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수(砲手) 이사룡전(李士龍傳)
이사룡(李士龍)은 성주인(星州人)인데, 양정(良丁 양민(良民)의 장정)으로 병적(兵籍)에 예속되었다. 숭정 무인년(1638, 인조16)에 청로(淸虜)가 황명(皇明)을 침범하면서 우리에게 위협하여 원병(援兵)을 요구하자, 훈국(訓局)에서 정예(精銳)한 군대를 별도로 보낼 때 이사룡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처음 주(州)에 이르러서 묵묵히 점검을 받았는데, 떠날 때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친히 호궤(犒饋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여 보내 주면서 주식(酒食)을 매우 훌륭하게 대접하였으나 사룡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듣건대 우리들을 시켜 노(虜)를 도와서 황제국(皇帝國)을 치게 한다 하니 내가 어찌 차마 이것을 먹겠습니까. 내 마음은 벌써 정해진 바가 있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뜰 아래에서 곧장 목사의 자리에까지 올라와 누웠다 일어났다하기도 하고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앉기도 하였지만, 목사는 그를 내버려두고 나무라지 않았다. 이미 금주위(錦州衛) 송산포(松山浦)에 이르자, 노가 명(明) 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마주 대해 진(陣)을 치고서 교전(交戰)하고 있었다. 노는 우리 군대의 정예함을 아껴 마안산(馬鞍山) 아래 배치해서 시석(矢石)을 방어하도록 하고, 포(砲)를 쏘아서 적을 맞히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후한 상(賞)을 주었다.
사룡은 처음부터 포를 쏘면서 탄환을 넣지 않고 공포만 쏘았는데 노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사룡을 잡아내어 목에 칼을 겨누었으나 사룡이 꿈쩍도 않자 노가 놓아주면서,
“또다시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 네가 만일 포를 쏘아서 맞히기만 하면 곧 후한 상사(賞賜)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사룡이 또 그와 같이 공포만 쏘므로 노가 매우 성을 내었지만 죽이지는 않았는데, 세 번째도 그렇게 공포만 쏘자 노가 마침내 사룡을 어지러이 찍어 죽였다. 이윽고 명 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염탐하여 그 사실을 알고는, 큰 깃대 하나를 게시(揭示)하고 ‘조선 의사 이사룡(朝鮮義士李士龍)’이라고 크게 써 놓으니, 노도 의롭게 여겨 군대를 파하고 아군에게 그의 시체를 수습해 가도록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돌아와 그의 고향인 성주(星州)의 모리(某里)에 장사 지냈다. 그의 아내는 절개를 온전히 지키고 재가하지 않았으며, 선(善)이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때의 성주 목사는 바로 고(故) 참의(參議) 민공 광훈(閔公光勳)이었다. 사룡이 목사가 앉은 자리에 올라와서 누웠다 일어났다하며 다리를 길게 뻗고 앉고 할 때에 어린 노봉(老峯 민광훈의 아들인 민정중(閔鼎重)) 형제가 곁에 있다가 아버지에게 고하기를,
“저놈이 무례한 짓을 하는데도 왜 다스리지 않으십니까?”
하자, 공(公 민광훈을 말함)이,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말을 들어 보니, 내가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후에 노봉이 학사(學士)가 되어 일찍이 회덕(懷德)의 흥룡계사(興龍溪舍)에 와서 밤에 앉아 이 일을 얘기하자,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후에 창강(滄江) 조속(趙涑) 어른이 진잠(鎭岑)의 주촌(舟村)에 들르셨기에 내가 두 차례나 가서 배알하였다. 인하여 그 일에 언급되었는데 조속 어른이,
“나도 대략 들었네. 어찌 전(傳)을 만들어 기록하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민 학사(閔學士)의 뜻도 그러하였습니다.”
숭정 무신년에 내가 온궁(溫宮)으로부터 대가(大駕)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다.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진언(進言)하기를,
“쇠퇴한 세상일수록 더욱 절의(節義)를 높이 추장(推奬)해야 합니다.”
하고, 인하여 엄흥도(嚴興道)ㆍ강효원(姜孝元)과 사룡(士龍)에 대한 일을 말하자, 현묘(顯廟)께서 즉시 이선(李善)에게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니, 이선은 곧 만호(萬戶)가 되었다. 강효원에게는 내수사(內需司)에 있는 종[奴] 두 명을 데려다가 강효원의 아들과 손자의 죄과(罪過)를 대신 속(贖)하도록 명하고, 엄흥도에게는 그의 자손들을 찾아서 관직에 채용하도록 명하였다. 아, 성조(聖朝)의 처사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이를 만하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경(詩經)》에,
“하늘이 백성을 내시니 물(物)마다 법이 있도다. 백성이 떳떳함을 지켜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대저 사룡은 한낱 천졸(賤卒)로서 반드시 성현(聖賢)의 말을 듣고 시서(詩書)의 훈계를 읽은 자는 아니다. 다만 민이(民彝)와 물칙(物則)을 하늘에서 얻어 그것이 마음에 뿌리박혀 황상(皇上)을 존친(尊親)해야 함과 융로(戎虜)를 짐승처럼 여겨야 함을 알고, 스스로 그 향배(向背)를 알아서 자기 몸을 죽이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보건대 대아(大雅 《시경》 대아 증민편(蒸民篇)을 말함)의 훈계가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다.
지금 대저 선비라는 자가 평상시에 경사(經史)를 읽고 의리(義理)를 담론하지만, 사룡과 효원 등에 비교하면 꿈틀거리는 충수(蟲獸)와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사변(事變)을 만나거나 이해(利害)에 직면하게 되면 허둥지둥 당황하다가 의리를 버리고 절개를 잃고도 버젓하게 부끄러운 빛이 없는 자가 많으니, 그들을 사룡 등에 비교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그를 표출(表出)시킨 것이니, 이는 실로 주자(朱子)가 위사(衛士) 당기(唐琦)를 표장(表章)시킨 유의(遺意)이다. 엄흥도는 그의 사적이 야언(野言)에 실려 있고, 강효원의 사적은 노봉(老峯)이 쓴 묘석(墓石)에 나타나 있다.
砲手李士龍傳
李士龍星州人。以良丁隷兵籍。崇禎戊寅。淸虜西犯皇明。嚇索我賦。自訓局別送精銳。士龍與焉。初至州。默然逢點。及行。州牧親犒以送之。酒食甚設。士龍不食。乃言曰。聞以我等助虜攻皇帝國。我何忍食此。我心已有所定矣。仍自庭下。直上州牧坐。或偃仰或箕踞。州牧任之不呵。旣至錦州衛松山鋪。虜與天將祖大壽。對陳交戰。虜愛惜我兵之技精。庇在馬
鞍下。以防矢石。有發砲而中者則輒有重賞。士龍初放砲。不丸虛發。虜覺之猝出。擬刃於頸。士龍不爲動。虜釋之而曰。復敢如是耶。汝若放而中者。卽有重賚。士龍復如是。虜甚怒而猶不殺。至於三則虜遂亂斫以徇之。俄而祖將諜知之。揭示一大旗大書曰。朝鮮義士李士龍。虜亦義之。兵罷。許同仇收尸以歸。歸葬星州某里。其妻全節不嫁。有一子曰善。其時星牧。乃故參議閔公光勳也。當士龍偃仰箕踞也。老峯兄弟幼。從傍告之曰。彼漢無禮。何不治之。公曰。是何言也。聞其言。我不勝愧屈矣。其後老峯爲學士。嘗至懷德
之興龍溪舍。夜坐說此事。因相對流涕矣。其後滄江趙丈涑。來過鎭岑之舟村。余再往拜焉。仍語及之。趙丈曰。余亦略聞之矣。盍爲傳以記之。余曰。閔學士之意亦然矣。崇禎戊申。余自溫宮隨駕入京。嘗於筵席進曰。衰世尤當崇奬節義。仍及嚴興道,姜孝元及士龍事。顯廟卽命除李善職。善卽爲萬戶。姜孝元則命以內需奴二名。代贖其子與孫。興道。命訪其子孫而錄用之。嗚呼。聖朝擧措。可謂善美矣。謹按詩曰。天生烝民。有物有則。民之秉彝。好是懿德。夫士龍一賤卒也。未必聞聖賢之言。讀詩書之訓者。只
是民彝物則。得於天而根於心。知皇上之可尊親。戎虜之爲犬羊。自識其向背。而至於殺身而不悔。觀於此而益信大雅之訓不我欺也。今夫爲士者。平居讀經史談義理。視士龍,孝元等。無異蟲獸之蠢然矣。及其遇事變臨利害。則蒼黃劻惑。去義失身。靦然無恥者滔滔也。其視士龍等。爲如何哉。吾是以表以出之。實朱子表章唐衛士之遺意也。嚴興道。其事載野言。姜孝元。略見老峯所書墓石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