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훗날에 독재를 일삼고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대거 죽이면서 대한민국의 이름을 먹칠한 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대통령의 독재라는 검은 물감으로 물들여 버린 사람이었다. 훗날 안두희에게 명령하여 민족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을 죽인 자도 이승만으로 지목된다. 그는 평소 권력에 눈먼 기회주의자였는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내가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라며 대통령을 조건으로 가입한 사람이며 후에 미국에 붙어서 6.25 전쟁을 부추겨 동족상잔의 아픔을 우리 민족이 겪게 만든 장본인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1899년~1904년), 수감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제 하 조선에 귀국하여 교육계몽운동 등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역서-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 조소앙,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등 민주적 절차를 흠결한 두 차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를 요양차 방문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2
윤보선 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4
1960년 8월 12일
1962년 3월 22일
1960년 대선 — 79.1%
(국회 간선, 208표)
민주당
(1960)
무소속
(1960 ~ 1962)
대통령 사임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2년 3월 22일 ~ 1963년 12월 16일)
윤보선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이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에딘버러가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던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등 경제부문에서는 많은 업적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소흘히 했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위로 하락하였다.
4
최규하 崔圭夏
(1919년 7월 16일 ~ 2006년 10월 22일)
10
1979년 12월 6일
1980년 8월 16일
1979년 대선 — 96.3%
(대의원 간선, 2,465표)
무소속
대통령 사임으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80년 8월 16일 ~ 1980년 8월 27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3일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였으나, 활동 과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때 나온 유행어가 전 재산 23만원이라는 말이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대장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국, 동구권,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86 아시안게임을 유치시킨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체육을 좋아하여 육사생도 시절에는 육상부와 럭비부 팀원으로 활약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선 당시 보통 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1994년 그가 정치 비자금을 챙긴 것이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당시 국회의원 박계동 등에 의해 연이어 폭로되면서 풍자되었다.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경상남도 거제 출신이며, 호는 '거산(巨山)'이다. 태어난 고향인 '거제'와 정치적 기반이 된 곳(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로도 유명하다. 3김시대의 일원이었으며, 김대중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에 삶을 바친 민주화 운동가이다.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하고 민주당 구파에서 출발한 보수 우파 정치인이기도 하다. 김영삼을 상징하는 고사성어로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의 큰 계파중 하나인 민주계 보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인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9선 의원을 지내면서 3공화국~ 5공화국 치하의 야당 지도자, 통일민주당 총재 등으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의 첫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1년 이후 30여년간 이어졌던 권위주의 정권을 종식하고 민간 정부인 문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재임 중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세계화 사업을 본격화하여 대한민국의 OECD 가입을 추진하였다. 집권 말기인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하였다. 퇴임 후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 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급성 패혈증과 신부전증으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Rafto)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9
노무현 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16
2003년 2월 25일
2004년 3월 12일
2002년 대선 — 48.9% (12,014,277표)
새천년민주당 (2003) 무소속 (2003 ~ 2004)
대통령 직무 정지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한 것, 대기업 간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한 것 등이 높게 평가받는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지만 역대 대한민국 정부 중 OECD의 성장률을 하회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치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나, IMF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경제성장률 대비 국내 경제성장률이 노무현 정부 -0.7%, 이명박 정부 +0.0%, 박근혜 정부 -0.5%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골디락스 호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를 가장 크게 하회한 대한민국 정부로 기록되었다.
주요 실책으로는 정치적으로 친인척 및 측근비리, 사회적으로 교육 정책 및 부동산 정책의 실패, 경제적으로 양극화 심화에 따른 민생경제 파탄, 외교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패 등이 꼽힌다. 부동산 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소득 분배 지표가 더욱 악화되어 서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소득 불평등도는 이후 보수 정권 9년 간 완화되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역대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반미적 입장, 편협한 국수주의, 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렇듯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외교·안보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 조사가 정례화 된 제6공화국 이래 노태우를 제치고 임기 평균 국정 지지율 최하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재임 시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듣고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으며 적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호는 원래 일송(一松)이나 서울특별시장 시절이던 2005년 10월 26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청계(淸溪)로 바꿨다. 1970년 12월 19일 김윤옥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시형, 딸은 주연, 승연, 수연이다. 서울시장으로 있던 2006년 2월 21일 제33회 초교파 전국 목회자 부부 영성 세미나에서 "가난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을 통해 성공했다"고 간증했다.
일제 강점기 때 오사카에서 목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와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 사이에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직후 귀국해 포항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로 이사하여 막노동을 비롯해 온갖 잡일을 하던 중 청계천 헌책방 주인에게 얻은 책으로 대입 준비에 들어갔고, 어머니가 좌판 일을 하던 이태원 시장의 상인들 도움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청소 일을 하는 환경미화원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생활고를 피해 군대에 입대했으나 기관지확장증으로 진단받아 훈련소에서 강제 퇴소됐다.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에 체포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대학 졸업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어렵게 현대건설에 입사해 5년 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1977년엔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이 과정에서 1970년엔 6살 연하의 김윤옥과 결혼했다. 1992년에 현대건설 회장직을 그만두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으며,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이어 15대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내던 중,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방지법위반죄혐의로 피소되어 1997년 9월 1심에서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았다. 1998년 2월 항소를 진행하던 중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1998년 4월 항소심서 벌금 400만 원 형이 선고되자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후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부터 객원연구원으로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9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벌금 400만원이 확정되었으나,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된 후, 민선 3기 32대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돼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시 대중교통 환승체계 구축. 서울숲 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인 52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듬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집권 초 한미 쇠고기협상이 타결되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하면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2008년 9월에는 미국발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글로벌금융위기로 같은 해 4분기 들어 미국과 일본, 유럽 선진국들의 GDP 성장률이 일제히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10월 한 달 동안 아이슬란드,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헝가리, 벨로루시 등 5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외신들은 한국의 경제를 비관하며 5개국의 뒤를 이어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제일먼저 국가부도를 맞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F) 프리미엄이 급등하는 등 한국의 부도위험은 사상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화스와프 체결, 매주 비상경제대책회의 주재, 확장적 재정정책 등을 통한 위기극복에 나섰고, 대외적으로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글로벌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성공적으로 글로벌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위기 통제에 만점을 받아 교과서적인 경제회복을 이루어낸 국가’라는 평가를 외신으로부터 받았다. 한편 경제위기 극복이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국정기조를 ‘친 서민 중도실용’으로 삼아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어려움에 처한 중소기업과 서민 살리기 행보에 나섰다.
2010년 4월에는 유럽발 재정위기가 발생하면서 또 한 번 세계경제는 대침체에 빠졌다. 또한 2011년 8월에는 S&P에 의해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세계 경제는 또 한 번의 충격에 빠졌다. 이에 중국, 일본과 맺은 통화스와프를 확대하고 균형재정을 선언하는 등 위기극복에 나섰다. 그 결과 한국은 2012년 8월 무디스, 피치, S&P등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사상 최고의 국가신용등급을 받았고, 특히 피치로부터 받은 국가신용등급은 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을 앞섰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반대 진영은 경제효과 의문, 녹조 등 환경파괴, 부실공사, 공기업, 부실재정, 유지보수비용, 기업의 입찰담합 등을 주장하며 대대적인 비난에 나섰다. 그러나 2015년에 대법원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진행된 4대강 사업 모두 적법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15년에는 4대강 보의 물을 가뭄지역에 공급하는 사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천안함·연평도 포격 사건 및 북핵 문제 등과 같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금강산 관광 중단, 5.24조치 실시 등 강력한 대북경제제재를 취하며 국제사회에 공조 하여 대북압박에 나섰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대북지원을 요구하며 수차례 집요하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요구해 왔지만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을 위해 이를 거부했다.
외교정책은 '더 큰 대한민국(Global Korea)'를 국정지표로 삼아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2011년 부산 원조개발총회, 2012년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함양했다. 또한 2009년엔 UAE 원전을 수주하면서 세계 6번째로 원전수출국의 반열에 섰으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한 아덴만의 여명작전 등 외교 안보적 업적을 남겼다. 대미외교는 임기 중 한미FTA 발효를 통해 60여 년간 이어진 한·미 군사동맹을 ‘안보+경제’의 포괄동맹으로 진일보 시켰다. 또한 한·미 간 미사일지침 개정을 통해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고, 미국비자 면제 프로그램(VWP) 가입하는 등 한미관계는 강화됐다. 대일외교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지향했다. 일본 총리로부터 과거사 반성을 담은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이끌어내고, 조성왕실 의궤를 돌려받는 등 과거사 문제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임기 말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했으나 일본 총리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등 일본 정부가 점차 우경화 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됐고, 일본정부는 이를 독도방문과 일왕 발언 등으로 책임을 돌렸다.
퇴임 이후, 다스를 비롯한 각종 비리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잇따랐으며, 뇌물수수,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역대 대통령들 중 4번째로 구속되었다. 이후 2018년 10월 5일 1심에서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을 선고받았다.
11
박근혜 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18
2013년 2월 25일
2017년 3월 10일
2012년 대선 — 51.6%
(15,773,128표)
새누리당
대통령 직무 정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2016년 12월 9일 ~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파면으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2017년 3월 10일 ~ 2017년 5월 10일)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 절차를 거쳐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대통령이다.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차녀이자 육영수의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청와대에서 자랐다.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했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1974년 모친 사후 귀국하여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대통령 배우자 직무를 대행하였다. 아버지가 서거한 후에는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11년 12월부터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며 당 혁신 작업을 지휘하였고 2012년 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48.0%를 득표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 독신 대통령, 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재임 직후부터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임기 중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민간인의 국정 개입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2016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탄핵 후에는 곧바로 3월 21일 검찰에 소환되어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네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3월 31일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던 중에 2017년 10월 16일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었으나 검사가 앞선 구속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뇌물 공소사실에 대하여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기간이 최대 6개월 연장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하였고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 한편 2017년 11월 3일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강제출당된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국정원 특활비.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전자는 2심, 후자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이다. 2018년 4월 6일 18개 혐의에 대한 1심에서는 혐의 16개에서 일부유죄 및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2018년 7월 20일 혐의 3개에 대한 1심에서는 2개가 인정되어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받은 상태이다. 2개 재판을 합치면 혐의가 총 21개, 형벌은 총 33년형과 벌금 200억 원과 추징금 33억 원이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 체제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신체 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로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특전사를 제대한 후 복학해 다시 학생운동을 이끌며 전두환 군부 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구치소에 투옥됐으나, 조영식 경희대 총장의 신원보증으로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석방되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했으나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거부되자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사법 연수원 종합성적은 개개의 교수도 정확히 알기 힘들다. 이러한 종합 성적을 일개 학생이 과연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보다 엄격한 검증이 요구된다.
2003년에 참여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나 히말라야 산맥으로 트래킹을 떠났으나, 도중에 노무현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문재인은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선출직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동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며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어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015년 2월 8일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선출되었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제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들을 위해 지원 유세를 다녔다.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 시기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하였고, 이재명, 최성, 안희정과 겨루어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17년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41.1%를 득표하여 24%를 득표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대통령이 파면되어 치러진 궐위선거이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당선인 결정 시간인 2017년 5월 10일 8시 9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바로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