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
1.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지금 죽음이 점차 배제되고 일상적 공간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죽음은 공동체 속에서 전개되었고 모두에게 개방된 과정이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뜻한 죽음이라고 말할순 없을지라도 죽어가는 자는 오랫동안 친근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 속에서 ‘죽음’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의학의 진전, 위생을 통한 이른 죽음의 감소는 점점 죽음에 대한 인식을 멀게 만들었고 결국은 효율성과 통제의 필요성이란 명분 속에서 일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2. 문명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오래 살게 되었고 일찍 죽는 사람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불멸에 대한 환상’을 꿈꾸었고, 죽음에 직면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죽어가는 자들을 일상에서 지워버려 나갔던 것이다. 엘리아스는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병원에서의 제도화된 일상만이 죽어가는 상황에 대한 사회적인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틀은 감정이 배제되어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더욱더 고립무원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죽어가는 자의 죽음은 ‘죽음’ 이전인 ‘노화’ 속에서 이미 시작된다. 노화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고 냄새를 풍기고 추악한 신체적 반응을 동반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며 목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노화와 죽음은 폐쇄된 공간 속에서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것이다.
3. 노화와 죽음의 과정은 문명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틀 속에서 진행된다. 이 모든 것은 죽는 자와 산 자를 격리시키는 형식이며 죽는 자들의 인접성에 의한 불안과 위협을 가능한 멀리하려는 수단으로 작동된다. 살아있는 자들의 문명화된 감각에서 파생된 냉혹한 폭력이 사회적으로 무력해진 하나의 집단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조장하고 방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감각을 상실한 결과이다. 문명화 과정은 개인들을 스스로 통제하고 활동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이며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특히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존엄은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어진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 사람은 진정 고독하고 비참해진다. 문명화된 ‘죽음’은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 엘리아스는 80대의 나이에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는 작품을 통해 노화와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을 사회적 문제와 의미를 통해 구성했다.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라는 주관적 측면이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어떻게 조우하고 결합되는 가를 진술하는 것이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한 노인의 생생한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방법 표현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 인간의 동물적 측면에 가해지는 폭력 속에서 죽음을 당혹스럽고 잔혹한 이미지로 인식하게 하는 심리적 매커니즘과 사회적 제도의 냉혹함을 펼쳐낸다. 죽음이 위생적인 이유로 숨겨지고 심리적 불편함 때문에 은폐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 의미를 인간 스스로 지워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러한 변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쉽게 바꿀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는 많은 태도가 실제로 사회적 변화 속에서 만들어진 제도에 따른 결과였음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서 실증되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완화시킬 방법은 존재하는가? 아니 ‘죽음’이 그 사람의 마지막 존엄을 보여줄 수 있는 순간으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한때 ‘성’에 대한 담론은 은폐와 금기에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성’에 관한 이야기는 일상적으로 통용되었고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는 사라졌다. 그런 변화 속에서 ‘성’에 대한 부정적 측면은 축소되었던 것이다.
6. 이와같이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필요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개방성과 죽음이 제시하는 죽는 자와 산 자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좀더 총체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죽는 자’의 모습을 감추려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죽음’의 순간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며, 죽어가는 자에 대한 의학적 치료만이 아닌 그의 내면과 살아온 삶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 육체적 고통뿐 아닌 내면의 고독을 완화시켜 주어야 한다. 그것은 노화와 죽음을 은폐된 공간 속에서 끄집어내어 인간의 존재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상황임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좌절과 고독을 공감과 이해를 통해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더 이상 배제하지 않고 인간 삶의 총체적 구성인자로서 인간의 표상 속에 끌어들일 때 스스로를 외로운 존재로 느끼는 폐쇄인이라는 에토스는 급격히 약화될 것이다.”
7. 엘리아스의 노화와 죽음에 대한 진술은 그가 현재 경험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체험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분석한 것처럼 죽음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냉혹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역지사지’ 이것은 인간 사회에 만연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가장 핵심적 원리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의도적 배제와 환상적 사고를 통해 현실을 무시한다. 그 결과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죽어가는 자’들의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인간적 슬픔을 목도하게 된다. 인간은 언제쯤 인간에 대한 진정한 동일시와 연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자신의 폐쇄된 이기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외부의 비극과 고통에 무지한 채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간의 반복되는 불행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만할까? 엘리아스의 ‘노화와 죽음’ 역시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첫댓글 -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 사람은 진정 고독하고 비참해진다"
- " ‘죽음’이 그 사람의 마지막 존엄을 보여줄 수 있는 순간으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 " ‘노화와 죽음’ 역시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 지금의 광고 세상을 접하다보면 노화와 죽음이 마치 게으른 자의 결과물인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상품화된 사회에서 죽음까지도 자본의 현실성을 보여줄 뿐이다. 개인적 삶의 끝과 인류 종족으로서의 멸망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잘살아야 한다는... 행복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열망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뿐이다. 인간성이라는 단어가 낯선 낱말이 될 날이 멀지 않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