 새끼한테 젖을 물리는 모성애를 알게 해준 것도 이슬이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던 이슬이도 나이 드니 병이 생겼다. 1년 전 자궁축농증 수술을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이슬이의 동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잘 걷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가끔 식탁 의자 모서리에 끼어 넘어지기도 했다.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던 이슬이가 아무 데나 실수하는 일도 많아졌다.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처음엔 야단을 치고 벌을 주었지만, 화장실 가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밥을 주어도 그릇을 찾지 못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서야 입을 댔다.
걱정스러워 병원에 데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고 했다. 동물병원에서는 나이가 많아 관절이 휘어지고 눈에도 녹내장이 왔다고 했다. 늦어 방법이 없다고 하는 수의사의 말을 영리한 이슬이가 알아들었을까 봐 걱정됐다.
눈이 안 보이면서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약한 다리를 끌고 곧잘 걸었는데 다리가 아예 안쪽으로 휘어 걸핏하면 넘어졌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현관 앞으로 달려 나와 반기던 이슬이가 제집 앞에서만 맴돌았다.
그때부터 이슬이는 우리 집의 갓난아기가 되었다. 사료를 주어도 못 찾아 먹으니 옆에 붙어 앉아 먹여주고 기다렸다가 용변을 보면 치워야 했다. 동물이지만 그렇게 노쇠해진 강아지를 보는 것이 우리 가족에겐 큰 슬픔이었다. 누구든 집에 돌아오면 이슬이부터 챙겼다. 외출해야 할 때도 이슬이 걱정에 오랜 시간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준비도 없이 이슬이를 보내고 우리 가족은 웃음이 줄어들었다. 웬만하면 서로 이슬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매일 남편 옆에 와서 잠을 자던 이슬이의 부재에 남편이 느끼는 허전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티격태격 다투며 자란 딸애의 충격이 가장 컸다.
유독 영리하고 똑똑했던 이슬이는 우리 세 식구의 성격을 모두 꿰고 있었던 것 같다. 장난을 좋아하는 남편한테는 애교를 부리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내 앞에서는 발을 싹싹 닦았다. 자기보다 어리다고 생각하는 딸애 앞에서는 오히려 의젓하게 굴었다. 떠나던 날 남편의 심폐소생술로 살아날 때마다 우리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것을 이슬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같이 사는 동안 이슬이가 나에게 준 기쁨과 믿음에 비하면 나는 턱없이 부족하게 해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누가 그렇게 사람을 반겨줄까. 몸이 아플 때나 잠에 취했다가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달려 나오는 이슬이처럼 집에 돌아오는 사람을 반겨주는 이가 몇이나 될까. 퇴근하고 돌아오면 쫓아 나와 반갑다고 매달리던 이슬이를 많이 안아주지 못했던 것도 미안하다.
그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집이 텅 빈 것처럼 휑하다. 재롱떨며 애교 부리던 순간들, 화장실에 가서 용변 보고 발수건에 발을 싹싹 닦으며 깔끔떨던 이슬이의 환영이 지워지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는 강아지들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워킹을 시작한다. 실룩샐룩 궁둥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이 귀엽다. 다른 한쪽에서는 애완견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대회가 끝나고 좋은 성적을 낸 강아지들은 주인이 선물로 주는 간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다.
대기소에는 유모차에 앉아있는 강아지도 있었다.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사람이 보면 신기해하겠지만,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애완견의 모습이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애완견은 이제 단순히 애완용으로 키우는 강아지가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며 사랑을 주고받는 동행 견이다. 사료를 주고 용변이나 치워주는 사육의 의미가 아닌 서로 교감하며 매 순간을 함께하는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애완견 축제를 돌아보고 나니 이슬이 생각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작은 것이 뭐라고 이렇게 눈에 밟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