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CHEON, KOREA
☆ [3.1절 102주년] 일제 식민잔재를 찾아서
■ 일제의 어업수탈의 현장인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東錦里)의 팔장포(八場浦)에 세워진 에히메촌(愛媛村)
일본이 서구 열강들에게 배운 문물과 제국주의화는 조선의 산업, 특히 어업분야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則,1876),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1883),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1889)과 한일어업협정(韓日漁業協定,1908)의 체결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우리의 뜻과 이익과는 전혀 맞지 않고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조약이라 하겠다.
어업침략과 수탈의 과정에서 한국해의 보조이주어촌의 형성은 식민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지원 정책 중 중요한 것은 원양어업장려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가 공식적으로 해외 출어를 조장한 최초의 정책이기 때문이다.
1906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일본 어민들이 조선 연해의 어업을 장악하기 위해 취한 어업정책을 살펴본 글이다. 일본정부는 1898년 원양어업장려법을 공포하면서 일본 어민의 조선 연해 진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갔다. 그러나 일본 어민이 성어기에 조선 연해를 통어하면서 이익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일본 어민의 조선 이주를 계획하였다. 통감부는 일본 어민의 조선 이주를 조직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협력하면서 적극적 어업정책을 실시해갔다. 먼저 조선 연해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본 어민의 통어와 이주 어민들이 조선 연해에서 어업을 하면서 효율적으로 이익을 얻도록 조선의 어장 및 어종의 현황을 조사하였다. 또한 일본 어민들이 조선에 이주해야 할 근거지를 조사하게 하고 일본 정부가 자금을 제공하여 근거지를 마련하여 일본 어민들을 이주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통감부는 1908년 어업법을 공포하여 일본의 이주어민들이 조선 연해의 어업권을 확보하면서 어업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의 수산정책 중에는 지방자치단체나 수산단체 등이 계획적으로 건설한 이주촌을 “보조 이주어촌(補助移住漁村)이라 하고, 이주어민의 자력으로 어촌을 성립시키고 어업인이 이주하여 건설한 어촌을 자조이주어촌(自助移住漁村)이라 불렀다.
모범적인 보조 이주어촌으로는 경상남도 통영군 미륵도(彌勒島)에 건설된 오카야마현의 보조 이주어촌인 오카야따촌(岡山村)을 들 수 있고 그 이외에도 통영군 이운면에 만들어진 후쿠오카현의 보조이주어촌인 이리사촌(入佐村:1904. 12. 이주)이고 사천지역의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東錦里)의 팔장포(八場浦)에 세워진 에히메현의 에히메촌(愛媛村:1908 이주)이 보조이주어촌으로 주목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세운 사천지역의 보조이주어촌 건설이다.
에히메촌인 팔장포는 24호 67명으로 에히메현 단체이주어촌이며, 사천군 삼천포면 신수도에는 21호 54명으로 오이타현의 단체이주어촌이다. 당시에 동해군과 통영군, 고성군 등지에 이주해 온 일본인 인구는 동해군 태변포의 42호, 168명, 통영군 오카야마촌의 42호 168명, 지세포의 41호 168명, 고성군 히로시마촌 29호 137명, 통영군 도사촌 15호 56명, 부산부 용당동은 15호 55명, 마산부 지바촌 15호, 48명 동래군 다대포는 14호 61명 등이다.
에히메촌은 성공을 거둔 소수의 보조이주어촌으로 남해안의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 팔장포(八場浦)로 후에는 향촌리(香村里)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장소가 이주어촌의 건설지로서 선정된 것은, 에히메촌의 지도자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가 1905년부터의 통어 중, 주변 해역이 남한 굴지의 고등어 어장이라는 사실에 착목하여 선정한 것이다.
「경남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東錦里)의 팔장포에 1908년경 에히메현민의 임의 이주가 있었다. 1912년 미나미우와군 니소토우미촌 오아자(大字) 우티도마리(內伯)의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가 통어로 내포하였을 때, 이주어촌건설지로서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이곳을 동현 원양어업이주어촌 후보지로 선정하고, 그 경영을 현 및 동현 원해출어단 연합회에 자문하여, 현비의 보조를 받아(이주자 1호당 건물 7할, 토지는 3할 보조), 다음 해 3월 우치도마리 어민 12호와 더불어 내주하여 여기에 에히메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야마모토 모모기치 일행은 우선 일본 섬의 원조를 얻어서 조선 삼천포 동금리에 세 채의 나가야(長屋 : 긴 뱃집으로 지금은 헐리고 없어졌으나 동금동 벅수골목에 있었던 긴 집)를 짓고, 앞으로 올 사람들을 위해서 바로 옆의 향촌리에도 장옥을 지었다. 동금리와 향촌리의 일본인촌을 에히메촌(愛媛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주주택은 25호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주 주민이 삼천포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나가야인 장옥(長屋)이 완성되어 있었고, 나가야 부근은 모래땅(沙地)이었기 때문에 경작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고등어떼가 큰 바다를 가득 채우고 흰 소용돌이를 이루어 고기 몰려 다니는 소리를 내어 일본인들을 들뜨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등어망은 히로시마현의 멸치망의 구조를 흉내내서 만든 것으로, 고기떼를 둘러싸면 무리는 망의 앞으로 떨어져서 거의 어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기에 개량을 더해서 분동식(分銅式)으로 고쳐, 겨우 바라던 만큼의 어획물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에히메촌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개항 초기부터 교통운수를 위한 운송점의 설치, 항만시설의 축조, 교통로의 개설이 착공되어 1909년 12월에는 삼천포에서 진주에 이르는 32km의 도로가 완공되었다. 이도로는 경상남도에서는 최초의 신작로(新作路)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삼천포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고 혼간지포교소(本願寺布敎所:선구동), 와카미야신사(若宮神社:선구동 망산), 삼천포우편소(현 동서동 사무소앞 4거리자리) 등이 설치되었다고 에히메현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인 거주자 중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야육이(大野育二, 오노 이꾸니)는 지금의 청널공원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동서동 일대에는 숙박시설, 요리점, 일용잡화상이 즐비하여 대표적인 여관은 하나스키(花月)[일명: 해월(海月)]와 오키노야(沖野屋)가 있었고, 요리점으로는 다이교로(大漁樓) 및 이로하(いろは)들이 번창했다.
한국연안의 어업수탈과 어업 식민화의 의도는 명백하게 나와 있다. “장래 영원의 이익을 증진하고, 피아의 행복을 향유하게 하려면 다음의 시설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이주어촌건설에 대한 일본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엿볼 수가 있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이주민을 장려하여 한국 각지에 일본인의 취락을 만들 것.
2. 한국연해에 일본어촌을 조직하여, 어민으로 하여금 점차 한국의 풍습에 익숙하게(慣熟)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민을 일본풍에 동화시키는 것에 힘을 기울일 것.
3. 前二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래의 방법을 채택할 것.
가. 어업근거지를 정부에서 설치할 것.
나. 감독자를 두어, 각지에서 이주해 오는 어민을 통일정리해서 질서 있는 어촌을 형성할 것.
다. 근거지는 어업을 위한 開市場으로 간주해, 일본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할 것.
라. 한국이주를 바라는 지방을 통일하여 그 단결을 꾀할 것
마. 前各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앙정부 또는 지방청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할 것.
4. 정부는 재정의 사정에 의해 거액의 경비를 지출 할 수 없더라도, 더 더욱 다음의 시설을 위해 필요 있는 것.
가. 상당한 선박을 이용하여 전문기술자를 승선시켜, 조류・低質 등 어장의 상황 또는 수족의 종류・ 분포 등을 조사해, 이것을 공시해 일반의 방침을 정하게 할 것.
나. 통어자 또는 이주민의 조합을 결성하게 할 것.
다. 이주지에서 단속 내지 업무의 지도를 하게 할 것.
이렇게 하여 한국 연안 어장은 다양한 일본어구의 전시장이 되었고, 다소 한국의 전통어구보다 능률적인 것이 많았던 것이므로 한국인들도 일본의 어구어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만 가고, 점점 일본인의 어구어법으로 동화되어 전통적인 어구어법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연근해에서 수산자원은 점차 황폐화되었다.
한국해 어업수탈은, 곧 어민 개개인의 맹목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분별없는 이기주의와 일본이라는 국가집단의 야욕이 침략주의와 결합되어 근대의 한일어업관계를 제국주의화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우고 바다를 내실화 하면서, 바다의 자원화가 곧 국력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바다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우리의 어업사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삼천포지역의 수산업은 당시에는 원시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에히메촌 건설로 선진 수산업을 맞게 되었고 범선에 불과하던 어선이 엔진을 부착한 기선으로 바뀌게 되고 수산업조합이 생김으로써 수산업에 많은 자극을 주었으며 정기 항로의 개발과 진· 삼도로의 개통으로 운송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 일제의 조선어업 지배와 이주어촌 형성, 일본의 어업수탈과정에 대한 고찰, 통감부의 어업 이민 장려와 어업법 제정, 사천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