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바라길, 학암포에서 신두리까지 솔숲과 해변과 사구를 걷다
1. 일자: 2022. 11. 19 (목)
2. 장소: 태안 바라길
3. 행로와 시간
[학암포/해변(10:15~40) ~ 구례포해변(10:50~11:20) ~ (점심 11:20~12:10) ~ (모래포집데크/숲길) ~ 전망대(12:33) ~ 먼동해변(12:42) ~ 능파사(13:05~20) ~ 모재쉼터(13:45) ~ 신두리해변(14:00~40) ~ 산두리사구(~15:10) ~ 신두리해수욕장(15:30) / 12.8km]
< 태안 바라길 트레킹을 준비하며 >
태안해변길은 학암포에서 영목항까지 100km 길이의 태안해양국립공원 해안가를 잇는 트레킹로다. 바라, 소원, 파도, 솔모래, 노을, 샛별, 바람이라는 길 이름으로 7구간이 나뉜다. 그간 소원길, 솔모랫길, 바람길을 걸었고, 그중 소원과 바람 구간을 아산과 함께 했다. 오늘 걸을 구간은 긴 길의 시점인 '모래와 바람의 나라' 라는 명칭을 가진 바라길이다. 아울러 새로 개통된 서해랑길 70구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경험자로서 태안해변길을 평하자면 한 마디로, '생각보다 기대보다 훨씬 멋진 명품 길' 이다. 놀랍게도 이 트레킹로가 만들어진 건, 2007년 서해 기름 유출사고로 생태계 파괴와 침체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해안 탐방로를 조성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다. 불의의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태안의 멋진 해안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게다.
오랜 만에 바다를 찾는다. 굳이 동해와 서해를 비교하자면, 동해는 드넓어 바라보는 눈은 시원하나 이내 막막하고 아득한 느낌이 오는 반면, 서해는 첫눈에는 다소 우중충해 보이나 해변길을 걸으면 살아 숨쉬는 갯벌에 다시 눈이 가고 무엇보다 사람사는 내음을 짙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동해가 첫눈에 반했으나 범접하기 어려운 먼 그대라면, 서해는 늘 함께 할 수 있고 알수록 매력 있는 친구 같은 곳이다. 결국 직접 가서 걸어 보고, 안 보고의 차이다. 길을 걸어라 그리고 느끼고 판단하라.
< 희망사항 >
바라길은 12km 거리로 순수 걷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의 하이라이트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신두리사구일 게다. 이에 더하여 곰솔 숲과 긴 해변 그리고 작은 습지도 기대된다. 길을 걸으며 함께 하는 이들과 보고 만나고 경험할 일들도 기대된다. 트레킹을 준비하며 마음은 이미 학암포 해변에 선다. 깊어 가는 가을의 서정을 바다에서도 느껴보고 싶다.
< 태안 가는 길에 >
집을 나서며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조금 서늘하지만 춥지는 않다. 다행이다. 사당에서 버스에 오른다. 맨 뒷자리에 앉는다. 발 뻗을 공간이 넓어 좋다. 제임스님, 거북이님 그리고 처음 뵙는 산타랑님과 함께 앉아 간다. 짝궁들이다.
버스가 양재를 지날 무렵 일출의 기운인지 구름이 붉게 빛난다. 한덩어리 인데도 아랫부분만 붉게 물들고 위쪽은 검회색을 띤다. 색의 조화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이내 오늘의 태양이 떠오른다. 왠지 오늘은 날이 걷기에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서해대교 가는 길은 늘 정체가 심하다. 음악을 듣고 뉴스 기사를 보아도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바다를 보아야지 기다렸는데 지나쳐버리고 버스는 서산 땅에 들어선다. 내포라 불리는 이곳은 나지막한 산에 둘러 쌓인 너른 평야다. 척 보아도 사람 살기 좋은 길지이다. 버스가 제 속도를 낸다. 시원하다.
10시가 넘어서야 학암포에 도착했다. 양재 기준 160km 거리를 오는데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무척 멀다.
< 학암포 ~ 구례포 해수욕장 >
학암포 어촌 마을 어귀에 선다. 도로를 따라 걷다 이내 바다와 마주한다. 낯선 무리를 경계하는 것인지 반가워 하는 것인지 해양경찰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해안으로 내려선다. 바다를 보니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해변을 거닌다. 학암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을 바위섬이 보인다. 해변은 꽤 길었다. 삼삼오오 모여 걷는다. 이제는 낯섬에 익숙하다. 무리 속에 끼이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 시간의 힘인가 보다.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초입부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20여분 해변 투어를 마치고 작은 언덕을 오르내리니 다시 커다란 해수욕장이 등장한다. 구례포다. 학암포보다 더 넓다. 물이 들어온다. 밀물 때 서해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온다. 고운 모래 위 낡은 밧줄 위로 해초들이 들러붙어 작은 초록섬을 만든다. 그 강한 색에 반해 카메라를 누른다. 물 속에서 한 가족이 바다에서 무언가를 잡고 있다. 그 뒤로 섬들이 작은 봉우리를 만들며 바다에 떠 있다. 한가롭고 낭만적인 풍경에 취한다.
물이 들어온다. 파도가 왔다가 간 자리에 깊게 물주름이 만들어진다. 같은 듯 다른 기학학적 무늬가 참 곱다. 어느 섬세한 손길이 빚은 도자기용 흙 같았다. 색다른 경험이다. 아주 천천히 걸으며 바다와 해변과 한 몸이 된다.
밀물이 들어오는 바다는 드넓었고, 물주름이 깊게 패인 긴 해변을 소요했다. 30여분의 구례포 해변유희는 참 좋았다.
3km를 채 못 걸었는데 1시간이 흘렀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수욕장 끝머리 검은 바위가 있는 곳에 점심식당이 차려진다. 다시 낯선 시간이다. 여러 번 와도 식사시간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늘 혼자서 간단히 준비한 간식을 먹는 게 익숙한데, 여럿이 음식을 두고 모이는 자체가 낯설다. 그래도 주는 대로 받아 먹는다. 낙지에, 만두에, 커피에 감까지… . 고마울 따름이다.
긴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진찍기 타임이 길게 이어진다. 바다를 배경으로 검은 바위 위에 올라선다. 아산만의 즐거운 의식이 시작된다. 나도 꽤 많은 사진을 찍혔고, 먼 발치에서 일행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어지는 길에 숲이 등장한다. 반가웠다. 아무리 근사한 해변도 시간이 지나면 지겨워지게 마련이다.
전망대를 지나 내려서자 해변이 나타난다. 예전 모래포집데크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화장실만이 그 역할을 한다. 숲길이 이어진다. 잠시 속도를 내어본다. 작은 전망대에 서 본다. 풍경은 없다. 솔향 그윽한 숲의 늦가을 정취는 고요하다.
< 먼동해변 ~ 신두리 해변 >
먼동해변은 길지 않았다. 다시 오르막이 등장한다. 해발 고작 70m를 올라서는데도 숨이 차다. 피식 웃어본다. 지도를 보니 부근에 국사봉(95.5m) 표식이 있다.
언덕 위에 사찰이 있다. 아마도 서해 해변에서는 처음 보는 절이다. 능파사 부처님은 유리창 넘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다. 절 부근 숲에서 한참을 쉬어 간다. 서아님이 숲을 배경으로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아준다. 고마울 따름이다.
언덕을 넘는다. 태안해변길의 매력은 번갈아 나타나는 곰솔숲과 해변의 조화다. 그 다이나믹에 지루할 틈이 없다. 모재쉼터에서 쉬어 간다. 그늘에 서자 잠시 서 있는데 바람이 차다.
바다가 바람과 냄새로 그 존재를 알려온다. 신두리 해변을 향해 일행을 앞서 속도를 내 본다. 홀로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산길이 끝나고 콘크리트 도로와 마주한다. 강한 햇살이 도로에 내려앉는다. 길고 너른 신두리 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축대 위로 소나무가 호위하는 방죽 길이 길게 이어진다. 한참을 걷다 해변으로 내려선다. 멀리 해안선님의 모습이 보인다.
< 신두리 해변/사구 ~ 신두리 해수욕장 >
누구도 걷지 않은 해변에 내 발자국을 만들며 걷는다. 감동이다. 물주름잔 모래 해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정신은 몽롱해진다. 모든 게 아득히 멀다. 넋 나간 표정으로 바다를 본다. 사위가 고요하고 태양빛이 바다에 반사되어 넘실거린다. 올 가을 최고의 풍경 선물이다.
이내 일행들 무리에 뒤섞인다. 함께 한 이들의 모습을 멀리서 잡아본다. 오늘은 유독 사진작가들이 많이 왔다. 해안선님 솔체님 리차드님 서아님 안개비님 행복세상님, 그리고 이름과 얼굴이 매칭되지 않는 여러분들…. 모두 찍고 찍히는 행위에 진심이다. 그걸 바라보는 내 눈도 즐겁다.
해변 걷기도 시들 해질 무렵, 직감적으로 해변을 뒤로 하고 모래 언덕 위로 올라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구 즉 모래언덕 위에는 억새가 나부낀다. 해변과는 또 다른 감동으로 나를 유혹한다. 다시 삼각대를 세워본다. 사구는 생각보다 그 규모가 컸다. 바람이 실어 올린 모래는 둑을 쌓고 그 규모가 더해져 억새 평원을 만든다. 경사진 곳에는 멘 모래언덕을 만든다. 흰 모래언덕이 시선을 확 끈다. 곳곳에 데크와 사진찍기 포인트가 등장한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의 모습에서 행복을 본다. 가족이 함께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다.
사구가 끝나고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번잡함이 싫어 무심코 다시 해안으로 내려선다. (실수였다. 그때문에 2km를 더 걸었다.) 신두리 해수욕장 주변으로 여러 시설물이 산재해 있고, 해변은 무척 번잡하다. 한참을 해변을 걷다. 길 위로 올라선다. 무심코 해수욕장 주차장까지 왔는데, 우리 차가 없다. 해안선님께 전화를 했다. 버스는 사구센터 주차장에 있다 한다. 뒤돌아 걷는다. 내가 오자 버스는 이내 출발한다. 나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다렸나 보다. 흔지 않은 일이지만 미안했다. 길에서 자만은 금물이다. 덕분에 꽤 많이 더 걸었다.
< 에필로그 >
버스가 출발한다. 등받이에 기대어 사진을 정리한다. 나의 5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사진에 남아 있다. 이 사진들이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게 해 줄 게다.
사당에 와 뒤풀이에 참석했다. 처음이다. 감자탕이 맛나게 끓어 오른다. 배고 고팠고 잘 익은 등뼈살과 시래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웃고 떠들고 먹고…. 새로운 만남이 즐거웠다.
늦여름 같은 날씨의 늦가을이었다. 문뜩 ‘인디언 썸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찾아온 잠시의 한여름같이 따듯한 날을 일컫는다. 박신양과 이미연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말미의 반전이 인상 깊은 영화였고 결국은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다. 영화 못지 않게 '인디안 썸머' 라는 제목에 매료되었고, 이례적으로 따스한 늦가을, 햇살 곱게 내려앉는 길에 서면 아지랑이 피어 오르듯 느껴지는 몽환적인 감상을 오늘 신두리 사구 해안에서 느꼈다.
모퉁이에 선 가을도 끝나가고 있다. 아쉽지만 눈 내리는 겨울이 기다려 지기도 한다.
일요일 새벽 커피 한 잔 내려 노트북 앞에 앉는다. 사진을 정리하고, 산행기의 틀을 잡고 자판을 두드린다. 내만의 행복한 의식이 시작된다.